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달리고 있다. 대기업이나 유명한 외국계 기업에서 여성이 임원이 되었다는 소식은 더 이상 빅이슈가 아니다.
시대적 흐름이 여성 임원 중용으로 가는 중이다. 필자 역시 여성 CEO로서 여성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세미나, 포럼 등에 참여하는데, 요즘 들어 더 다양한 곳에서 여성을 주목한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남성적 리더십이 지속되는 경제위기, 변화하는 가치관에 따라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자 그 대안으로 인간관계를 중시하면서 조직 구성원들의 화합과 유대감을 드높이는 여성 리더십이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간뿐 아니라 공직에서도 해당되는데, 지난 4·13 총선 때 여야 3당은 20대 비례대표 1번을 모두 여성인재로 채웠다. 또한 300명 가운데 총 51명의 ‘여성 국회의원’이 당선되면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그야말로 ‘여성시대’를 실감하는 때인 것이다.
▶역량 있는 여성 사외이사의 탄생
글로벌 서치펌 연합체인 틴존 그룹의 영국 파트너가 ‘한국에 여성 사외이사가 얼마나 존재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냈다. 그동안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터라 상당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몇 명이나 상장사에 등록이 되어 있을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보고서 결과는 여성 관리자가 있는 248개 기업(100인 이상) 이사회의 사외이사 평균 인원 중 여성은 0.1명에 그친다는 것이었다. 유리천장 지수 또한 OECD국가 중 꼴찌로, 무슬림이 대다수인 터키에도 밀리는 수치였다. 여성들의 경쟁력 있는 리더십, 높아진 학력 수준, 그리고 여성 임원에 대한 언론의 조명 등으로 여성 인재가 부각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뜻으로 보였다.
불현듯 몇 년 전 국내 금융지주사 회장 선임 당시에 사외이사로서 맹활약을 했던 J교수가 생각났다. 그 당시 금융권 최초로 여성 이사회 의장이 된 그녀는 균형 있는 식견과 여성만의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어려운 사안을 훌륭하게 해결해서 화제가 됐었다. 현재 국내 유가증권과 코스닥 상장사에 등록되어 있는 여성 사외이사는 100명 내외인 것으로 추산된다. 향후 국내 기업지배구조 개선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성 사외이사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바란다.
▶유리 천장이 아닌 대나무 천장
지난달 국내 유명 제약회사에서 여성 리더십 축제의 일환으로 여성 리더들의 성공 노하우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우수한 여성인재가 경력 단절 없이 일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 구축에 대해 논의하고, 여성 직장인의 전문성 향상 및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행사였다.
다양한 강연자들이 저마다의 노하우로 후배 여성 직장인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했는데, 필자는 “유리천장은 없다. 이제는 대나무 천장 시대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준비된 여성 임원이 있으면 추천 좀 해달라”며 기업들이 앞다퉈 찾아오는 것을 체감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점점 여성들에게 유리해지고 있다. ‘여성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균형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여성들 자신의 의식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야 한다. 쉽게 그만두려는 생각은 그만두고, 어느 포지션에서 일을 하든지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는 프로다운 자세가 필요하다. 국내에서 여성 최초로 은행장에 오른 K행장, 공대 출신으로 에너지 공기업의 수장이 된 Y사장, 국내 굴지의 대기업 그룹 내 유일한 여성 CEO인 L대표 등은 여성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생생한 예다.
이들처럼 정확하게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경력을 관리해나가는 여성들이 많아져야 유리 천장을 ‘대나무 천장’으로 바꿀 수 있다.
▶일은 고민의 대상이 아닌 상수(常數)
직장 여성 1세대인 A사장은 성공한 여성 CEO다. 잔머리 하나 빠져 나오지 않은 머리스타일과 깔끔한 정장을 입은 외양을 보면 그녀가 한때 경력단절 여성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대학 졸업 후 금융사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결혼 후 남편이 해외로 발령을 받자 곧 그만두고 함께 가게 되었다. 귀국했을 때는 이미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자신감도 사라지고 다시 일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첫 직장 시절 상사가 그녀를 인사부장으로 부른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자세가 기회가 되어 돌아온 것이라 여겼다. 당시 그녀는 직원들이 실적을 내느라 고군분투하는 것이 안타까워 10층에 있는 사무실을 매일 계단으로 출근하며 층마다 들러 어깨를 두드려 줄 정도로 열정 넘치게 일했다고 한다.
‘보험업계 최초 여성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A사장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일을 그만둘지 말지부터 고민하는 여성들이 많다. 절실함이 부족한 거다. 일은 고민의 대상이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견디고 버티라고 강조하며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를 세 번 외치자고 하는 그녀의 리더십과 뚝심을 배울 필요가 있다.
▶경영자의 목표의식과 공감하는 능력
필자가 30대 중반이었을 때다. 근무하던 프랑스 원자력 회사가 발전소를 완공하고 철수해 미국 회사로 옮겼다. 일반 사무를 보던 필자에게 당시 미국인 사장은 “왜 한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도와주는 역할만 합니까?”라며 영업을 해볼 것을 권했다.
따뜻한 온실이었던 경영지원 부서에서 영업 부서로 옮겨 일을 시작하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기 시작했지만 치열한 비즈니스의 현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사장은 항상 입버릇처럼 “No Sales, No Office, No Employee” 즉 “영업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으면 회사의 존재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직원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또한 “한 번 영업 목표를 설정했으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물며 세상이 뒤집어져도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전 직원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설정된 목표를 완수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월급을 받는 직원은 적어도 자신이 받는 돈의 3배 이상의 역할을 해야 회사가 제대로 운영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회사의 저력은 직원들이 사장의 마인드에 공감하고 동참해준다는 것에 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전 직원이 한마음이 아니면 어느 날 회사가 없어지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을 최고경영자와 임직원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절실히 깨달은 공감의 중요성은 놀랍게도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사내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된 목표를 인지하도록 소통하고 공감하게 했던 결과가 지금 회사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리어 멘토링 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여해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들 자신의 진로와 직업에 대한 기대로 눈이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차세대 여성 리더들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국내에서 처음 여성 공채를 시작한 것이 1990년이었다.
이후 현재까지 약 25년 동안 여성들은 과장, 부장급까지 성장했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는 여성 임원들이 대거 나올 것이다.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던 초기, ‘결혼하고도 잘리지 않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들도 임원이나 CEO의 자리에 올라설 야망을 갖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괴테의 “가장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말처럼 여성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섬세함과 유연성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갈등을 해결해주고 소통을 원활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시대적인 요구에 부합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형 여성 인재들의 활약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