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슴 한구석에 뱀처럼 도사린 태생적 감정이 있다면 아마도 질투일 겁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선 증오와 적의의 감정인 질투를 ‘칠죄종(peccata capitalia)’이라 부르며 금했고, 불교에서도 질투를 미움과 시샘의 번뇌로 봤으며, 이슬람교 쿠란에서도 질투는 엄중히 통제됐습니다. 하지만 질투심 없는 인간이 가능할까요.
영화 <아마데우스>는 질투를 주제 삼은 걸작입니다. 아카데미상 트로피를 쓸어 담으며 8관왕을 차지했던, 완벽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1979년 초겨울 런던의 올리비에 국립극장에서 초연됐던 동명의 희곡 <아마데우스>가 원작입니다.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왕실 제1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살의(殺意)를 품으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질투라는 감정에 관한 정신병적 해부학 도록에 가까운 <아마데우스>의 심연으로 가봅니다.
1823년 11월 초겨울, 오스트리아 빈에서 70대 왕실 궁정 악장 살리에리가 정신착란을 일으킵니다. 살리에리는 자신이 32년 전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살리에리는 “용서해주오, 모차르트! 당신의 암살자를 용서해주시오”라면서 면도날로 자신의 목을 긋습니다.
회복 후 정신병동에 감금된 살리에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선 고해성사 신부에게, 희곡(연극) <아마데우스>에선 무대 앞 관객에게 젊은 시절 죄상을 고백합니다. 무슨 사연이었던 걸까요.<아마데우스>는 1781년 31세였던 살리에리를 비춥니다. 그는 빈에서 가장 성공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황제 요제프의 총애를 받았고 만인이 그의 음악을 숭앙했습니다. 살리에리는 어린 시절부터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신이 주신 음악을 통해 신의 창공을 빛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살리에리의 악보는 음악적 진리를 찾는 구도(求道)의 여정에 가까웠습니다.
어느 날, 잘츠부르크 출신인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빈으로 이사를 옵니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으로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4세 때 협주곡을 완성했고 5세 때 황제에게 불려가 눈을 가리고 연주했으며 14세 때 장막 오페라를 작곡했던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살리에리가 처음 본 모차르트 성정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약혼녀 앞에서 ‘북북’ 방구를 뀌고, 여자 치마 벗기기를 즐겼으며, 낄낄대는 천박한 웃음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무슨 저딴 녀석이 황제 총애를 받는가 싶었던 살리에리는, 그러나 모차르트의 연주가 시작되자 숨이 막혀 말도 잇지 못합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악보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어버렸습니다. 천재적 음악을 식별하는 능력을 가진 건 그 자리에서 오직 자신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만든 곡을 즉석에서 약간 수정해 인류 전체가 종말 때까지 듣고도 남을 명곡으로 바꿔버립니다.
살리에리는 기도하며 절규합니다. “그자의 음악 앞에 나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 따윈 생명 없는 낙서질에 불과했습니다.”(130쪽)
모차르트가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창조하는 ‘신의 피리’가 되어가는 동안, 살리에리 자신은 하찮은 골동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자괴감으로 고민합니다.
살리에리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모차르트의 가난을 설계하고,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다가간 뒤 모차르트에게 거금을 줄 테니 ‘진혼곡’을 두 달 안에 완성하라고 독촉합니다. 지난날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빈곤을 딛고 아내 콘스탄체와 아들 칼을 먹여 살리려던 모차르트는 다발성 합병증으로 사망합니다. 모차르트 암살은 살리에리 자신만이 관객이었던 은폐된 역작이 되었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느꼈던 분노는 모차르트를 향합니다. 신의 은총을 모두 가져가버린 천재 모차르트를 향한 살리에리의 살인충동이었습니다.
