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인 국제가전박람회(IFA) 2023이 9월 1~5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렸다. IFA는 미국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 스페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와 함께 세계 3대 가전 전시회로 불린다. 올해 행사에는 48개국에서 온 약 2000개 업체가 참여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물론 전 세계 내로라하는 가전·전자 기업들이 총출동한 만큼 가전시장을 가로지르는 키워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전통 가전 위주였던 IFA에 ‘로봇’이 등장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만 해도 전시장에 ‘로봇(robot)’이란 단어를 쓸 수 없었다. 로봇 업체들은 ‘혁신 기술’, ‘스마트 기술’로 로봇을 포장해야 했다. IFA 주최 측에서 가전 중심 전시회에서 로봇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IFA에 로봇이 전면으로 등장했다. 주최 측이 올해 주요 전시 키워드 중 하나로 ‘로봇’을 꼽았을 정도다. 올해 IFA 2023 무대에는 ‘로보틱스 허브’를 주제로 전시 공간이 처음 꾸려졌다. 미국, 홍콩, 한국 등지에서 온 로봇 기업들이 기술력을 뽐냈다.
전시에서 관람객의 가장 큰 관심을 끈 주인공은 프랑스 인챈티드 툴스가 제작한 ‘미로카이(MiroKai)’다.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미로카이는 병원과 요양원, 호텔 등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로봇이다. 두 발 대신 공을 움직여 빠르게 이동한다. 인간형 로봇이 인간을 본떠 만들어 딱딱하거나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미로카이는 귀여운 캐릭터를 본떠 만들었다. 인간과 부대끼며 생활하려면 친숙하게 느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미국 로봇 기업 싱귤래리티넷은 인간형 로봇 ‘데즈디모나’를 전시했다. AI가 탑재된 데즈디모나는 관람객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중국 기업 유니트리는 카메라와 라이더를 탑재한 사족보행 로봇개 ‘고2’를 전시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한 보스턴다이내믹스 로봇개 ‘스팟’과 비슷하다. 가격은 1600달러(약 211만원)에서 시작해 수천 만 원을 훌쩍 넘는 스팟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가전 로봇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봇청소기의 진화도 눈에 띈다. 미국 기업 에이퍼가 만든 수영장 청소 로봇 ‘서퍼S1’이 대표적이다. 이 제품은 태양광으로 충전해 수영장 바닥과 벽을 꼼꼼히 최대 10시간까지 청소한다. 잔디깎이 로봇과 알아서 쓰레기를 비우는 로봇청소기까지 다양한 신기술이 공개됐다.
한국 로봇 기업들도 IFA에 대거 출동했다. 스타트업이 모여 있는 ‘IFA 넥스트’ 공간에서는 한국 로봇 기업들이 ‘K로봇’을 내세워 기술력을 뽐냈다. AI 로봇 팔을 만드는 휴닛, 협동로봇 기업 ‘뉴로메카’ 등 8개 한국 업체가 부스를 차렸다.
IFA가 두 팔 벌려 로봇 기업을 받아들인 이유는 포화 상태인 가전 시장에서 로봇이 ‘메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미 삼성전자, LG전자 등 주요 가전 업체들이 로봇을 새 먹거리로 꼽고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 1월 협동로봇 기업 레인보우로보틱스 유상증자에 참여해 지분 14.99%를 확보했다. 국내 최초로 로봇청소기를 출시했던 LG전자 역시 로봇 사업을 키우고 있다. 서빙과 안내 등에 쓰이는 서비스 로봇 브랜드 LG클로이와 로봇 자회사 로보스타가 LG전자 로봇 사업의 두 축이다.
AI 역시 이번 IFA를 가로지르는 주요 키워드다. 삼성전자는 올해 행사에서 AI 기술을 활용해 개인별 맞춤 식단을 짜주는 플랫폼 ‘삼성푸드’를 공개했다. 조리법 검색부터 음식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스마트폰 속 영양사’다. 좋아하는 입맛이나 원하는 영양소 등을 입력하면 삼성푸드가 맞춤형 조리법을 알려준다.
LG전자는 AI 기능이 탑재된 ‘LG 시그니처 세탁건조기’ 제품을 내놨다. AI가 세탁물의 옷감을 인식해 옷감에 따라 세탁을 달리해주는 기능이다.
삼성전자는 또 내년부터 가전에 ‘챗GPT’ 같은 생성형 AI를 도입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유미영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S/W개발팀장(부사장)은 IFA 2023에서 미디어 브리핑을 열고 “생성형 AI를 가전제품에 적용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며 “내년에 클라우드를 중심으로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생성형 AI를 적용하면 기존에 한 가지 명령만 이해했던 AI가 복잡한 문장을 이해하게 된다. 유 부사장은 “‘보이스(음성인식)’ ‘비전(카메라)’ ‘디스플레이’ 등 3가지 영역에서 생성형 AI를 접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사용자가 원하는 화면을 디스플레이로 보여줄 수도 있다.
2016년 업계 최초로 AI 기술을 적용한 ‘패밀리허브 냉장고’를 선보인 뒤 삼성전자는 AI 가전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지난해 유럽 시장에 출시한 ‘비스포크 오븐’이 대표적이다. 오븐에 탑재된 카메라가 조리하려는 식품 이미지를 촬영하면 AI가 음식 상태를 분석한다. 올해 선보인 ‘비스포크 제트 AI’에도 AI 기술이 탑재됐다. 청소기가 알아서 카펫·마루 등 바닥 환경을 인식하고 최적의 흡입력으로 맞춰준다.
