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의 명운이 달린 에너지 계열사 리밸런싱(구조조정)이 자산 100조원 규모의 초대형 에너지기업 탄생으로 본궤도에 올랐다. 지난 7월 17일 SK이노베이션과 SK E&S는 각자 이사회를 열어 양사 간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통합 법인 사명은 SK이노베이션이다. 합병안이 8월27일 주주총회에서 승인되면 합병 법인은 오는 11월 1일 출범하게 된다.
두 회사는 ‘한 지붕 두 가족’ 형태인 사내독립기업(CIC) 방식의 합병으로 ‘안정 속 성장’에 방점을 찍는다. 이에 따라 SK E&S는 향후 독립적 형태의 CIC 경영을 통해 기존 액화천연가스(LNG) 밸류체인의 경쟁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SK이노베이션이 보유한 역량과 연계해 사업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SK그룹의 에너지 중간지주사인 SK이노베이션과 ‘알짜’ 캐시카우인 SK E&S의 합병은 SK그룹에는 에너지 사업의 시너지 효과를 강화하는 동시에 배터리 자회사인 SK온의 자금난을 해소하는 열쇠가 될 전망이다.
특히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이 사내독립기업 방식으로 추진되는 것은 SK E&S의 조직 동요를 최대한 줄이고 배임 논란을 피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SK E&S는 지난해 1조 30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낸 SK 그룹의 알짜 계열사다. SK E&S의 여러 자회사를 잘게 쪼개 붙일 경우 본연의 사업 경쟁력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양사 합병을 통해 SK이노베이션의 재무 여력을 키우면서도 SK E&S가 해오던 사업에 계속 집중할 수 있는 합병 카드가 그룹 사업 재편 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합병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측면에서도 CIC 방식이 유리할 수 있다.
합병 에너지기업은 석유, LNG 등 현재 주력 에너지 사업과 더불어 수소, 재생에너지 등 미래 에너지 사업과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전기화 사업까지 아우르는 에너지 사업 밸류체인을 구축한다. 사실상 에너지 사업 관련 전 영역에서 포트폴리오 경쟁력을 갖추는 셈이다. 양사 합병으로 탄생할 자산 100조원, 매출 90조원의 에너지사는 국내를 넘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최대 민간 에너지 기업으로 등극한다.
합병 회사는 자산 100조원, 매출 90조원 수준의 외형을 갖추는 것은 물론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이 합병 전보다 1조 9000억원 늘어난 5조 8000억원 수준으로 커져 재무·손익 구조도 탄탄해진다. 특히 합병 회사는 확실한 캐시카우 역할을 해온 석유화학 사업의 높은 수익 변동성을 LNG·발전·도시가스 사업의 안정적 수익 창출력으로 완화할 수 있다. 과거 10년의 세전 이익 변동폭을 분석한 결과, 합병 회사의 세전 이익 변동폭은 215%에서 66% 수준으로 대폭 축소된다. 양사는 2030년 기준으로 통합 시너지 효과만 EBITDA 2조 1000억원 이상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SK E&S 일부 자회사가 분사될 것이란 관측과 달리 양사 간 수평 합병을 택한 것은 SK그룹의 ‘따로 또 같이’ 문화를 최적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석유화학, SK E&S는 천연가스 등 분야에서 독자적인 사업 영역을 구축해 온 만큼 합병 후에도 독립 경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번 합병은 SK그룹 차원의 에너지 사업 리밸런싱과 함께 SK온의 재무구조 개선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SK온 살리기에 대해 전사적인 지원책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모기업인 SK이노베이션의 재무 구조가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연간 수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엔텀이 SK온과 합병하며 직접 수혈도 가능해졌다.
SK그룹이 에너지 계열사 간 합병과 더불어 SK온·SK트레이딩인터내셔널·SK엔텀 등 SK이노베이션 자회사 3곳의 동시 합병을 추진하는 것은 SK온 회생을 위한 응급 처방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해석된다.
2021년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물적분할한 SK온은 분할 후 2년 6개월간 줄곧 영업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1분기 기록한 매출(연결 기준) 1조 6836억원은 직전 분기(2조 7231억원) 대비 38.2% 줄었고, 3315억원을 기록한 영업손실은 직전 분기(-186억원)에 비해 18배나 커졌다.
부채 부담도 크다. 부채(1분기 기준)는 23조 4907억원으로, 모회사 SK이노베이션(55조 617억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흑자 전환이 늦어지며 재무 부담도 한층 커지고 있다. 매해 5조~7조원가량을 설비 투자에 쏟아온 SK온은 올해 7조 5000억원 규모의 설비 투자를 진행 중이다.
SK그룹은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낙점한 전기차 배터리 사업이 흔들릴 경우 성장 전략의 한 축이 무너질 것으로 우려하는 만큼 실효적인 대책 마련을 강구하고 나섰다. 에너지 사업의 구심점이자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는 SK이노베이션과 지난해 1조 3317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알짜 에너지 계열사 SK E&S를 합병하는 것이 중심축이다.
