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단어와, 영국 배우 케이트 윈슬렛을 동시에 떠올리면 어떤 감정이 드시는지요. 수많은 생각이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그 감정은 ‘야릇하고 외설적인’ 느낌일 겁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가 미성년 소년과의 성애를 다루는 문제작이었던 데다 영화 ‘타이타닉’의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나체로 열연했던 장면의 기억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 영화는 외설적인 작품으로‘만’ 기억되진 않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로 나아가는 무거운 주제의식 때문입니다. 영화의 원작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일 내에서 1999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 이후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주인공 한나 슈미트는 트램 검표원입니다. 유럽을 휩쓴 비극의 전쟁은 끝났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시기는 1958년, 한나는 36세였습니다.
한나는 오래전 나치 친위대로 활동했던 끔찍한 부역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옛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평범한 얼굴로 살아가지요. 어느 날, 한나는 간염과 성홍열 때문에 거리에서 구토 중이던 15세 소년 마이클을 선의로 도와줍니다. 이후 사춘기 소년의 성적 호기심을 눈치챈 한나는 마이클의 앳된 성욕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관계가 깊어진 두 사람은 ‘21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관계를 맺습니다.
한나가 소년 마이클에게 천명한 규칙은 단 하나였습니다. ‘섹스 전에, 내게 책을 읽어줄 것.’ 한동안 휘몰아쳤던 침대 위 두 사람의 열정은 결국 이별로 종결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이클은 법대생이 되어 한 홀로코스트 재판을 참관하게 되지요. 마이클은 그 재판장에서 ‘나치 동조 혐의’를 받아 재판에 부쳐진 ‘죄인’ 한나 슈미트를 보게 됩니다. 8년 만의 재회였고 그녀의 나이는 이제 43세였습니다. 로스쿨생 마이클에게는, 한때 자신의 동정을 내맡겼던 저 여인이 과거 나치였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진짜 충격의 이유는 따로 있었지요. 소년 시절의 마이클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아이들에게 한나가 책을 읽도록 시켰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들 때문이었습니다. 재판 결과 종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한나에게 중년이 된 마이클은 여러 권의 책을 녹음해 보내줍니다. 이 책의 부제가 ‘책 읽어주는 남자’인 이유였지요.
영화와 소설 ‘더 리더’를 나란히 놓고 확인해보면 소설의 영화화 과정에서 주제의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휘었음이 어렵지 않게 감지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작품에서 마이클이 한나에게 공통적으로 읽어주는 책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명저 ‘오디세이’입니다. 그런데 영화와 소설에서 ‘오디세이’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마이클은 영화에서 ‘오디세이’의 여러 부분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한나에게 보내줍니다. 한나는 ‘과거의 그 소년’이 들려주는 ‘오디세이’를 수년에 걸쳐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요. 영화에 인용된 ‘오디세이’ 문구는 오디세우스가 고행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에게 말하는 대목입니다. 여러 대목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대략 이런 부분들입니다. “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영혼과 그보다 앞서 살아간 영혼들을 만나고 싶었다. (중략) 검을 거두고 함께 잠자리에 듭시다. 내 침대에 올라 사랑의 마법에 빠져들어요. 우린 서로를 깊이 신뢰하게 될 거예요.” 이 문장들은 ‘고통 끝에 성공한 귀향, 그리고 사랑의 완성’이란 주제로 귀결되지요.
그런데 소설에서 ‘오디세이’의 의미는 영화와 다르게 전개 됩니다. 마이클이 ‘오디세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소설은 마이클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 마이클은 “‘오디세이’는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단언하지요. 그(‘나’, 마이클)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 귀향한 것이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디세이’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194쪽)
영화는 영웅의 귀향과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정작 원작인 소설에서는 귀향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진단한 겁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좀 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나가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한 이유는 그녀 자신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文盲)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요. 한나는 죄의식 없이 수용자들을 ‘죽음의 기차’에 태워 보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나치의 하급 잡부에 가까웠더라도 대학살의 부역자란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이는 그녀가 글을 알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점과 유관합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건 사유의 계기로 이어지는데 한나는 그 기회를 얻지 못한 셈이니까요. 소설 속 한나가 회심하는 결정적 계기는 ‘오디세이’에 이어 그녀가 글을 독학으로 깨친 뒤 읽게 되는 책들 덕분에 형성됩니다. 영화에선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지만 소설에서 수형 생활 중인 한나는 교도관에게 부탁해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 희생자가 쓴 책의 총목록’을 구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이후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등의 책을 접하지요.
