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녘’이란 순우리말이 있다. 해가 진 직후의 ‘조금 어둑어둑한 무렵’이란 뜻이다. 서울 청담동의 한식 다이닝 레스토랑 ‘어슬청담’은 어슬녘에 오고 가는 따뜻한 대화와 좋은 음식, 그에 걸맞은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지난해 말 문을 열었다. 어느 시간에든지 지하의 크고 묵직한 문을 열고 어슬청담 안으로 들어서면 이런 어슬녘의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에 잔잔한 재즈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공간은 비밀스러운 장소에 온 것처럼 아늑하다.
어슬청담의 매력은 다이닝 코스에서나 맛볼 수 있을 법한 메뉴들을 취향과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명 셰프들 밑에서 파인다이닝의 길을 걸었던 이영원 셰프(32)가 이곳 키친을 이끄는 덕분이다. 이 셰프는 “디테일하게 파트가 나뉘어 있는 코스 요리보다는 메뉴 하나로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일품 요리에 더 마음이 가 방향을 바꾸게 됐다”고 말했다.
한 그릇, 한입에 담기는 모든 재료가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어느 하나 튀지 않는 조화로운 맛. 이 셰프는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한식이지만 한식 같지 않은, 색다른 음식을 선보인다. 음식은 식사로도, 안주로도 손색이 없다.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실 수도 있지만 어슬청담의 주특기는 전통주다. 각 메뉴에 어울리는 어슬청담의 다채로운 전통주 페어링은 신선한 다이닝 경험을 선사한다. 막걸리, 약주 등 판매하는 전통주만 28종에 이를 정도다. 전통주 리스트는 새롭게 뜨는 트렌드를 반영해 주기적으로 리뉴얼 된다.
어슬청담의 시그니처 메뉴는 ‘한입 야채쌈과 송어 그라브락스’와 ‘명태회 들기름 파스타’, 그리고 ‘어슬 갈비 덮밥’이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손님들이 많이 찾고 즐겨 먹는 메뉴가 자연스레 이곳 시그니처 메뉴로 자리잡았다.
한입 야채쌈과 송어 그라브락스는 한식의 쌈을 응용해 만든 핑거푸드로 가벼운 에피타이저로 먹기 좋다. 여린 엔다이브(주로 샐러드 채소로 먹는 꽃상추의 일종) 잎 위에 강원도 평창에서 당일 새벽 받은 신선한 송어로 그라브릭스(일반적으로 연어를 설탕·소금·딜 등으로 절여서 만든 요리)를 만들어 제철 채소, 크림과 함께 올리고, 감칠맛을 살려줄 피스타치오 캔디를 뿌렸다. 베어 먹기보다는 한입에 그대로 먹길 추천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아삭하고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즐거움을 줄 것이다.
명태회 들기름 파스타는 들기름 막국수를 차가운 파스타로 재해석한 메뉴다. 파스타 면을 검은콩(서리태)으로 만든 소스에 버무리고 매콤새콤하게 양념한 명태회를 가득 올린 뒤 이를 날달걀과 약간의 김가루,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방앗간에서 짜온 들기름과 함께 비벼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회냉면이나 비빔국수 같으면서도 고소한 들기름의 진한 맛과 향이 면을 감싸 색다른 맛을 낸다. 명태회가 다른 재료들과 워낙 조화롭게 어우러져 회를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곳 명태회 들기름 파스타는 꼭 주문해 먹을 정도다.
어슬 갈비 덮밥은 갈비 소스에 마리네이드한 소고기, 초대리를 버무린 밥에 삼채와 버섯, 그리고 궁채로 만든 김치를 올린 메뉴다. 부드럽게 익힌 갈비 살코기를 큼직하게 썰어 올렸다. 궁채 김치는 오이지처럼 새콤달콤해 감칠맛을 내는 것은 물론, 오독오독한 식감으로 느끼함을 잡아준다. 이 셰프는 “누가 먹어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음식이 모난 곳 없도록 밸런스를 잘 맞추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슬청담은 분기마다 새로운 메뉴를 내놓는데 가장 최근에 내놓은 메뉴가 바로 감자전이다. 어슬청담의 감자전은 독특하다. 감자를 갈거나 잘게 썰어 납작하게 구운 일반적인 감자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자를 채 썰어 한 숟가락만 한 크기로 바삭하게 익힌 조각 감자전 여러 개를 볼에 각종 채소와 함께 담고 그 위에 프로슈토, 반숙란을 올린 메뉴로 언뜻 샐러드처럼 보인다. ‘어떻게 하면 감자전 전체를 바삭한 가장자리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해 탄생한 메뉴다. 짭짤한 프로슈토는 밋밋한 감자전에 약간의 자극을, 함께 씹히는 채소는 산뜻함을 더해준다.
