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작곡가들이 마지막 작품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갔다. 미완의 <레퀴엠(진혼 미사곡)>을 아내에게 맡기고 눈을 감은 모차르트가 그랬고, <교향곡 제9번 d단조>의 마지막 악장을 끝내 완결 짓지 못한 브루크너, <교향곡 제10번>을 불완전한 스케치로 남긴 말러도 그랬다. 하지만 유명한 <미완성 교향곡>을 남긴 슈베르트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미완성 교향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곡을 썼을 때 슈베르트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의 앞에는 아직 6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통상 미완성 교향곡으로 일컬어지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7(8)번 b단조>는 교향곡 역사에서 손꼽히는 걸작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그리고 이 곡을 묶어서 ‘3대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뭐가 그리도 특별한 걸까? 우선 이 곡은 다채롭고 매혹적인 선율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천상의 아늑함과 감미로움으로, 때로는 지극한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오는 그 선율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율의 대가’였던 슈베르트에게서만 가능한 종류의 것들이다. 아울러 이 곡은 독특하면서도 짜임새 탄탄한 형식을 바탕으로 장엄한 비극성과 심원한 서정성을 아우르고 있다. 그 드라마적 강도와 열기는 베토벤의 그것에 견줄 만하고, 낭만적 흐름의 아름다움과 애틋함은 차이콥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런데 이 곡을 정규 교향곡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색한 면이 있다. 고전적인 교향곡은 대개 네 개 악장으로 구성되는 데 비해 이 곡은 겨우 두 개 악장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반쪽짜리 교향곡’인 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악장까지는 완성되어 있고 세 번째 악장은 불완전한 스케치의 형태로 남아 있다. 다만 완성된 두 악장만으로도 구성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충분히 훌륭하기 때문에 ‘완성작 못지않은 미완성작’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처럼 불완전한 형태이면서도 정규 교향곡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작품은 이 곡이 거의 유일하다.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미완의 토르소에 얽힌 사연
그렇다면 슈베르트는 왜 이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방치했던 것일까? 일단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부터 살펴보자. 1823년 4월, 슈베르트는 그라츠(Graz·오스트리아 남부의 도시)에 있는 ‘슈타이어마르크 음악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살리에리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친구 안젤름 휘텐브레너가 애써준 덕분이었고, 그로서는 처음으로 누려보는 공식적인 영예였다. 슈베르트는 답례로 ‘한 편의 (온전한) 교향곡’을 협회에 증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1년이 넘도록 지켜지지 않았고, 슈베르트는 부친의 꾸지람을 듣고 나서야 부랴부랴 교향곡 악보 한 뭉치를 휘텐브레너에게 보냈다. 첫 페이지에 ‘1822년 10월 30일(작곡에 착수한 날짜)’이라고 적혀 있었던 그 곡이 바로 오늘날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그런데 휘텐브레너는 무슨 이유에선지 악보를 협회에 전달하지 않고 자신의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혹시 나머지 악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어쨌든 그렇게 시간은 흘러, 1828년 11월에 슈베르트가 31세 나이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나서도 30여 년이 더 지났다. 1860년 3월, 안젤름의 동생인 요제프 휘텐브레너는 열성적인 슈베르트 옹호자인 지휘자 요한 폰 헤르베크에게 자기 형이 슈베르트의 미공개 교향곡 악보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그 ‘보물’이 슈베르트 자신의 위대한 <교향곡 제8(9)번 C장조>, 나아가 베토벤의 교향곡들에 견줄 만한 걸작이라고 칭송했다. 그리하여 <미완성 교향곡>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다만 그 역사적인 공개 초연은 헤르베크의 사정상 다시 5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1865년 12월 17일 비엔나에서 초연된 이래, 사람들은 슈베르트가 이 곡을 미완성으로 방치한 이유를 궁금해 해왔다. 덕분에 갖가지 추론과 가설이 난무했는데, 그중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작곡 도중에 만난 ‘걸림돌’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일군의 연구가들은 슈베르트가 처음에는 즐겁게, 미친 듯이 작곡에 몰두하다가도 어느 순간 모종의 기술적 난관에 처한다든지,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든지 하면 지레 흥미를 잃고 포기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3악장의 스케치를 보면 앞선 악장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감이 있는데, 어쩌면 슈베르트도 3악장을 쓰다가 ‘이 길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먼저 써야 할 다른 작품에 신경 쓰느라 작곡이 중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1822년 11월에 슈베르트는 <미완성 교향곡>을 제쳐두고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일명 ‘방랑자 환상곡’의 작곡에 매달렸는데, 이 곡의 경우 헌정 받을 후원자로부터 미리 사례금까지 받아두었기에 완성을 서둘러야 했으리라. 그리고 <미완성 교향곡>을 다시 잡았을 때는 이미 영감과 흥미가 증발해버린 후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뻔한) 결론을 말하자면, 슈베르트가 다시 살아나서 말해주거나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 한 ‘미완성’의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다면, 다음과 같은 낭만적 해석에 기대는 편이 오히려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슈베르트가 더 이상 작품을 계속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아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발터 담스)
슈베르트
▶다면체적 걸작이 품은 이야기
사실 정작 중요한 건 슈베르트가 이 곡을 ‘쓴’ 이유일 것이다. 오랜 친구였던 슈파운은 그가 첫 가곡들을 쓰던 소년 시절에 남긴 말을 이렇게 전한다.
“은밀하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네. 그러나 베토벤 이후에 누가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작곡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그는 같은 도시에 살았던 베토벤을 크게 의식했다. 존경하는 베토벤처럼 위대한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부단히 노력하되 그 아류가 되지는 않으려 했다. <미완성 교향곡>은 그 고군분투의 여정 끝에 도달한 첫 번째 정점이었다. 이 곡의 1악장을 들으면서 <운명 교향곡>의 영향을 짚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슈베르트는 자신만의 개성도 충분히 드러냈다. 특히 천국 같은 환상과 지옥 같은 현실을 대비시킨 듯한 2악장의 절묘한 아름다움은 온전히 그의 솜씨이다.
한편으로 이 곡에는 그의 자화상과 그가 살았던 세상, 그리고 그가 품었던 고뇌와 소망 등이 응축된 이미지로 투영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보헤미안이 되기를 자청했던 청년 예술가의 소망과 포부,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야 했던 볼품없는 사내의 아픔과 슬픔, 젊디젊은 나이에 몹쓸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겨야 했던 외로운 음악가의 얼굴 등등, 듣다 보면 언뜻언뜻 이런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간다. 또 메테르니히 치하의 경찰국가였던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