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대통령 관저 이전에 관상가가 관여했다는 것이 주요 뉴스가 되었다. 더불어 풍수까지 싸잡아 비판당했다. 정쟁의 도구가 되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한국의 ‘권력과 풍수’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 첫 대목이다.
“한국 대통령 관저를 지난해 이전할 즈음 대통령과 친교가 있는 풍수학자가 현지를 시찰한 후에 이전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야당 등으로부터 ‘중대 국정 사안을 점에다 맡긴다는 것인가’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풍수는 역대 대형 공공사업에도 활용되는 등 한국 정치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으나, 근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일본 産經新聞, 2023년 8월 12일자). 관상과 풍수는 전혀 다른 분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풍수·사주·관상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풍수는 조선의 국학이었다. 이웃 중국 왕조는 ‘흠천감’, 일본은 ‘음양료’란 관청을 두어 풍수를 국가 통치에 활용하였다. 문제는 청나라·조선·일본막부가 망하며 국학으로서 풍수학이 폐지된 데서 비롯한다. 서양 지리학에 밀려 뒷골목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국가 중요 정책에 풍수가 활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간 필자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현 세종시), 전북혁신도시 입지선정, 경상북도 도청 이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등에 ‘위원’ 자격으로 공식 활동하였다. 금년 3월에도, 강원도청사 부지 선정에 여러 전문가·교수와 함께 ‘위원’으로 위촉되어 공식 자문을 하였다.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들은 기록으로 남는다. ‘은밀한 비술’이 통할 수 없다. 대부분의 공공 ‘위원회’는 서양 학문으로 무장한 전문가·교수들이 더 많다. 이들의 검증과 논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풍수가 ‘사술화(邪術化)’될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도 풍수 논쟁은 치열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공동창업자였다. 개국 후 그는 조선을 설계하였다. 설계 과정에서 그는 풍수를 무시한다. 예부터 나라를 세운 창업자들이 가장 먼저 하였던 것은 도읍지 신설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
도읍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풍수 활용에 대해 의견이 찬반으로 갈렸다. 우선, 풍수 신봉론자들이다. 권중화·하륜·무학이 대표적이다. 권중화는 이성계에게 계룡산을, 하륜은 무악(현 연세대)을 추천할 정도로 풍수에 정통하였다. 반대로, 풍수 부정론자들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일부 유학자들이다. 토목 공사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다 성리학적 신념, 즉 ‘나라의 다스림은 지세가 아니고 사람에게 달렸다’는 이유에서다. 정도전의 주장이다.
“신은 풍수설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 나라의 다스려짐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풍수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태조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낸다.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한 이상, 의심스러운 것은 소격전에서 점을 치겠다”며 매듭짓는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8년 정도전은 죽임을 당한다. 반면 풍수설을 인정하였던 하륜·조준·김사형·무학 등은 천수를 누린다.
1464년 8월 6일 아침, 세조 임금은 훗날 사림파 종장(宗長)으로 추앙받게 될 34세의 김종직을 파직한다. 이유는 김종직이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을 폐지해야 한다”고 직무보고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세조의 반응이다.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조선이란 국가 경영에 유학뿐만 아니라 잡학도 함께 써야한다는 주장과 성리학만으로 충분하다는 두 주장이 충돌한 것이다. 세조는 잡학의 실용성을 취할 것을 신하들에게 요구하였다. 반면 김종직은 성리학 하나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훗날 김종직이 부관참시당한 것도 이런 경직된 사고에 의해서였다.
1776년 3월 22일, 정조는 황해도사 이현모를 파직한다. 얼마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영조 무덤 자리 때문이었다. 영조는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지금의 서오릉 홍릉 자리로 잡아두었다. 그런데 영조가 죽자 정조는 풍수설을 내세워 다른 곳을 찾는다. 이에 이현모가 상소를 한다.
“홍릉 자리는 곧 대행대왕(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입니다. (…) 어찌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설은 공자와 맹자가 말하지 않은 바입니다. 어버이 장사를 공자·맹자처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정조는 ‘공자·맹자’가 아닌 ‘주자·정자’로 되받아친다.
“풍수사들을 불러 길지를 찾는 것은 이미 정자·주자가 정한 논의가 있었으니, 어찌 성인들이 말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 (…) 엄하게 벌주어야 마땅하나 풍수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인 듯하니, 돌아가 주자의 <산릉의장(풍수론)>을 읽게 하라.”
정조 임금은 세손 시절부터 15년 넘게 풍수 공부를 하였기에 풍수에 정통하였다. 천박한 지식으로 ‘떠드는’ 이현모가 가소로웠다.
자고이래로 문제는 천박한 소견으로 풍수설을 논단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일부 진보 지식인과 언론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풍수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야 하는 이유이다. ‘국학’ 기관인 서울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조선왕조의 잡학 ‘지리학(풍수)’과 ‘명과학(사주학)’을 연구해야 할 이유이다. 참고로 관상은 조선왕조에서 국학이었을까? 조선왕조의 잡학은 지리과(풍수학)·명과(사주학)·의과(의학)·역과(통역) 4과목이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
국내 손꼽히는 풍수학자다. 현재 우석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도 활동한바 있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풍수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