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게임업계뿐 아니라 정보기술(IT)업계에서는 정부 규제와 각종 분쟁에서 법률에 근거해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법률가들이 귀한 몸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IT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IT업계 전반에 정부 규제와 분쟁이 핵심 리스크로 떠오른 상황에서 법조인 출신 임원 영입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연초 조직 개편을 마무리한 국내 게임업계에서는 법조인 출신 인사 중용 기조가 짙어지고 있다. 상반기부터 게임 산업 전반에서 각종 규제가 예고되고, 지식재산권(IP) 분쟁 등 법률 리스크가 커지는 가운데 위기 관리와 돌발 변수 대응을 위해 개발자 중심 리더십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내 메이저 게임사인 엔씨소프트와 넷마블이다. 두 회사는 3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통해 법조인 출신 인사를 공동 대표로 선임한다. 엔씨소프트는 창립 이후 쭉 유지됐던 김택진 창업자 단독 대표 체제를 벗어나 김앤장 출신 박병무 VIG파트너스 대표를 공동 대표 후보자로 영입했다.
박 대표 내정자는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엔씨소프트 수뇌부는 법조인 출신이면서도 경영, 전략, 투자 경험이 풍부한 박 대표의 능력을 높이 산 것으로 알려졌다. 넷마블은 신임 각자 대표에 기획·법무 영역을 총괄해온 김병규 경영기획담당 부사장을 승진 내정했다. 김 부사장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2005년 제 4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삼성물산 법무팀, 자비스앤빌런즈 최고위기관리책임자(CRO) 등을 역임한 법률·리스크 전문가다. 라인게임즈의 경우 판사 출신인 박성민 대표가 사령탑을 맡고 있다. 2022년 2월 법복을 벗고 라인게임즈에 합류한 그는 리스크관리실장 등을 거쳐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표이사직을 맡아 각종 현안을 챙기고 있다. 넥슨의 지주사인 NXC는 지난해 말 이사회를 개편하면서 법조인 출신인 이홍우 전 넥슨코리아 법무실장(NXC 감사)을 사내 이사로 선임했다.
주요 게임사들이 법조인들을 경영 전면에 전진배치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게임업계를 겨냥해 시행을 앞두거나 추진되는 각종 규제가 꼽힌다. 실적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대형 게임사 수익성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는 확률형 아이템 정보 공개 법제화가 대표적이다. 게임 아이템 획득 확률 공시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게임산업법 개정안’은 3월 22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개정안 핵심은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표시 의무화, 처벌 규정 신설이다. 게임 내 확률 정보를 표시하지 않거나 거짓된 확률 정보를 표시하는 등의 문제로부터 게임 이용자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다.기존에도 게임사들이 자율적으로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정보를 공개해왔지만 일부 게임사들이 잘못된 확률을 고지하는 등 실효성 논란이 제기됐었다. 지난 3년간 연평균 매출액이 1억원 이하의 중소기업들은 의무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와 관련 공정거래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1월 30일 경기 성남 판교제2테크노밸리 기업지원허브에서 ‘상생의 디지털, 국민권익 보호’를 주제로 열린 일곱 번째 대통령 주재 민생토론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게임산업 생태계 조성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확률형 아이템 정보공개 제도를 본격 시행하면서 ‘확률형 아이템 전담 모니터링단’을 설치하고 확률 정보를 표시하지 않았거나 거짓으로 표시한 사례를 집중 단속한다고 밝혔다. 전담 모니터링단은 게임물관리위원회 산하에 24명 규모로 조성한다. 모니터링단은 게임사의 확률 정보 허위 표시가 확인될 경우, 공정위에 직권조사를 의뢰해 정밀한 조사 진행을 도울 예정이다. 게임업계 일각에서는 ‘확률형 아이템 정보공개 해설서’ 배포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해설서는 세부적인 확률 정보 표시 방법 등 확률형 아이템 규제 이행에 대한 세부 지침을 담은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이다. 국내 게임사 한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법률 개정안과 시행령만 참고해서는 제도 준수 준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당초 1월로 공개 예정이었던 가이드라인이 조속히 배포돼야 게임사들이 착실히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확률형 아이템은 국내 게임사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핵심 수익모델이다. 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국내 대형 게임사들의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규제 시행을 앞두고 게임사들은 수익모델과 플랫폼과 게임 장르 다변화 등 방안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당장 실적 개선이 시급한 상황에서 확률형 아이템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 내부 분위기다. 법 시행 즉시 제기될 수 있는 각종 사법 리스크와 사업 운영 방침 수립 등에서 법률에 기반한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다.
게임업계는 게임법 개정안뿐 아니라 메타버스 게임산업법, 웹보드 게임 일몰 등 다른 규제 움직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는 게임 요소가 들어가 있는 메타버스에 대해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게임산업법) 적용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코로나19 확산 시기 메타버스 플랫폼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온 게임사들은 잇따라 관련 사업을 축소하는 한편 규제 시행에 따른 컨틴전시 플랜 마련에 나선 것으로 파악된다.