문제는, 한나가 이 책을 읽은 뒤 결국 자살했다는 점입니다. 영화에선 한나가 원작에서 읽었던 책에 대한 설명 없이 그녀가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 마치는 당일에 (마치 새로운 생활이 두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그려질 뿐이지만, 원작 소설에선 분명하게도 그녀가 읽은 홀로코스트 관련 책들이 죽음에 영향을 끼쳤음이 감지됩니다. 왜일까요. 소설에서 한나는 문맹의 상태에서 벗어나 글과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저질렀던 죄악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것입니다. 문맹 단계를 넘어서 글 읽기가 가능해진 한나의 독해력이 결국 그녀 내부에서 ‘평생 뜬 적 없던 눈(眼)을 열도록(開)’ 만든 것이지요. 단지 글만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 아니라 ‘도덕적 문맹’이었던 한 인간이 희생자의 책 읽기 행위를 통해 도덕적 개안(開眼)을 경험한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디세이’ 문제도 이 지점에서 드디어 이해가 가능해지는 듯합니다. 영화는 ‘한나와 마이클의 오랜 사랑’이란 주제에 포커싱한 느낌이지만, 소설 속 마이클은 다릅니다. 그는 ‘오디세이’가 “귀향을 지향하는 책이 아니다”라고 단언했지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속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독일인 전체의 과거사에 대한 회귀적 접근’이란 하나의 거대한 은유를 형성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이클이 소년 시절의 자신과 한나의 관계를 기억하고 맴도는 행위는, 독일 사회가 홀로코스트 시절의 비극적 과거사를 맴도는 것과 같아지니까요. 중년 마이클이 한나와 지속적으로 교감하는 건 단지 한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감옥에 갇힌(심판대 위의 나치, 즉 독일사 비극의 원천)’ 한나라는 존재를 마이클의 시선을 통해 들여다보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겪은 사건(홀로코스트)을 이해하기 위한 행동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화 ‘더 리더’는 한나와 마이클의 회한 가득한 사랑이란 주제로 나아가는 반면, 소설은 이 작품의 가장 굵직한 소재인 비극적 역사와 애도를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오디세우스의 귀향이란 주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마이클은 ‘오디세이’가 오디세우스의 귀향에 주목하기 위한 게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한 책이라고 썼습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독일이 비극적인 과거사를 되짚는 건 역사와 애도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지, 단지 과거에 머무르려는 정지된 운동의 회고가 아님”을 이야기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도덕적) 문맹 상태였던 한나는 사유와 성찰의 계기를 경험하지 못했던 순수한 무지(無知), 또 한없이 비이성적인 나치 독일인 전체를 상징하며, 마이클은 한나로 대표되는 구세대에 의해 과거 폭력을 경험한 피해 세대의 귀환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로 알려진 세계적인 홀로코스트 작가이고, 엘리 위젤은 ‘나이트’, 타데우쉬 보로프스키는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란 단편소설집으로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문인입니다. 한나는 그들의 책을 읽으며 스스로 각성과 갱생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그녀는 독서 행위를 통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절절히 깨달았고, 결국 유일한 선택을 알게 됐습니다. 그 선택의 이름은 자살이었습니다.
다시 작품 속으로 돌아가서, 한나는 마이클을 자주 씻겨줍니다. 옷을 벗은 마이클의 몸을 반복적으로 닦아주고 급기야 소년의 성기를 애무했습니다. 한나가 마이클의 신체를 꼼꼼하게 닦고 가장 은밀한 부위에 손을 대는 건 그녀 자신이 과거의 죄를 씻는 행위와 등가를 이룹니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소설 속 문제적인 장면을 하나 더 알려드리며 글을 맺습니다. 한나가 ‘가죽 허리띠’로 마이클의 얼굴을 폭행하는 장면입니다. 언쟁 끝에 화가 나 마이클을 가격한 한나는 스스로 놀라 눈물을 흘립니다. 한나가 마이클을 때린 건 그녀가 아우슈비츠의 소년을 때렸던 행동의 반복과 같습니다. 그녀는 적어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 한나가 교육을 통해 책을 접하고 이로써 사유의 계기를 접했다면 그녀는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 가운데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요. 평범한 얼굴 뒤의 악은 필연적일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나는 평범한 얼굴로 도시에 숨어 검표원으로 일했습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의 아이들을 ‘분류’하고 주기적으로 지옥행 열차에 탑승시켰던 그녀의 비밀 과거사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