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영화 한 편을 디렉팅한다고 가정해보자. 우선 우여곡절의 고개를 수십 번 넘고 넘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다는 영화감독이 됐다. 영화계 인사들의 말을 빌면 “명함 파기가 별 따는 것만큼 힘들어 남들보다 인생의 곡절이 곱절일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직책이다. 그렇다면 감독님이라 불린다고 해서 모두 성공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첫 작품을 내놓은 입봉 감독과 기획이 엎어지기 일쑤인 비입봉 감독은 후배들이 인사하는 각도부터 다르다. 당연히, 성과가 없는 직책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어쨌든 영화감독이 된 당신은 로또 복권에 당첨된 심정으로 입봉을 준비한다. 우선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지 아이템 기획에 착수해야 한다. 마음에 맞는 작가와 마감시한이 하염없는 시나리오 작업에도 매진해야 한다. 영화계에서 ‘책’이라 불리는 시나리오는 사업기획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자자와 배우, 스태프들의 면면은 이미 시나리오 단계에서 판가름 난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묵혀야 맛이 더해지는 김장 김치처럼 세월아네월아 업계를 돌고 돌며 냄새를 풍긴다. ‘책 좋다’는 평가에 입소문이 더해지면 투자자들의 입질이 이어진다. 이쯤 되면 배우들에게도 소문이 전해진다. 덜컥 특급배우라도 캐스팅하게 되면 투자는 급물살을 탄다. 반대로 튼튼한 투자배급사의 투자가 결정되면 인지도와 흥행의 안정적인 비례관계를 누리려는 한류스타급 배우의 간택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 영화 촬영 전 프로덕션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이후 프로덕션 단계에선 크랭크 인(촬영시작)과 크랭크 업(촬영완료)이 이어지고 편집, CG, 믹싱, 음악 등 포스트 프로덕션(후반작업)을 거쳐 극장 개봉에 나서게 된다.
그럼 다시 되짚어 생각해보자. 당신이 천신만고 끝에 디렉팅을 끝낸 영화의 목적은 무엇일까. 맛있게 먹는 손님을 보며 마음 푸근한 셰프처럼 그저 관객과 만났다는 사실(개봉)에 그칠 수 있을까. 천부당만부당한 불순한 생각이다. 투자자가 두 눈 벌겋게 뜨고 있는 상업영화에선 역시나 수익이 최고다. 한 투자사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작품성이 좋은 영화는 물론 좋은 영화다. 그런데 그 작품성이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의 배를 채워주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건 투자자다. 그들이 웃을 수 있어야 필름이 돌 수 있다. 수익이 마이너스인 제작사나 감독에겐 두 번째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21세기 한국영화의 신기루 <명량>
여기에 최근 잭팟을 터뜨린 <명량>이 있다. 연출한 김한민 감독은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입봉해 <핸드폰>으로 주춤하다 <최종병기 활>로 충만한 상업적 마인드를 자랑했다. 덕분에 전작을 마치고 2011년 곧바로 아이템 기획에 들어가 2012년 10월 <명량>의 최종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100억원을 훌쩍 넘긴 제작비가 문제였지만 이도 전작의 성과가 뒷받침되며 CJ E&M이 메인투자자로 나섰다. 김 감독은 2012년 12월 배우와 스태프를 꾸려 이듬해 1월 8일에 크랭크인, 그해 7월 21일 115회의 촬영을 마쳤다. 7월 30일 개봉 이후의 행보는 익히 알고 있듯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전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8월 10일 관객 1000만명을 넘어섰고 9월 12일 현재까지 누적관객 1744만명이 <명량> 바다에 흠뻑 젖었다. 역대 최대관객, 최고 매출액 기록도 경신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알토란같은 수익은 누가 얼마나 가져가게 될까. 제작기간 3년여 동안 185억원의 제작비가 소비된 <명량>은 9월 11일 기준 약 134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엄청난 금액이다. 이 금액을 총매출로 가정해 유추해보면 영화발전기금 3%와 부가세 10%를 제하고 1170억원이 남는다. 극장에 50%(극장과 배급사가 5대 5)를 떼 주면 587억원이, 다시 배급수수료 10%를 제하면 528억원이 남는다. 투자비용을 제외해야 하니 여기에서 제작비 185억원을 뺀 343억원이 투자, 배급, 제작사가 나눠 가져야 할 몫이다. 투자배급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 비율이 대개 6대 4임을 감안하면 배급까지 맡은 CJ E&M을 비롯한 20여 개 투자사(아이디어브릿지자산운용, KDB산업은행, 메리츠화재해상보험 등)가 약 206억원을 나눠 갖게 된다. 투자사 입장에선 확실히 성공한 투자다. 흥행작을 필모그래피로 내세울 수 있는 자산도 확보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한 수였다.
그럼 제작사는 어떨까. 김한민 감독이 대표이자 최대 주주인 <명량>의 제작사 빅스톤픽처스는 137억원의 수익을 올리게 됐다. 김 감독의 경우 개인적으로 연출료에 러닝개런티까지 챙기게 됐으니 어쩌면 진정한 승리자는 감독인 셈이다. 곡절보다 평탄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한국영화계이 이목이 집중된 건 당연한 일. 또 다른 투자사 관계자는 말한다.
“1000만 관객을 목표로 삼던 한국영화계의 눈높이가 끝도 없이 높아지려 한다. 이제 21세기 한국영화계는 <명량>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영화시장과 투자규모가 커질 것이란 낙관과 웬만한 흥행성적으론 제작사나 투자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란 우려가 혼재된 전망이다.
여전한 논란, 스크린 독과점
<명량>의 흥행과 함께 다시금 영화계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오른 문제는 스크린 독과점이다. 영화 한 편이 상영관을 독식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명량>의 경우 개봉 첫날 전국 1159개 스크린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33.6%의 스크린 점유율이다. 흥행 대박 조짐이 일자 수치는 점점 높아져 39%를 넘어서기도 했다. 쉽게 말해 10개의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에서 4개 스크린이 <명량>을 상영한 것이다. CJ, 롯데, 쇼박스 등 메이저 투자배급사가 극장 유통을 장악한 상황에 소규모 영화들의 상영기회가 그나마도 적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제작사가 수입하거나 제작한 영화를 배급사에 넘기면, 배급사는 마케팅과 홍보, 극장과의 상영 계약에 나선다. 개봉 시기와 스크린 수 등이 배급사를 통해 결정되고 극장은 티켓과 팝콘으로 매출을 올린다. 자연스럽게 배급사가 주도권을 쥐는 형국이다. 제작사들은 대부분 제작비를 투자받아 영화를 만드는데, 국내에선 배급사가 투자자로 참여하기도 하고 대기업 계열의 경우 극장까지 소유하고 있다. 결국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선 투자부터 개봉까지 배급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선 과도한 우려라고 말한다. 지난해 극장입장권 통합전산망의 분석을 보면 메이저 배급사와 같은 계열 극장의 경우, 상관관계가 그리 크지 않았다. CGV에서 상영된 영화 중 14.7%만이 CJ E&M이 배급했고, 롯데시네마는 11%가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한 영화였다.
그럼에도 극장에서 다양성 영화(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저예산 영화)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2009년 이후 다양성 영화의 관객 수와 매출은 줄곧 하락세다. 지난해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다양성 영화 여섯 편 중 한국 영화는 고작 한 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