확률형 아이템에 매몰된 게임사들이 새 수익 모델로 낙점했던 블록체인·대체불가토큰(NFT) 기반 ‘돈 버는 게임(P2E)’의 경우 규제 개선이 사실상 요원한 상황이다. 게임물관리위원회는 게임 내 NFT가 게임산업법에서 금지하는 ‘사행성 경품’에 해당된다고 판단하고, P2E 게임의 국내 유통을 금지하고 있다. P2E 게임 관련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지난해 법원은 게임위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초 게임업계 일각에서 블록체인 게임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나왔지만 지금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분위기다.
게임을 둘러싼 IP 분쟁도 현재 진행형이다. 넥슨과 아이언메이스는 게임 IP ‘다크앤다커’를 놓고 저작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엔씨소프트의 경우 웹젠의 ‘R2M’이자사 ‘리니지M’을 표절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카카오게임즈, 엑스엘게임즈와도 소송 중이다. 게임업계의 경우 게임 시나리오·캐릭터·디자인 소유권, 영업기밀 유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분쟁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주요 게임사들이 지난해 성적표를 모두 받아든 가운데 IP 흥행 여부로 희비가 크게 엇갈린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게임사의 약진, 유사 경쟁작 난립 등으로 업계 전반이 침체된 가운데 실적과 별개로 게임사들은 공통된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비(非)게임 사업 축소, 인력 효율화 등에 나서고 본업인 게임 개발과 퍼블리싱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2월 진행된 실적발표에서 게임사들은 한목소리로 다양한 플랫폼과 장르의 신작을 앞세워 세계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올해 출시 예정 신작뿐만 아니라 내년 이후 출시될 신작 개발 상황까지 적극적으로 공유하며 소통에 나서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신작 성과에 따라 게임사들의 ‘암흑기’ 탈출 여부가 갈리고, 주요 회사들 간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게임사들은 새로운 게임 IP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해 ‘어닝쇼크’수준의 실적 하락을 보인 엔씨소프트는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IP를 공격적으로 확보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간 대형 M&A에 보수적이었던 회사 기조를 바꾼 것으로 주목된다. 홍원준 엔씨소프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2월 8일 진행된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현금 밸런스가 약 1조9000억원 정도 되고, 부동산이나 유동화할 수 있는 자산도 많다”면서 “주당 가치가 증대될 수 있는 인수·합병, 그리고 IP를 취득하는 등 여러가지 방면으로 진행하고 있다. (M&A와 관련해서) 현재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고 있는 만큼, 진행 중인 투자의 방향성을 올해는 실질적인 결과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의 경우 대표 캐시카우인 ‘리니지’ 시리즈의 매출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 데다, ‘제2의 리니지’가 될 만한 신작 역시 장기간 부재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이 안팎으로 고조됐다. 올해 강도 높은 경영 효율화를 통해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는 한편 연내 추가 M&A를 통해 해외시장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성장 동력 확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크래프톤은 기존 인기 IP를 강화하는 동시에 차세대 먹거리가 될 신규 IP 발굴에 집중할 방침을 밝혔다.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는 “지난해 배틀그라운드 IP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실적을 달성하며, 다수의 라인업 확보에 집중해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며 “올해는 크래프톤의 계단식 성장을 위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비용 통제와 신작 개발에 집중하면서 대형 신작 출시가 없었던 크래프톤은 올해 신규 IP 기반 신작 5종을 출시할 예정이다. 크래프톤은 소수 지분 투자와 퍼블리싱 계약을 병행하는 ‘세컨드 파티 퍼블리싱’ 전략으로 10곳 이상의 개발사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4분기에 7분기 연속 영업적자 흐름을 끊은 넷마블 역시 올해 공격적인 신작 출시로 실적 개선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넷마블은 올 상반기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 등 신작 게임 4종을 출시한다. 권영식 넷마블 대표는 “지난해 출시를 목표했던 게임들의 개발 일정이 지연되면서 7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등 시장 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했지만 4분기 턴어라운드로 재도약을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며 “올해는 기대작 출시가 예정된 만큼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연간 기준 영업이익이 절반 이상 줄고 매출 역시 10% 넘게 감소하는 등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든 카카오게임즈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신작 개발에 주력해 성장 모멘텀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된 한상우 최고전략책임자(CSO)는 이날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글로벌 성과를 높이기 위해 모바일 게임의 장르 다변화와 PC·콘솔 기반의 해외 진출이라는 두 가지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낸 넥슨은 올해 자체 IP를 다양한 장르와 플랫폼에 선보이며 해외 시장 공략에 속도를 높인다는 방침이다.
올여름 차세대 3인칭 루트슈터 게임 ‘퍼스트 디센던트’를 출시하고, ‘마비노기’ IP를 계승한 ‘마비노기 모바일’을 연내 선보일 예정이다. 국내 게임업계를 대표하는 세 회사를 일컫는 ‘3N(넥슨·엔씨소프트·넷마블)’ 체제에도 균열이 감지된다. 이들 중 2022년 대비 흑자 폭이 늘어난 곳은 넥슨이 유일했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크래프톤은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넥슨과 함께 한국 게임사 ‘투톱’ 구도를 다지는 모양새다.
[황순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