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우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이건호 KB국민은행장, 서근우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 ’
이들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요직에 등용된 한국금융연구원 출신 인사들이다.
지난 1991년 연구원 6명에 행정원 3명으로 출범한 금융연구원의 모태는 김준성 전 부총리가 지원했던 금융연구회였다. 설립 당시만 해도 금융권 씽크탱크 정도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20여 년이 흘러 최근 금융연구원 출신 인재들이 요직에 잇따라 발탁되며 ‘키피아’(KIF:금융연구원 영어약칭 + 마피아) 시대가 열렸다는 평까지 나오고 있다.
‘모피아(재무부 출신 공무원)’도 이제는 퇴직하면 금융연구원에 둥지를 틀고 제2의 인생을 그린다.
매일경제신문이 지난 20여 년간 금융연구원을 거쳐 간 70여 명의 박사급 인력들의 경로를 추적한 결과, 50명 이상이 대학·연구기관으로 갔고, 나머지는 금융당국·금융회사 등으로 이동했다. 전직 관료 등을 모시는 전임초빙연구위원도 20여 명이 금융연구원을 거쳤다.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국세청, 금융감독원, 감사원 등 주요 기관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나간 인력은 50여 명에 이른다. 비상임연구위원을 제외해도 약 200명이 금융연구원을 거쳐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위원회 이상제 상임위원, 국장급의 임형석 전 국제협력관, 연태훈 자문관 등이 금융연구원 출신이다. 서정호 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지난 4월 금감원 자문관에 위촉됐다.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도 금융연구원 출신이며 이장영 금융연수원장 역시 금융연구원 출신으로 금감원에 입성해 부원장까지 지냈다.
민간 분야에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삼성그룹 안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이 대표적이다.
양원근 전 KB경영연구소장은 우리금융지주 설립 등을 담당해 외환위기 극복에 일조했다. 최흥식 하나금융지주 사장은 1999년 금융연구원 부원장을 지냈다. 지동현 전 KB국민카드 부사장 역시 2000년 조흥은행 부행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금융권 주요 인사로 자리를 잡았다. 최공필 전 우리금융지주 전무도 금융연구원 인사다. 최근에는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가 학위를 마치고 금융연구원에 정착하는 40대 박사가 크게 늘었다.
금융연구원 출신 활약상의 뿌리는 22년 전인 1991년 금융연구원이 문을 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재윤 서울대 교수가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부산고 출신의 박 원장은 부산 인맥으로 분류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경제정책 자문을 하면서 실세로 부상했다. 박 원장은 금융연구원장을 1년 만에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선거를 도와 1993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발탁됐다. 박 수석은 김영삼 정부 최대 경제 과제인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주도하는 등 경제 분야를 이끌면서 설립 초기였던 금융연구원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초기 멤버였던 최장봉 전 예금보험공사 사장은 회고록에서 “금융연구원이 태어난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금융은 시장 금융이라기보다 예금금리, 대출금리, 환율 등 핵심 금융가격이 모두 정책으로 결정되는 관리 금융이었다”며 “이런 시대 상황에서 연구원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 금융의 시장기능 청사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연구위원장이었던 최 전 사장에 따르면 1991년 첫 해 연구원 전원이 수안보 온천에 모여 ‘수안보 MT’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정해진 연구원의 이념은 전문성(specialization), 수월성(excellency), 실용성(applicability)이다. 이 목표를 갖고 연구원은 합리적인 금융정책 개발, 효율적인 금융전략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6명의 초대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지동현 전 KB국민카드 부사장은 “당시 젊은 박사들과 부대끼며 불철주야 일했던 박재윤 초대 원장은 1991년 여름 금리자유화방안 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과로로 입원까지 했다”며 “박재윤 원장은 연구위원들에게 타자치기 및 일어 공부까지 하게 했다”고 말했다.
박영철 2대 원장 때 급성장
본격적인 성장은 박영철 2대 원장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의 박영철 원장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재임하면서 금융연구원을 연구와 정책 금융실무를 아우를 수 있는 조직으로 키웠다.
정찬우 금융위 부위원장을 비롯해 이건호 국민은행장, 양원근 전 KB금융연구소장, 지동현 전 KB카드 부사장, 최공필 전 우리금융지주 전무 등이 박영철 원장 당시 활동하던 이른바 ‘박영철 키즈’이다. 특히 박 원장이 IMF 외환위기 가능성을 예고하고, 퇴임한 후 정부와 금융시장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금융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금융연구원 출신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박 원장 또한 금융산업발전심의위원장, 상업·한일은행 합병추진위원장, 외환은행 이사회 의장, 국민경제자문위원, 공적자금관리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금융연구원 출신 인재들을 곳곳에 천거했다.
