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8달러에 불과했던 주가는 올해 10월 100달러를 넘어섰다. 4년 반 만에 1300%가 올랐다.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세계 양대 3D 프린터 업체 가운데 하나인 스트라타시스 얘기다. 지난해 동종업체 오브제와 합병한 데 이어 올해 보급형 제품 기술을 갖고 있는 메이커봇을 인수하는 공격적인 행보 때문에 주식 투자자들이 환호한 것이다.
올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코스닥업체가 ‘3D 프린터 테마주’로 이름이 회자되면서 주가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시장에서는 3D 프린터에 대한 갖가지 소문이 돈다. “자동차·권총도 만들어낸다” “3D 프린터가 3D 프린터를 제조해낸다” “기존 제조업은 모두 몰락한다” 등등.
과연 3D 프린터는 ‘황금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거품 기술’로 기록될 것인가.
신기술? 30년 묵은 기술!
3D 프린팅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프린터가 플라스틱 가루나 금속가루를 차례차례 쌓아가면서 부품이나 소형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자동차나 권총을 바로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자동차와 권총의 부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자동차·권총도 만들어낸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집에서 쓰는 종이인쇄용 2D 프린터가 어떤 파일을 입력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문서를 인쇄해내듯, 자동차 부품 설계도 파일 또는 권총 부품 설계도 파일 등을 입력하면 파일 속에 그려진 설계도에 따라 제품을 출력해낸다.
한국에서는 ‘뜨는 신기술’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3D 프린터는 이미 만들어진 지 30년가량 된 기술이다. 최근 3D 프린터에 관심이 뜨거워진 이유는 수년 전 제약회사 셀트리온이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와 비슷하다. 제약기술 특허가 만료돼 복제약이 널리 생산되기 시작한 것처럼 3D 프린터 기술 특허가 만료돼 이제 누구나 관련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플라스틱 가루를 이용한 3D 프린터만 특허가 풀려 있지만 내년 2월에는 금속가루를 이용한 3D 프린터 기술도 특허가 풀리게 된다.
2005년 영국에서 시작된 렙랩(RepRap: Replicating Rapid Prototyper)이라는 프로젝트는 홈페이지(reprap.org)에 3D 프린터의 설계도, 주요 부품, 제작과정을 공개해 놓기도 했다. 만약 3D 프린터 1대만 있다면 렙랩에서 제공한 3D 프린터 파일을 입력해 3D 프린터의 부품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즉, “3D 프린터가 3D 프린터를 제조해낸다”는 말도 상당부분 사실인 셈이다. (물론 조립은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만든 3D 프린터는 특허 제약이 없어 얼마든지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다. 제품생산의 가장 어려운 과정인 설계도를 손쉽게 구하다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생이 창업해 3D 프린터 제품을 만들어 팔고 있기도 하다.
급성장하는 3D 프린터 업체
세계 3D 프린터 업계의 양대 산맥은 스트라타시스와 3D시스템스다. 3D 시스템스는 최근 2년간 24개 회사를 인수합병하며 몸집을 키웠다. 이에 뒤질세라 스타라타시스도 동종기업 인수에 열을 올렸다. 지난 6월 6억400만달러(약 7000억원)를 들여 메이커봇을 인수한 뒤 기업 규모가 3D시스템스와 엇비슷해졌다.
스트라타시스의 매출액은 2005년 8284만달러에서 지난해 2억1524만달러로 7년간 260% 정도 상승했다. 해마다 20%대 성장세를 보인 셈이다. 특히 올해는 전년대비 110% 상승한 4억6200만달러 매출이 예상된다. 2016년에는 매출 규모가 다시 2배로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 회사의 영업이익률도 15~20%대로 제조업 가운데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컨설팅 기관 홀러스어소시에이츠는 전 세계 3D프린팅 시장 규모가 현재 22억달러에서 2015년 37억달러, 2019년 65억달러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연평균 9%씩 성장하는 셈이다.
