[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프랑스 음악의 부흥을 선도했던 불세출의 천재, 서거 100주년 맞은 카미유 생상스
입력 : 2021.10.28 14:31:37
수정 : 2021.11.05 14:36:11
지난 10월 초, 국립오페라단은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성경 속 이야기에 기초한 이 오페라는 1877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초연된 생상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국립오페라단이 1980년의 초연 이후 무려 40여 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선보인 이유는 올해가 ‘생상스 서거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자
1921년 12월 16일 알제리에서 세상을 떠난 카미유 생상스는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다. 대표작으로 <동물의 사육제>가 먼저 거론되는 오늘날에는 실감하기 어렵지만, 생전에 생상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거의 모든 장르에 작품을 남긴 전방위적 작곡가였고, 탁월한 오르가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그가 사망한 후 시신은 알제리 총독의 주관 아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운구되었고, 마들렌 교회에서 장례식이 엄수된 다음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될 때에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정부 고관이 긴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러나 사후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후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 밖에서 그랬는데, 그의 음악에는 기술만 있고 정신이 없다느니, 형식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느니, 우아하지만 피상적이라는 식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교향곡 제3번 오르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첼로 협주곡 제1번>,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교향시 <죽음의 무도> 등 상당수 작품들이 꾸준히 각광받아 왔고, 근래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바이올린과 하프를 위한 환상곡> <피아노 4중주 제2번> <피아노, 트럼펫, 현악을 위한 7중주> 등의 실내악곡들이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생상스는 두 세기에 걸친 긴 생애를 살며 근대 음악사의 다양한 변혁과 조우했고, 그 변화의 흐름에 때로는 합류하기도, 때로는 거역하기도 하며 근대 프랑스 음악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생상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카미유 생상스
▶독보적 천재, 탁월한 연주가
1835년 10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난 생상스는 어린 시절 신동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역시 신동으로 유명했던 선배들에 견주어) ‘프랑스의 모차르트’ 또는 ‘프랑스의 멘델스존’이다. 그런데 그의 재능은 모차르트나 멘델스존의 그것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두 살을 넘기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세 살 생일을 갓 넘겼을 때 첫 번째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다섯 살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총보를 연구했고, 일곱 살에는 라틴어를 익혀 고대 로마의 문학작품을 독파했다. 열 살 때는 피아니스트로서 공식 데뷔 연주회를 가졌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다음 앙코르 요청이 들어오자 청중에게 기막힌 제안을 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에서 아무 곡이나 하나 골라주시면 암보로 연주할게요.”
파리 음악원을 다니던 소년 시절에 생상스는 파리의 유명 살롱들을 출입하며 작곡가 구노, 로시니, 베를리오즈, 작가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뒤마 부자 등과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음악원 졸업 후에는 일단 ‘안정된 직장’인 교회 오르간 주자로 취직했다. 그중 1858년부터 1877년까지 봉직했던 마들렌 교회(La Madeleine)는 파리의 귀족들과 부유층이 다니는 ‘프랑스 제국 공식 교회’였다. 당시 그는 빼어난 즉흥연주로 신도들을 황홀경에 빠뜨리곤 했는데, 프란츠 리스트는 그런 그의 연주를 듣고 ‘세계 최고의 오르간 연주가’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도 꾸준히 활동했는데, (아마도 역사상 최초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당대의 트렌드였던 비르투오소 스타일의 과시적인 현란함 대신 순수함, 명료함, 정교함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스타일을 지향했다. 생상스는 교육자이자 멘토이기도 했다. 먼저 1861년부터 3년 남짓 ‘니데르메예르 음악학교’의 교사로 일했는데, 종교음악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보수적 학풍을 지닌 이 학교에서 그는 슈만, 리스트, 바그너 등 당대의 급진적인 음악을 학생들에게 권장하여 관계자들을 경악시켰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유명 작곡가로 가브리엘 포레, 앙드레 메사제 등이 있는데, 특히 포레와는 사제지간 이상의 깊은 우정을 평생 동안 지속했다.
다음으로 1871년에는 동료인 로맹 뷔신과 함께 ‘국민음악협회’를 설립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의 일로, 협회의 설립 목적은 독일 음악에 맞서는 프랑스 음악의 부흥이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성행 중인 오페라 및 발레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던 기악음악의 증진을 꾀했다. 이를 위해 후배 작곡가들에게 관현악과 실내악의 창작을 독려했고 자신도 그 대열에 동참했으며, 라모, 쿠프랭, 샤르팡티에 등 프랑스 바로크 시대 거장들의 음악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프랑크, 샤브리에, 댕디, 포레, 뒤카스, 쇼송, 드뷔시, 라벨 등의 이름이 협회가 주최한 음악회를 통해서 알려졌고, 작가 로맹 롤랑은 그런 협회를 ‘프랑스 예술의 요람이자 안식처’로 규정했다.
<동물의 사육제>
▶영광의 그늘과 만년의 여정
최고 음악가의 삶이라고 해서 마냥 영화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1864년에는 음악원 시절에 낙방했던 ‘로마 대상’에 도전했다가 다시 한 번 고배를 마셨고, 그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1878년에는 마흔 살에 결혼해서 얻은 두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연달아 잃는 아픔을 겪었고, 그 여파로 스무 살 이상 어린 아내와는 3년 후에 결별했다. 1888년에는 정신적 지주였던 모친의 사망으로 인하여 자살까지 고려할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1889년에 초연된 감동적인 역작 <오르간 교향곡>은 어쩌면 그 모든 시련과 고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과 기원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년에 접어들 무렵 생상스는 까칠한 보수주의자, 염세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이 내놓은 급진적 작품들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저서에서 ‘인간이 좌절하는 이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삶의 목적을 찾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행을 자주 다녔다. 런던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환대를 받았고, 미국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 앞에서 연주를 했다. 추운 겨울에는 북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 등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보냈다. 그의 여행지 목록에는 인도양의 실론섬, 대서양 건너 우루과이,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가장 멀리는 베트남의 사이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음악가인 동시에 아마추어 천문학자이며 고고학자, 작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이 불세출의 르네상스맨은 여행지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