어슬청담 감자전에 어울리는 전통주로는 대마씨로 만들어진 막걸리로 스파이시함과 기름지고 묵직한 맛을 지닌 막걸리인 ‘칠위드미(알코올 도수 12%)’나 이보다 좀 더 산미가 있는 산뜻한 레몬향의 막걸리 ‘온지몬(10%)’이 꼽힌다. 한입 야채쌈과 송어 그라브락스의 경우에는 청량감과 강한 산미로 여름 풋사과를 먹는 듯한 맛의 ‘복순도가 손막걸리(6.5%)’가 잘 어울린다. 눅진한 향이 느껴지는 명태회 들기름 파스타에는 꽃과 과실향으로 감칠맛이 도는 막걸리 ‘서막(12% 또는 15%)’을 추천했다.
그 밖에 능이백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능이버섯을 우려 맛을 낸 찹쌀 버섯 리소토와 명이 페스토 위에 오리 다리를 저온 조리해 올린 ‘오리다리 콩피’, 오븐에 구운 이베리코 뼈 등심에 묵은지 김치와 쪽파로 만든 알싸한 칼솟타다(대파와 비슷한 채소인 칼솟을 직화로 구운 스페인식 요리)를 곁들인 ‘이베리코 뼈 등심과 묵은지’, 떡갈비로 속을 채운 가지와 방울양배추, 고추장 소스를 곁들인 ‘떡갈비 가지’ 등이 대표 인기 메뉴다.
어슬청담의 홀은 어느 인원이 와도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기본 4인석과 6인석은 물론, 중앙에는 1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이 놓여 있다. 안쪽에는 6인석 프라이빗 룸과 16인석 대형룸도 있다. 전체적으로 테이블이 중앙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어 대인원도 충분히 ‘따로 또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레스토랑 전체 대관도 가능하다. 친숙한 우리 술과 함께 편안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어슬청담은 외식기업 SPM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유명 브런치 카페 ‘그로어스’에 이영원 셰프가 전문가 컨설팅을 하면서 그 인연으로 최석민 SPM 대표와 손잡고 새롭게 만든 레스토랑이다. 최 대표 측의 제안에 당시 이 셰프는 고민이 깊었다고 했다. 갓 서른을 넘긴 당시까지만 해도 파인다이닝으로 진로를 정하고 여러 다이닝 레스토랑을 거치며 한창 수련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셰프는 “주방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 셰프는 어려서부터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음식을 만드는 게 익숙했다. 셰프의 길도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권유로 걷게 됐다. 조리사 자격증을 시작으로 한국조리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상암동의 이탤리언 레스토랑 ‘인칸토 키친’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이후 최현석 셰프의 ‘엘본 더 테이블’ 이태원점(한남동), 이형준 셰프의 프렌치 레스토랑 ‘메종 드 라 카테고리’ 등을 거쳤다.
이후에도 스타 셰프들의 주방에서 일을 배워나갔다. 2019년에는 손종원 셰프의 양식 다이닝 레스토랑 ‘라망 시크레(서울 회현동)’가 문을 열 당시 오픈 멤버로 참여했고, 이듬해 임정식 셰프의 한식 컨템퍼러리 다이닝 레스토랑 ‘정식당(서울 청담동)’으로 옮겨 메인 셰프드파티(CDP·파트장)로 경력을 쌓았다. 라망 시크레는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인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에서 1스타, 정식당은 2스타를 받은 곳이다. 서울 전역에서 2스타 이상을 받은 레스토랑은 단 10곳, 1스타까지 포함해도 총 35곳에 불과하다. 이 셰프는 “정식당에서 ‘한식을 이렇게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깨닫고 퓨전 한식으로 장르를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하게 된 도전이지만 이 셰프는 올해 7월 남한열 셰프와 함께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에 모던 한식 다이닝 레스토랑인 ‘온화다이닝 도산점’도 새롭게 오픈했다. 온화다이닝은 바 테이블에 한 번에 최대 16인까지만 수용 가능한 프라이빗한 공간이다. 어슬청담의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메뉴의 디테일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는 설명이다. 매장 내부는 오마카세 레스토랑처럼 꾸며졌지만 어슬청담과 마찬가지로 메뉴는 코스로 운영되지 않고 단품으로 주문을 받는다.
어슬청담
장르 퓨전 한식
위치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57길 7, 지하1층
주방장 이영원 셰프
영업시간 월~금 17:00~24:00, 토~일 15:00~24:00
가격대 메인 메뉴 2만5000~4만2000원
프라이빗 룸 2개(6인석, 16인석)
전화번호 050-71339-8725
주차 발레파킹
송경은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