1992년 설립된 지 1년 밖에 안 된 금융연구원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30~40대 젊은 인재들이 대거 영입됐다. 당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의 대우수준은 KDI보다 나은 것은 물론이고 연구소 중 최고였다고 한다. 보조연구원 1명, 비서 1명까지 있었고 사회경력이 전무해도 은행 부장급 연봉을 받았다.
금융연구원 출신들의 활약은 이론적 배경을 요구하는 금융당국과 금융기관들의 수요와 실무를 경험하고자 하는 금융연구원 출신들의 열망이 맞아떨어지면서 더욱 배가 됐다. 금융당국은 정책 수립에 앞서 금융연구원의 이론적 뒷받침을 받기를 원하고, 금융연구원 보고서는 당국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반영돼 은행 보험 등 민간 영역에 곧바로 적용된다.
금융연구원이 얼마나 현실 참여적인 연구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94년 어느 날, 당시 홍재형 경제부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긴급 지시를 받았다. 금융실명제 도입을 성공시켰지만 부작용으로 사채시장이 커져 피해가 확산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김 대통령은 불법사채 광고가 신문에 난 것을 보고 “당장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재정경제원은 다급히 금융연구원부터 찾았다. 불법 사금융은 퇴출하고 대부업을 제도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TF가 구성된다. 당시 금융연구원 양원근 박사는 TF 실무 간사를 맡았다.
양 박사는 사채시장을 이해하기 위해 경찰과 함께 불법사채업자 단속에 동행하기도 하고 사채를 직접 빌려 써봤다. 그는 “사채시장을 직접 체험하는 등 발로 뛰는 연구로 ‘한국 사금융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몸소 완성했다”며 “금융연구원은 이렇게 적극적인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이론과 실무 모두에 강한 연구원이 됐다”고 말했다. 단지 이때 뿐이 아니다. 정부는 현안이 생길 때마다 금융연구원의 ‘머리’를 빌렸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금융위원회가 정책을 수립할 때면, 금융연구원은 이론적 배경과 연구 자료를 제공한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는 금융연구원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각종 금융회사 구조조정 TF에 금융연구원 박사들은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했다. 2대 원장을 지낸 박영철 고려대 명예교수는 20주년 기념 회고문집에서 “수년간 한국금융을 분석한 지식과 세계금융시장 흐름을 예의주시하던 금융연구원의 우수한 인력이 한국의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1992~1998년까지 금융연구원에서 일한 박경서 고려대 교수는 “1990년대에는 금리자유화 등 금융제도가 크게 변화하던 시기”라며 “예금보험제도 초안 도입, 예금보험공사 설립, 금융지주회사제도 도입 등 실무에 적용될 연구 경력이 지금 교수 생활을 하는 데 밑천이 됐다”고 말했다.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학자로는 윤석헌 숭실대 교수, 채희율 경기대 교수, 함상문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신성환 홍익대 교수, 여은정 중앙대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금융연구원 출신들이 주요 금융회사 사외이사로 활동하는 것도 금융연구원 출신 약진의 기회다. 금융회사들은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의 사외이사들을 필요로 하는데 학계 인사 중에서는 금융 정책과 실무에 경험이 많은 금융연구원 출신이 단연 1순위 후보다. 구본성 장민 임진 박사 등이 주요 금융기관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직관료 정거장론 대두
금융기관 사외이사로 활동하면서 고위 경영진과 맺어진 인연은 재차 금융기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금융당국과 금융연구원을 연결하는 고리가 또 있다. 바로 특임연구실이다. 최근에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합류했다. 박병원 은행연합회장과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 이승우 전 예금보험공사 사장 등 거물급 금융 관료들이 특임연구실을 거쳤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철환 전 재정경제부 국고국장,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제2차관 등도 금융연구원 특임연구실에 이름을 올렸다.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윤용로 외환은행장과 박철 전 한은 부총재, 이경재 KB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 등이 금융연구원에서 초빙연구위원 생활을 했다. 이들 전직 관료들이 금융연구원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금융시장 정보를 공유하고 정책과 이론의 상호 교류가 이뤄지면서 금융연구원은 금융정책과 금융시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로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따가워지자, 전직 관료의 ‘정거장’이 됐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금융연구원 특성상 정부의 처지를 대변하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함께 일을 해본 금융연구원 일부 학자는 ‘관변학자’라는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며 “지나치게 정무적이고 정치 바람을 타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은행의 지원을 받고 있는 금융연구원 출신들이 부상하면서 한국의 금융정책을 지나치게 은행 중심으로 이끄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