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에 세 번은 기회가 찾아온다는 속언이 있다. 기회를 굳게 붙잡아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망설이다 기회를 놓치는 사람도 있고, 기회인지조차 모르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다. 아무도 무작정 살지는 않는다. 누구나 기회를 노리거나 엿보다 때가 되면 그 기회를 잡거나 살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운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고, 기다린다고 운이 다가오지도 않는다. 운명은 무심하다. 운은 사람을 헤아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오랜 추구 끝에 간신히 손에 쥔 지위 앞에서 병들어 거꾸러지고, 어떤 사람은 인생 절정에서 사고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지고, 어떤 사람은 지옥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문득 금덩이를 발견한다. 인생은 새옹지마다. 행운처럼 여겼던 일이 재앙으로 돌변하고, 재앙처럼 느꼈던 일이 행운으로 바뀐다. <회남자>는 말한다. “복은 화가 되고 화는 복이 되나니, 삶의 변화는 그 끝을 헤아릴 수도 그 깊이를 잴 수도 없다.”
우주 자연엔 아무 계획도 없다. 무한한 힘이 서로 뒤얽히면서 무작위로 사건들이 일어날 뿐이다. <도덕경>에 따르면, “하늘과 땅은 헤아리지 않는다. 세상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우주의 수레바퀴가 구를 때 인간이란 그 앞에 놓인 하찮은 짚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행운을 바란다고 행운이 오지도 않고, 불운을 피하려 한다고 불운이 비켜 가지도 않는다. 따라서 성공을 자랑하는 일도 어리석고, 불운을 한탄하는 일도 어리석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노자의 말처럼, “억지로 하려 하지 않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도 없다.”
게다가 최악의 불운을 기회로 착각해 분투하다 쓰러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기회의 심리학>(안타레스)에서 바버라 블래츨리 미국 아그네스스콧칼리지 교수는 인간의 뇌는 완전 무작위로부터 억지로 질서를 보려 고집하고, 우연한 패턴을 우주 질서의 증거로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서로 연관 없는 사건들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무의미한 잡음에서 유의미한 소리를 찾으려는 편향을 타고난다. 열흘이나 주가가 내렸으니 내일 주가는 오르리라고 생각하는 개미들처럼, 구름에서 신의 얼굴을 읽어내는 광신도들처럼 우연을 필연으로 착각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무모한 도전의 결과는 대부분 파멸이다.
그러나 자연의 무작위성, 운명의 무자비함에 저항해 억지로 행운을 붙잡으려는 분투를 거듭하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인생이란 무작위적 사건과 부단한 노력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다. 이카로스가 깃털에 역청을 발라 날개를 제작한 후 하늘로 날아올랐기에 인간은 비행기를 발명할 수 있었다. 아흔 살 노인이 삼태기에 흙을 담아 바다에 버리는 일을 시작했기에 인간은 산을 옮기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의 무정에 인간적 유정을 불어넣으려는 노력만이 인생에 행운을 데려온다.
타고나거나 기다려서는 기회를 잡을 수 없고, 다가가 도전할 때만 기회는 찾아온다. 노력이 늘 효과가 있는 건 아니나, 혼돈의 세계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굴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간신히 위대해진다. 우연한 세상에서 행운의 기회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만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노래했다. “행운은 우연이 아니다. 힘들게 일한 것. 포르투나 여신의 값비싼 미소는 애써서 얻은 것. 광산에서 일하는 아버지, 낡고 철 지난 동전, 우리가 무시했던.”
포르투나 여신은 행운의 여신이다. 앞머리만 있고 뒷머리는 없는 이 여신은 우리 곁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기에 단단히 악력을 단련하지 않으면 눈뜨고도 놓치기 쉽다. 기회를 분별하는 예리한 지성, 현실로 바꿀 줄 아는 다져진 실력이 있어야 운은 필연이 된다. 블래츨리 교수의 말처럼, “행운이 오길 기다리면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기회가 왔을 때 담담하고 당연하게 행운을 잡을 수 있는 사람, ‘운이 좋아도 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기회라는 말의 본래 의미이기도 하다.
한자 기(機)는 창(戈)에 사악한 것을 무찌르는 힘이 있는 실 장식(絲)을 달아 낯설고 기이한 현상을 조사하고 추궁 하면서 앞날을 살피는 일이다. 이 일을 소홀히 하면 악령이 기승을 부려서 일이 힘들고 괴로워지며, 때에 맞춰(會) 부지런히 하면 어떤 일이든 평온하게 치를 수 있다. 불운을 물리쳐 기회를 잡는 사람들은 앞날을 생각하면서 순간을 신중하고 조심스레 살아가는 이들이다. 비정한 운명 앞에서 시간의 나무를 깎아 단단한 창을 마련하고 삶의 물레를 돌려 신성한 실을 자아 이들은 우연을 기회로, 기회를 행운으로 바꾼다. 운을 삶으로 초대한다. 운명과 숙명은 다르다. 숙명(fate)은 피할 수 없는 길,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지 않는 삶의 길이다. 그러나 운명(destiny)은 의도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우발적 사건의 폭풍 속에서 우리 선택과 행동에 따라서 명(命)을 움직일(運) 수 있음을 암시한다. 숙명은 신만이 알 수 있지만, 운명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인생길이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삶을 산다. 그러나 누구도 같은 길을 걸어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기회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갑자기, 그냥, 우연히 일어나 닥쳐오는 사건 속에서 과거를 주의 깊게 살펴 미흡한 요소를 찾아내고 의미 있는 요소를 발굴하며, 이를 바탕 삼아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는 일 자체가 위기에서 기회를 엿보고, 삶의 불확실성을 낮춰 행운을 일구는 일이다. 블래츨리에 따르면, 우연에 질서가 있어서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즉 자신한테 세상의 무작위성을 통제할 기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수에 덜 불안해하고, 인간과 인간, 사건과 사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고리를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운이 더욱 좋아지고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 뇌의 예측 코딩 능력이 늘어나는 까닭이다.
기억, 기대, 믿음은 우리를 자주 잘못된 판단과 처참한 실패에 이르게 하나, 우리의 유일한 재능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과거 또는 현재에 벌어진 우연한 사건들을 놓고 미래를 위해 힘써 추진해야 할 일의 징후나 애써 피해야할 일의 기미로 여긴다. 주의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게 만들고, 행운의 예감에 귀 기울이게 하며, 기대는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하게 하고 좌절과 절망에 좀처럼 지지 않게 만든다.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 배우고 장차 일어날 일을 예감하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도전하는 사람만이 삶을 바꾸고 명을 움직일 수 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