희곡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에 대한 살리에리의 살인을 다루되, 살리에리가 겨냥하는 타깃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모차르트 ‘너머’에 있는 창조주로서의 신입니다. 살리에리는 신에게 평생 재능을 갈구했습니다. 신은 살리에리가 원했던 재능 대신 명성과 부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살리에리가 진짜로 원했던 건 재능이었지요. 신은 살리에리에게 재능 대신 ‘재능을 가진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식별력만을 허락했습니다. 재능은 ‘마누라에게 엉덩이나 얻어 맞으며 배설물(똥) 소리나 지껄이는 철딱서니 없는’ 모차르트에게 갔습니다. 살리에리가 극심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예술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건 오직 하나, 당신(신)의 소리를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 당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직 모차르트를 부르는 당신의 소리 말입니다. 그런 자를 당신은 신의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불공평한 신이여, 당신은 적이요!”(131~132쪽)
그런 점에서, 피터 섀퍼가 원작 희곡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신과 인간의 관계’일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치 않는 자신을 만나 한계를 느낄 때, 그러나 그 한계를 가뿐히 초월한 타인을 만나 절망할 때,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과 신에 대한 배반감을 동시에 느끼는 존재이니까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스쳐 지나가기 쉬운 한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황제 요제프의 허락으로 오페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궁정 관료들은 이탈리아어를, 모차르트는 독일어를 주장합니다.
원작 희곡을 보면 이 논쟁이 왜 필요했는지가 자세히 나옵니다. 황제 앞에서 말을 아끼는 영화 속 모차르트와 달리, 희곡에서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어, 아니 이탈리아 전체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탈리아를 “깍쟁이” “시건방지고 시시콜콜한 놈들”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후 모차르트는 황제의 승인을 받아 독일어를 채택하고, 살리에리 등 궁정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결혼> 작곡을 통해 ‘진짜 인간’의 모습을 무대 위에 구현합니다.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모차르트는 250쪽이 넘는 원작 희곡과 상영시간 180분짜리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신을 이야기하거나 신에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모차르트는 ‘진짜 인간’을 다룬 <피가로의 결혼>을 만듭니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어로 만든 기존 오페라가 인간의 복합적 감정을 단출하게 만들어버리는 따분한 예술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삶이란 복잡하며, 따라서 무대 위 인물도 그러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난 진짜 인간이 나오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사실적인 장소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저는 진짜 인생을 묘사하고 싶습니다.”(155~156쪽)
모차르트에게 이탈리아어는 신의 말씀을 구현하는 허황된 언어에 가깝고, 투박한 독일어는 사람 냄새 나는 참다운 언어였던 것이지요.
청중을 신으로 받드는 천재 영웅 모차르트가 나타나 무대 위 전통 언어였던 이탈리아어와 살리에리로 대표되는 궁정을 전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관객(또는 희곡 독자)은 벅찬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원작자 피터 섀퍼는 이 구도를 알았을 겁니다. 모차르트의 인간성 희구와 전통의 전복이란 주제는 그래서 이미 성공이 예견됐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유하자면 살리에리가 오페라 무대에 만들어내는 인물이 ‘신 앞에서 기도하는 인간’인 반면, 모차르트가 오페라 무대에 만들어내는 인물은 ‘진짜 인간’인 셈이지요.
희곡 <아마데우스>엔 영화에서 표현되지 못한 여러 작고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 대면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를 아예 알지 못한다는 점(영화에선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와 키스하고 육체를 탐하려 한다는 점(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콘스탄체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습니다)도 다릅니다. 아무리 명작이어도 원작에 숨겨진 디테일까지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겠지요.
신이 내려준 악상을 받아 적기만 하면 명곡이 됐던 천재 모차르트, 그리고 시시각각 재능의 한계에 절망했던 살리에리. 이 글을 읽을 여러분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고작 35세 나이에 죽었음에도 영원히 기억되는 모차르트에 비견한다면, 비록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시대 우리의 삶은 후자겠지요.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개인적으로 늘 누군가를 질투하고, 신이 주지 않으신 재능의 결여에 절망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야속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마데우스>가 공평하지 않은 신에 대한 인간의 울분으로 읽히는 건 그 때문일까요.
살리에리는 최후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모차르트가 되지 못할 바엔 다른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소.”(255쪽) 그런 점에서 작품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되기 위해 수많은 밤을 번민했을 우리 안의 살리에리를 위한 언어의 진혼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살리에리가 아니었던가요.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