올해 행사를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지속 가능성’이다. 유럽연합(EU)은 빠르게 친환경 정책을 확대하고 있는 시장이다. 지난해 EU는 러시아산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친환경에너지를 확대하는 ‘리파워 EU’ 전략을 수립했다.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에너지 관리’는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IFA는 올해 처음으로 ‘지속 가능한 마을’이라는 주제로 공간을 꾸몄다. 이 전시관에는 3m 높이의 고철 로봇이 전시됐다. 부서진 오븐과 태블릿PC, 고장 난 진공청소기 등 독일 전역에서 나온 가전 폐기물로 만들어진 로봇이다. 독일 보험 업체 베르트가란티가 유명한 설치미술가 하슐트와 손잡고 만든 작품이다. 전자 폐기물에 대응하는 ‘수선·수리 상점’ 등도 마련됐다.
올해 처음으로 IFA에 참가한 미국 테슬라는 ‘모델Y’를 전시했다.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친환경차인 만큼 테슬라도 IFA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설립한 우주 탐사기업 스페이스X도 위성 기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를 내세워 IFA에 부스를 차렸다.
전시회에선 친환경 기술을 적용한 가전제품이 눈에 띄었다. 독일 기업들은 부스 곳곳에서 EU 에너지 효율 최고등급인 A등급 가전임을 소개했다. 독일 밀레는 모든 전시 제품에 에너지 등급은 물론 100분당 소비하는 전력까지 적어 걸어뒀다. 독일 리페르는 커다란 알파벳 ‘A’ 종이 표지판과 함께 에너지 효율등급이 높은 가전만 따로 전시해뒀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A등급보다 전력 사용량이 40% 이상 적은 세탁기를 공개했다. LG전자는 또 에너지 효율등급 ‘A+++’로 시장에 나온 제품 가운데 가장 효율이 높은 건조기와 고효율 세탁기를 선보였다. 삼성전자도 모바일 앱인 ‘스마트싱스’를 활용해 에너지 사용량을 절감할 수 있는 ‘AI 절약모드’ 등을 공개했다.
이번 전시에선 중국 기업의 재도전이 눈에 띈다. 올해 참가 기업 2059곳 가운데 중국 기업이 1279곳(62%)에 달했다. 행사 장소인 독일(229개)은 물론이고, 한국(165개)과 미국(61개)보다도 훨씬 많은 기업이 참가했다. 미중 갈등 등으로 미국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는 만큼 유럽 시장으로 눈길을 돌린 탓이란 분석이다.
중국 업체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행사 전반에서 드러났다. 중국 스마트폰 기업 아너의 조지 자오 최고경영자(CEO)와 하이센스의 피셔 유 CEO가 기조연설 자리를 따냈다. IFA가 전시 기간 동안 내는 관람객용 공식 자료집 표지는 이틀 연속 중국 기업이 장식했다. 첫날은 자오 사장이, 둘째 날은 한슨 한 하이센스 유럽법인장이 표지 주인공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력이 웬만큼 올라왔다고 생각한 중국이 영향력을 넓히려 이번 IFA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너는 이번 전시에서 폴더블폰을 공개해 삼성전자에 도전장을 던졌다. 전시 기간 내내 아너 부스는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으로 북적거렸다. 아너는 9월 1일(현지시간)갤럭시 Z폴드와 꼭 닮은 폴더폰 ‘매직 V2’를 공개했다. 자오 사장은 기조연설에서 “아너 매직 V2의 두께는 9.9㎜로 삼성 갤럭시 폴드5 두께(13.4㎜)보다 얇고 무게도 231g으로 갤럭시 253g보다 가볍다”며 “세계에서 가장 얇고 가벼운 폴더블폰”이라고 말했다.
TCL과 하이센스 등도 다양한 TV 신제품을 내놨다. 특히 한국 기업이 기술력을 자랑하는 미니LED나 마이크로LED 신제품이 눈에 띄었다. 중국 기업 가운데 가장 큰 부스를 차린 곳은 TCL이다. TCL은 163인치 초대형 마이크로LED TV를 부스 가운데 전시했다. 마이크로OLED 패널을 탑재한 스마트 안경 ‘넥스트웨어 S 플러스’도 공개했다. 또 다른 중국업체 하이센스는 미니LED 기반 ULED 85인치 TV 제품을 전시했다.
전통 강자인 삼성전자와 LG전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술력을 내세워 중국 기업과의 격차를 벌려간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우선 ‘초대형 TV’에 집중한다. 올해 98인치 초대형 TV 제품군을 공개한 삼성전자는 ‘100인치 TV’에 도전한다. 정강일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차세대기획그룹 상무는 IFA 2023 기자 간담회에서 “초대형·고해상도 TV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폭되고 있다”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토하는데, 100형 이상의 제품도 (출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혁신적인 기술로 TV 시장을 공략한다. LG전자는 올해 세계 최초로 전원 외 모든 선을 없앤 97인치 TV ‘LG 시그니처 올레드 M’을 전시했다. 백선필 LG전자 HE사업본부 상품기획담당 상무는 IFA 2023 기자 간담회에서 “115인치 제품을 전시한 TCL에 판매처를 물었더니 ‘중국에 별장만 2000만 개 있어서 여기에 팔면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우리는 100인치 이상 제품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새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