하지만 SK그룹 안팎에서 이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SK온의 재무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SK이노베이션 자회사 간 계열사 합병안이 동시에 추진되었다.
이번 합병안 통과로 SK온은 그간 발목을 잡아 온 재무 구조 개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SK온과 합병을 추진하는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은 지난해(연결 기준) 매출 48조 9630억원과 영업이익 5767억원을 달성했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5463억원에 달하는 등 매년 수천억원의 이익잉여금을 확보했고, 지난해 8000억원을 SK이노베이션에 배당해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올해 초 출범한 SK엔텀 역시 출범 당시부터 SK그룹에 유동성을 공급할 자금 조달 창구로서의 역할이 부각된 만큼 SK온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전망이다. SK엔텀은 SK그룹의 울산 사업장에서 원유와 석유·화학제품을 저장하는 탱크터미널 사업을 운영해 시황을 타지 않는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평가받는다. SK온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감소) 등 대외환경의 영향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안정적으로 매출과 영업이익을 올릴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SK온,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SK엔텀 등 3사가 합병할 경우 매출 62조원, 자산 43조원에 달하는 대형 계열사로 거듭나게 된다.
계열사만 219개에 달하는 SK그룹 차원에서 SK이노베이션 자회사 간 합병은 조직 슬림화의 본격적인 신호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잘게 쪼개진 SK 계열사들이 하나둘씩 합쳐지면서 인력·조직·투자의 중복 요소를 줄여나갈 수 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사업 구조를 살펴보면 일부 사업이 겹치는 만큼 SK온을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후속 조치가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SK E&S의 해외 트레이딩 자회사인 ‘프리즘에너지 인터내셔널’의 경우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그 역할이 겹친다. 장기적 관점에서 비슷한 성격의 계열사들을 어떻게 정리할지에 대한 단초를 이번 합병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셈이다.
반대로 SK온이 이러한 지원 전략에도 반등하지 못할 경우 SK그룹에는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또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전기차 배터리 업계에 다시 큰 위기가 올 것으로 예상돼 우려를 키우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관련법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경쟁사와 달리 각형·원통형 등 타 배터리 제품군 개발이 더딘 점도 우려스럽다.
파우치형 배터리 판매가 주로 이뤄지는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추가 포트폴리오 다변화가 신속히 이뤄지지 못할 경우 시장 선도 기업이 아닌 후발 주자로서의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SK그룹 핵심 관계자는 “에너지 계열사들에 대한 리밸런싱 방안의 핵심은 SK온이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며 “안정적인 수익이 확보되거나 배당 여력이 충분한 알짜 계열사들을 SK온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작업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비율은 1대 1.19로 결정됐다. 합병 비율에 따라 대주주 및 재무적 투자자(FI), 소액주주들의 득실 관계가 엇갈릴 전망이다. 애초 1대 2의 비율로 합병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으나 사실상 두 회사의 몸값을 동등하게 평가한 셈이다.
SK그룹 지주사인 SK㈜는 SK이노베이션과 SK E&S지분을 각각 36.2%, 90%를 보유하고 있다. 대주주인 SK㈜ 입장에선 주요 계열사 간 합병 비율에 따라 신규 합병 법인에 대한 지분율이 결정된다. 합병 비율에 따라 상장사인 SK이노베이션이 합병 신주를 발행해 SK E&S 최대주주인 SK㈜에 4976만9267주를 교부할 예정이다. 합병 후 SK이노베이션의 최대주주인 SK㈜ 지분율은 36.2%에서 55.9%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SK이노베이션 소액주주 입장에선 주가 기준 저평가된 회사 가치를 상대적으로 후하게 쳐주는 결과로 풀이된다.
반대로 SK E&S에 투자한 FI 입장에선 반발이 예상된다. SK E&S에 3조 1350억원 규모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보유한 사모펀드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는 상대적으로 SK E&S에 대한 가치가 낮게 책정되면서 이에 대한 대응 여부가 주목된다.
SK그룹은 대주주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되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 비율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SK E&S의 대주주인 SK㈜의 입장에서도 절충안을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SK㈜의 SK이노베이션 지분율은 36.22%로 SK E&S 지분율 보다 낮기에 1대 1.19의 합병 비율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합병기업 지분율을 갖게 된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 주주들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능성을 줄이면서 오히려 합병에 한층 다가섰다는 것이다.
백영찬 상상인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합병 자체로 SK이노베이션이 강세를 보여 왔는데 비율까지 유리해지면 더욱 오를 수 있다”며 “SK㈜ 입장에서도 합병이 이뤄지는 게 주주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SK온의 재무적 투자자(FI)들은 회사가 약속한 2026년 말까지 자체적인 기업공개(IPO)가 쉽지만은 않다고 보고,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엔텀을 합병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합병안 통과를 위해선 FI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