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오픈AI가 개발한 새로운 인공지능 챗GPT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다. 챗GPT는 2021년까지 인류가 남긴 모든 문장을 학습한 기계이다. 마구잡이로 아무 문장이나 배운 건 아니고, 인간 손으로 일일이 검증해서 사실을 확인하고 편견을 제거한 비교적 ‘바른’ 문장들만 학습했다. 덕분에 우리가 질문을 던지면, 챗GPT는 비교적 상식에 부합한, 믿을 만한 문장들을 골라낸 후, 자동으로 요약해 답해준다. 마치 백과사전 같다. 어렵지 않은 질문들은 전문가만큼 똑똑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그램을 짜주거나 관련한 법률 조언 또는 간단한 문서 작성도 해준다.
챗GPT 같은 뛰어난 인공지능의 존재는 정보와 지식이 인간만 독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선연히 깨닫게 한다. 완벽하거나 창의적이진 않아도 어떤 질문에도 기존 지식을 활용해 빠르게 괜찮은 대답을 들려주는 기계지능의 존재는 인간 사고의 우선순위를 바꾼다. 대답을 잘하는 능력의 가치는 줄어들고, 질문을 잘하는 능력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대답하는 지능은 나날이 좋아져 더 빨리, 더 좋은 대답을 내놓는데, 이를 바탕 삼아 새로운 질문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질문의 책>(문학동네 펴냄)은 파블로 네루다의 마지막 시집이다. 이 시집은 대답 없이 오직 질문만으로 이뤄져 있다. “청색이 태어났을 때/ 누가 기뻐서 소리쳤을까?” “개미집 속에서는/ 꿈이 의무라는 게 사실일까?” “파도는 왜 내가 그들에게 물은 질문과/ 똑같은 걸 나한테 물을까?”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 같은 질문들이다. 창조란 대답이 아니라 질문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이 시집엔 대답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문은 인간 창조성의 증거이다. 그러나 정해진 규칙에 맞춰 살도록 길들이는 세상은 우리 안에서 질문을 빠르게 고갈시킨다. 나이가 약간만 들어도 우리는 사물에 대한 신비를 잃어버린다. 시인은 묻는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어린 나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패배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잃어버린 기분 때문이다. ‘왜?’라고 항상 묻는 마음, 즉 호기심이다.
세계를 낯설게 느끼면서 자주 질문을 던질수록 우리 영혼은 성장한다. 경이를 잃으면 질문도 사라지면서 정신의 부피도 줄어든다. “무지개는 어디서 끝나나,/ 당신 영혼에서인가 아니면 지평선에서인가?” 같은 질문 그 자체가 하나의 궁극적 탐구인 좋은 질문을 떠올리는 힘이 우리 안에서 소멸하는 것이다.
번역자인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질문한다는 것은 모르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고, 홀연히 ‘처음’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고, ‘끝없는 시작’ 속에 있는 것이다.” 앎을 무지로 돌리는 힘 없이 질문은 불가능하다.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출발하려는 의지 없이 처음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계에 대한 경이를 느끼는 삶이 쉽지 않은 이유다.
미국 인지과학자 스티븐 슬로먼과 필립 페른벡은 ‘지식의 착각’ 때문에 우리가 질문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신비하고 복잡하며,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무식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극히 일부만 알면서도 전부 안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게 많은데도 모두 경험했다고 여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지식의 착각’이 호기심 학살자이다.
좋은 질문은 무지를 인정하는 겸손함에서 출발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가 지혜에 이르는 길임을 일찍이 알려주었다. 그는 자기가 아는 바를 남 앞에 자랑하는 대신, 질문을 통해서 타인의 지혜를 갈망하는 식으로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그에 따르면, 더는 의심나는 점이 없을 때까지 질문과 대답을 이어가면, 세계의 배 속에 있던 진실이 아이처럼 바깥으로 드러난다. 후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을 아이 낳는 기술, 즉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좋은 질문에 이르는 다음 단계도 있다. 김민형 영국 워릭대 교수의 <다시, 수학이 필요한 시간>(인플루엔셜 펴냄)에 따르면, 좋은 질문은 “일상적으로 궁금해할 만한 모든 의문을 정확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요구한다. 좋은 질문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즉 우리 사고와 말을 섬세하고 명료하게 만들려는 꾸준한 노력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이는 ‘우주는 어디에서 오는가, 생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보편적 질문에 한 번에 답하려는 신화적 태도를 버리고 ‘관을 통해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던져진 돌은 어떤 궤적을 그리는가, 몸속의 혈액은 어떻게 순환하는가’ 같은 구체적 질문을 하나하나 탐구해 답하려는 태도와 맞물려 있다. 이것이 근대 과학을 낳았다.
구체적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에 물으면 곧장 괜찮은 답을 얻을 만한 사실 확인 수준의 질문은 별로 좋은 질문이 아니다. 다소 복잡해 보여도 인공지능이 즉시 짜깁기해서 답할 만한 질문도 좋은 질문이 아니다. 이런 단순 질문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명확하고 분명해서 생각을 자극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호기심 없이 가능할 리 없다. 더 나은 지식,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좋은 질문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인공지능이 대답을 잘할 수 있어도, 질문은 전혀 못 하는 건 삶의 목적과 방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큰 질문에 끌리는 호기심과 이를 스스로 고민해 답할 만한 작은 질문에 헌신하는 탐구심의 조화에서 태어난다.
<인에비터블>(청림출판 펴냄)에서 미국 사상가 케빈 켈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좋은 질문은 “검색해서 즉시 답할 수 없는 질문, 기존 답에 도전하는 질문, 일단 들으면 답을 알고 싶어 못 견디지만, 듣기 전까지는 아예 생각 못 한 질문, 새로운 사고 영역을 낳는 질문, 다른 많은 좋은 질문을 낳는 질문, 기계가 마지막으로 배울 수 있는 질문, 인간 존재 의미를 묻는 질문” 등이다. 이러한 질문을 할 줄 안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창의성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