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평정하고 있던 HBM(고대역폭메모리)시장이 삼성, 마이크론 등 추격자들의 양산이 본격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올해 본격화되는 5세대 양산에서 누가 시장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향후 지형도가 다시 크게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부가가치·고성능 제품이다.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되고 있다. 올해 양산이 시작되고 있는 HBM3E는 HBM3의 확장 버전이다.
트렌드포스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기준 46~49%로 사실상 시장을 동일하게 양분했다. 올해도 각각 47~49%로 두 기업이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전망된다. 후발주자 마이크론은 시장에서 5% 내외를 점유할 것으로 보인다.
투자자들이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기업은 왕좌 재탈환을 노리고 있는 삼성전자다. 지난 3월 “젠슨 황이 승인했다”는 한 문장이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었다. 현재 반도체 업계에서 절대 ‘갑’이라고 할 수 있는 엔비디아의 수장 젠슨 황이 직접 삼성전자를 추켜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개발자 대회 ‘GTC 2024’에서 “삼성전자의 HBM을 테스트하고 있으며 기대가 크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삼성전자 부스를 찾아 삼성전자의 HBM 신제품인 12단 HBM3E에 ‘승인(Approved)’이라는 친필 사인을 남겨 화제를 모았다. 업계 안팎에서는 삼성전자와 엔비디아가 본격적인 협력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급속도로 커졌다. 실제이 소식이 알려진 당일 삼성전자는 유가증권시장에서 전날보다 5% 이상 크게 오르기도 했다.
젠슨 황 CEO가 적은 ‘승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제품이 테스트를 실제 통과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삼성전자의 HBM3E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됐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측이다. 엔비디아가 진행 중인 삼성 HBM3E 품질 테스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진만 삼성전자 미주총괄 부사장은 “저희 부스에 들러주셔서 감사하다. 삼성의 HBM3E에 직접 승인 도장을 찍어주셔서 기쁘게 생각한다”며 “삼성 반도체와 엔비디아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고 화답했다.
삼성전자가 가진 자신감의 배경엔 젠슨 황이 사인한 제품 종류에 답이 있다. 그가 서명한 제품은 ‘12단’ HBM3E다. 5세대 HBM 양산에서 경쟁자보다 한발 늦은 삼성전자지만 자사가 개발한 제품이 ‘적층 수’를 더 높여 경쟁사 제품보다 더 높은 성능과 용량이 50% 개선됐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또 집적도는 20% 이상 높였다. 이를 통해 12단임에도 기존 8단과 동일한 높이로 만들었다. 삼성전자는 올해 HBM 출하량을 전년 대비 최대 2.9배 늘릴 계획이다.
삼성은 SK하이닉스와 같은 MC-MUF 공정이 아닌 ‘어드밴스드 TC NCF(열압착 비전도성 접착 필름)’ 패키지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MUF는 접착제를 사용하고 NCF는 필름을 사용해 층수를 올리는 것에서 근본적인 두 기술 간 차이가 있다. 업계에서는 8단 미만까지는 MUF 방식이 효율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후 10단 이상 고층에선 MUF에서 휨 현상이 발생하기 쉬워 NCF가 유리하다.
엔비디아는 가장 고사양의 AI 칩을 지향하므로 동일 세대 8단 제품을 넘어 12단 제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5세대 12단 제품의 대량생산은 삼성전자만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젠슨 황이 삼성에 기대가 크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이유다.
투자 업계도 삼성전자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이다. 최근 목표 주가를 11만원으로 올린 IBK투자증권 김운호 연구원은 “반도체 가격 반등으로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다”면서 “부진했던 HBM도 점차 가시권에 진입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현대차증권 노근창 연구원은 “삼성전자와 패키징 공법이 유사한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에 HBM3E 공급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의 엔비디아향 HBM3E 승인(Qualification)에 이상 기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의 추격도 무섭다. 마이크론은 최근 2024 회계연도 2분기(2023년 12월~2024년 2월) 실적을 발표했다. 이 실적 발표에 따르면 마이크론 매출은 58억2000만달러로 집계됐다. 1년 전 같은 기간의 36억9000만달러보다 58% 늘어났다. 마이크론은 지난 회계연도 2분기엔 23억달러(약 3조1000억원) 순손실을 냈으나 올해는 7억9300만달러(약 1조1000억원) 순익을 기록했다.
