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시작한 지 어언 반세기를 넘는 성상(星霜)이 흘렀다. 한 해, 한 해 쌓인 시간은 어느새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궤적이 되었다. 그 출발점은 1968년, 선친을 마중하기 위해 찾았던 서울컨트리클럽이었다. 18홀 티그 라운드에서 힘차게 날아오른 티샷이 붉게 물든 석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던 장면은, 당시 꿈 많고 감수성 예민했던 소년의 마음에 깊고 선명한 각인으로 남았다.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 장면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한순간에 포개진 장엄한 풍경이었다.
드넓은 푸른 잔디와 울창한 나무숲, 마치 페르시아 카펫위를 걷는 듯한 폭신한 감촉의 페어웨이. 그날의 서울컨트리는 단순한 골프장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아버지의 뒷모습과 골프, 그리고 대자연이 하나의 이미지로 내 마음속에 새겨졌고, 그 기억은 이후 골프를 단순한 경기나 취미가 아닌, 평생을 함께할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 들이게 한 원천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해 골프에 바로 입문해 당시 서울컨트리 헤드프로였던 홍덕산 프로에게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그 인연은 40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이어졌다. 골프는 늘 나를 긴장하게 했고, 또 설레게 했다. 잘 맞은 샷 하나에 하루의 피로가 씻기고, 뜻대로 되지 않는 라운드에서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골프 덕분에 내 인생은 얼마나 많은 순간에 기쁨과 성찰을 동시에 누렸던가. 얼마전 신문 지면에서 설악플라자 CC의 김태성 씨가 생면부지의 만성 신부전증 환자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저에게 주신 건강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보람 있습니다”라는 그의 담담한 말은 긴 여운을 남겼다. 인간은 본디 이런 마음을 가질때 가장 아름답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리고 공동체적 책임을 외면하는 이들보다, 묵묵히 나눔을 실천하는 한사람의 마음이 사회를, 더 나아가 역사를 진보시킨다. 필자 역시 골프 인생의 불혹, 40년이라는 시간에서 삶의 충만함을 배웠다면 이제는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골프를 사랑하는 이들뿐 아니라, 아직 골프의 세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동반자를 소개하고 인도하고 싶다. 지금은 추억의 하나로 기억되지는 2008년 12월, 대한골프협회가 주관한 골프아카데미가 제주에서 열렸다. 필자도 강사로 참여해 봉사의 시간을 가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골프 업계 종사자들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어지는 강의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국제 금융위기의 한파로 업계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 속에서도, 이들의 눈빛에는 골프에 대한 책임과 열정이 분명히 살아 있었다. 이러한 진지함이 있기에 위기는 언젠가 교훈이 되어 다시 도약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이번 아카데미는 골프의 역사와 기본 개념, 멘털과 철학, 룰과 사례 해설 등 폭넓고도 깊이 있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강단에 선 강사의 모습은 모든 청강생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필자 또한 강사로 참가했지만, 동시에 배우는 입장에서 많은 것을 얻은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카데미 마지막 날, 전원이 함께한 오라골프장 라운드는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눈보라 속에서 이루어졌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붉은 열매를 맺은 피라칸사스가 설경과 어우러진 풍경은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런 날씨 속에서 동료, 선후배와 함께하는 라운드라니. 샷이 잘 맞지 않으면 어떤가. 퍼팅한 공이 눈사람이 되어 굴러가지 않으면 또 어떤가. 깔깔 웃으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겨울의 ‘호호골프’야말로 골프가 우리에게 허락한 또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인생에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고 한다. 초년출세, 중년 상처, 노년무전. 필자는 여기에 노년무업을 더하고 싶다.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난 시대에 은퇴 이후의 삶은 더이상 여생이 아니다. 60세 이후의 수십 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숙제다. 그런 의미에서 골프는 노년의 시간을 채워주는 가장 건강하고 품위 있는 동반자라 할 수 있다.
결혼생활 역시 골프와 닮아 있다. 서로를 비난하지 말것, 비교하지 말 것, 그리고 상대를 소유물처럼 묶어두지 말 것. 골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실력이나 동반자의 플레이를 깎아내리거나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 골프는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 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골프를 대하고 동반자에게 감사할 때, 골프는 비로소 삶의 진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사람은 어떤 직업을 가졌든 자신의 업에 충실해야 하며, 동시에 노년을 대비한 취미를 일찍부터 가꾸어야 한다. 골프는 과시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연마와 균형의 길이어야 한다. 조용히 땀 흘리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골프인의 모습에서 필자는 늘 삶의 도를 본다.
골프는 결국 인생을 닮는다. 겸손과 배려, 나눔과 성찰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낸다 반세기를 넘어 함께해온 이 동반자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조용히 그러나 든든하게 내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란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문화 진작을 통한 국격 향상과 통일 기반 조성을 실천해왔다. 핸디(O)의 골프 실력자다. 아시아 100대코스선정위원장과 대한프로골프협회(KPGA)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골프문화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