코스닥엔 벌써 ‘3D 프린터 테마주’
우리나라에서도 3D 프린터 완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가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벌써 ‘3D 프린터 테마주’가 생겨 주가가 들썩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3D 프린터로 돈을 벌기란 어렵다. 앞서 얘기했듯 3D 프린터 자체를 만드는 기술은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의 관심은 3D 프린터에 쓰일 소재를 개발하는 업체와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에 쏠린다. 이미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스트라타시스와 3D시스템스는 다양한 소재 개발에 힘쓰고 있다. 국내에서 관련 소재업체는 알려진 곳이 없다. 하지만 핵심 부품업체로는 코스닥 상장사인 프로텍이 주목받고 있다. 김태성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스마트폰 장비를 만드는 프로텍은 3D 프린터를 만드는 핵심 부품이라 할 수 있는 압출기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향후 3D 프린팅 시장이 열릴 경우 최대 수혜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서 시판 중인 압출기 노즐은 대다수가 0.4mm 이지만 프로텍은 0.01~0.02mm 단위의 산업용 노즐을 생산하기 때문에 기술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3D 프린터 ‘황금알’ 아니다
과연 3D 프린터 기술은 대박을 낳을 것인가. ‘3D 프린터 전문가’를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은 “기존 제조업은 모두 몰락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 10월 열린 ‘제14회 세계지식포럼’에서 만난 이 분야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은 3D 프린터의 활용 분야를 ‘틈새시장’으로 한정짓는다.
스트라타시스의 조나단 자글롬 아태 총괄사장은 “지금은 치의학과 방위산업, 항공우주 산업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소품종이지만 고도로 정밀한 설계가 필요하고, 또 설계의 보안 때문에 공장에서 직접 제조해야할 필요가 높은 방위산업과 항공우주 분야에서 더 많이 활용될 것이란 전망이다.
그는 또 안경테처럼 고객이 직접 선택한 디자인대로 제조하는 ‘프로슈머’ 산업에 3D 프린터를 활용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예를 들어 매장에서 고객이 직접 안경테의 형태뿐만 아니라 색상도 선택하고, ‘사랑해’ 같은 문구도 새길 수 있다는 것.
다른 분야로 확대되기 어려운 이유는 속도와 품질 그리고 가격 때문이다. 대량생산이 필요한 공장에서 3D 프린터는 다른 기계장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또 사용하는 소재도 한정적이라 원하는 물질적 특성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개인용 3D 프린터는 수백만 원, 기업용 프린터는 1000만~수억 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싸지만 이 돈을 뽑아낼 만큼 수익성이 좋은 사업은 아직 없다.
더 빠르고 더 값싼 3D 프린터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존 제조업 생산 프로세스를 확 바꿀만한 기술 혁명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스카일라 티비츠 MIT ‘자가조립’연구소 소장은 “과거 전자레인지가 나왔을 때 가스레인지는 다 사라질 것이란 예측이 나왔지만 그렇지 않았다”며 “3D 프린터도 결국 밀링머신 등 기존 제조장비와 계속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다른 제조장비도 수십 년 동안 진화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3D 프린터와 경쟁할 것이란 말이다.
3D 넘어 4D 프린팅 시대로
서울 광장동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제14회 세계지식포럼’에서 만난 자글롬 사장과 티비츠 소장의 ‘관계’를 보면 3D 프린팅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자글롬이 있는 스트라타시스는 이미 티비츠의 연구소와 제휴해 4D 프린팅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4D 프린팅은 3D 프린터에서 부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억소자를 입력해 부품을 만든 후, 이들 부품이 열이나 습도 등 일정 조건을 충족했을 경우 스스로 움직여 완성품으로 조립되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6개의 정사각형 판을 물속에 넣었을 때 이들 판이 사전에 입력된 정보대로 스스로 움직여 주사위를 만드는 식이다. 전통적인 제조 과정에서 ‘조립’이라는 절차가 사라지는 것이다.
초기 단계인 4D 프린팅 연구를 진행 중인 스카일라 티비츠 MIT ‘자가조립’연구소 소장은 “아직은 교육과제로 활용하는 수준이지만 향후 복잡한 구조의 제품 생산에 이용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티비츠 소장은 “4D 프린팅의 상업화가 예상보다 매우 빠른 시일 내 도래할 것”이라며 “미군 뿐 아니라 항공우주국(NASA)과 기업 등 다양한 곳에서 관심을 갖고 4D 프린팅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나서 4D 프린팅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국방부에서 관심이 많다고 한다. 티비츠 소장은 “아마도 스텔스 폭격기에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4D 프린팅 기술로 비행기 겉표면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비행기 겉표면이 어떤 조건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면 레이더에 폭격기가 아닌 다른 모양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공상과학영화에 나올법한 기술, 시간은 걸리지만 꼭 현실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