투자자들을 놀라게 한 건 단순 흑자 전환만이 아니다. 실적을 발표하며 마이크론은 HBM3E를 AI 칩 선두 주자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지난 2분기 HBM3E에서 이미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 반도체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마이크론은 또 2024 회계연도에 HBM 제품으로부터 수억달러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으며, 2025년에도 HBM의 생산량 대부분이 이미 판매 계약이 끝났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선두 주자인 한국 기업의 기술력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엔 SK하이닉스 등에 납품하는 한국 주요 장비사와도 손을 잡았다.
반도체 장비 업체 한미반도체는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226억원 규모의 장비 공급 계약을 수주했다고 최근 밝혔다. 한미반도체가 이번에 공급하는 품목은 HBM 공정에 필요한 ‘듀얼 TC 본더’라는 장치로, 반도체 칩을 웨이퍼(기판)에 부착하고 쌓는 역할을 한다. 이 장비들은 대만에 있는 마이크론 공장에 납품될 예정이다. 앞서 한미반도체는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SK하이닉스로부터 듀얼 TC 본더 장비를 2000억원어치 수주한 바 있다.
한미반도체는 웨이퍼 세척·건조·선별 장비 세계 점유율 1위 회사다. 지금까지 320여 가지 장비를 직접 개발했고, 최근에는 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HBM 제작 장비를 개발해 대형 반도체 업체들에 공급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협력 기업은 물론 우리 기업의 핵심 인재도 적극적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최근 SK하이닉스가 약정을 위반하고 경쟁기업인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 이직한 전직 연구원을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다. A씨는 SK하이닉스에서 오랜 기간 HBM과 D램 설계를 담당해왔던 인물로 현재 마이크론으로 이직해 임원으로 재직 중인 상태다.
A씨가 퇴직한 시기는 2022년 7월이다. 2015년부터 A씨는 정보보호서약서를 작성했고, 퇴직 시점에서는 전직금지 약정서와 국가핵심기술 비밀유지 서약서도 썼지만 이를 위반했다. SK하이닉스는 A씨가 마이크론에 재직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직후인 지난해 8월 법원에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간 HBM 시장에서존재감이 미미했던 마이크론이 4세대 HBM3 생산을 건너뛰고 5세대 양산으로 직행하며 승부수를 띄울 수 있었던 배경에 인력 빼가기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A씨뿐 아니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미국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직원이 수백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두주주인 SK하이닉스는 적극적인 수성전에 나서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미국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해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2028년부터 현지에서 HBM을 생산한다는 목표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AI 메모리용 어드밴스트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퍼듀대 등 현지 연구기관과 반도체 연구개발(R&D)에 협력하기로 했다고 최근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웨스트라피엣에 소재한 퍼듀대에서 인디애나주와 퍼듀대,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투자협약식을 열고 이 같은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에릭 홀컴 인디애나주지사, 토드 영 상원의원(인디애나주), 장멍 퍼듀대 총장 등 미국 측 인사가 참석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조현동 주미 한국대사, 김정한 주시카고 총영사가 참석했다. SK그룹은 유정준 미주 대외협력총괄 부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 등 경영진이 참석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공장에서는 2028년 하반기부터 차세대 HBM 등 AI 메모리 제품을 양산할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 글로벌 AI 반도체 공급망을 활성화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에 건설하는 생산기지와 R&D 시설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일자리를 1000개 이상 창출해 지역사회 발전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AI 시대 개막과 함께 HBM 등 초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고 어드밴스트 패키징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SK하이닉스는 기술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에 첨단 후공정 분야 투자를 결정하고 최적의 용지를 물색해 왔다. 미국은 AI 분야 빅테크 고객들이 집중돼 있고 첨단 후공정 분야 기술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회사는 인디애나주를 최종 투자지로 선정했다. 주정부가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선 것은 물론 지역 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제조 인프라스트럭처도 풍부하다. 반도체 등 첨단 공학 연구로 유명한 퍼듀대가 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곽 CEO는 인디애나주와 퍼듀대의 지원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반도체 업계 최초로 AI용 어드밴스트 패키징 생산시설을 미국에 건설하게 돼 기쁘다”면서 “이번 투자를 통해 당사는 갈수록 고도화되는 고객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 맞춤형 메모리 제품을 공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AI 수요 확대에 발맞춰 HBM 성장세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주도권을 둘러싼 3사의 경쟁도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조사기관 욜그룹에 따르면 글로벌 HBM 시장 규모는 2024년 141억달러(약 19조원)에서 2029년 377억달러로, 167% 가량 급성장이 예상된다.
[오찬종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4호 (2024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