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을 팔면 700원이 남는 극장 내 팝콘 장사를 딸에게 주는 게 타당한가. 지분이 전혀 없는 아들에게 신주인수권을 싸게 주어 후계자로 만드는 게 좋은가.’
경제검찰 공정위의 칼날이 번뜩인다. 박근혜 정부가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를 국정과제로 내세우면서 MB정부 후반부터 강화되던 공정위의 시장 규율이 점점 세지고 있다. 최근 공정위는 내년 예산과 관련해 7000억원에 육박하는 과징금을 부과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게 혹시 우리 회사에 닥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자세로 내년 사업계획을 세워야 하나. 지금 재계는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다.
공정위의 실무집행을 총괄하고 있는 한철수 사무처장은 이와 관련해 11월 19일 한국CFO협회 조찬 라운드 테이블에서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은 매우 소중하다. 공정위에 반기업 정서는 없다”며 공정거래와 관련한 주요 현안과 정책 방향을 소개했다.
한 사무처장은 공정위의 업무 가이드라인에 대해 헌법을 인용해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보완적으로 시장 지배와 경제력 남용은 방지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효율적 시장경제 시스템의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불공정하거나 불공평한 거래만을 규율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계열이라도 기업 간의 정상적인 거래는 최대한 존중하되 총수 일가가 부당하게 사익을 추구하거나 중소기업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행위는 지속적으로 단속하겠다고 했다.
기업간 정상적인 거래는 최대한 존중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의 오너가 계열사를 세워 특정 부품이나 서비스 거래를 밀어주는 등의 행위가 대표적 단속 대상이다.
이와 관련해 한 사무처장은 총수일가의 사익 편취 규제, 지주회사제도 개편, 신규순환출자 금지, 공정거래법 집행 시스템의 발전 방향 등 4개 현안을 중심으로 공정위의 방침을 소개했다.
우선 총수일가에 부당한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지난 7월 개정한 공정거래법(일감몰아주기 금지법)과 관련해 그는 ‘제 2의 글로비스법’이라며 정상가격과 차이가 크게 나는 거래나 부당하게 사업기회를 주는 행위, 합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거래 등이 규제 대상이라고 했다.
특히 최근 주요 그룹들이 2세를 넘어 3세 4세 체제로 가는 과정에 숫자가 늘어난 자손 모두에게 자그마한 사업이라도 마련해주겠다는 오너의 욕심 때문에 기업의 이익을 빼돌리거나 중소기업과 영세상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 사무처장은 “회사법에 회사기회 유용 금지 조항이 있지만 소액주주가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다 설령 이기더라도 이익이 고스란히 회사에 귀속돼 소송을 제기할 실익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용지물”이라며 공정위가 행정제재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삼성SDI가 삼성전자에 중요 부품을 납품하는 것도 규제 대상일까. 공정위 규정에 따르면 정상적인 거래와 가격차가 7% 이상 나거나 연간 50억원(상품 용역은 200억원)이 넘는 거래가 규제 대상이다. 그 아래는 대상이 아니란 얘기다. 또 총수 일가에게 사업기회를 주더라도 회사가 그 사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거나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고 인정되면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거래 상대방을 자의적으로 선정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되 비용절감이나 중대한 비밀 유지 등이 필요하거나 해킹이나 전산장애 등으로 긴급한 복구가 요구될 때는 일방적인 수의계약이더라도 인정해 준다고 했다. SDI와 삼성전자의 거래는 이런 면에서 허용된다.
한철수 공정위 사무차장
과잉제재 줄이려 ‘민사적 구제’ 보강키로
현행 공정거래법은 기업집단이 지주회사를 이용해 무분별하게 계열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피라미드식 지배를 막기 위해 손자회사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회사 지배 금지 조항 때문에 대부분의 그룹들이 금융사와 비금융사가 교차출자하거나 금융회사만 별도로 총수 직속으로 두는 등 지배구조 밖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앞으로 일반지주회사가 금융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하되, 일정한 기준을 충족한 경우 지주회사 밑으로 중간금융지주회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할 방침이다. 또 금융사와 비금융사 사이의 교차출자는 금지해 집단 내 금산분리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한 사무처장은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간 동양그룹의 경우 금융회사를 통한 순환출자로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다가 개별기업의 부실이 기업집단 전체로 퍼졌다며 신규순환출자를 금지하겠다고 강조했다. 기존에 이미 이뤄진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데는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부분은 공시의무를 부과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풀어가되, 신규순환출자는 막겠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가 있다. 담보권의 실행이나 대물변제, 합병이나 영업 전부의 양수, 기업구조조정 시 채권단이 결정한 경우 등이다.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선 국회에서 여야 간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공정위는 구체적으로 리스트에 올라간 사안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신규순환출자를 허용할 방침이다.
공정거래법 위반 시 법집행은 시정명령을 내리거나 과징금을 부과하는 행정적 제재와 민사소송을 통한 민사적 구제, 형사적 제재 등 세 가지 방식이 있으나 한국은 주로 행정적 제재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사무처장은 “공정거래법은 기업의 영업활동 그 자체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반했다고 형벌로 제재할 경우 기업활동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게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라며 행정규제에 치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공정위는 이와 관련해 공정거래법 집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민사적 구제’를 보강할 계획이다. 형사적 제재를 강화하는 문제는 ‘과잉제재’나 ‘중복제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실제 기업활동을 과도하게 위축시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불공정 거래로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손해를 보전해줄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한 사무처장은 다만 현재 정치권을 중심으로 추진 중인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나 집단소송, 사인의 금지청구 제도 등은 피해 당사자가 손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개인이 거대 기업집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공정위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란 얘기다.
한편 국내 기업들이 공정거래법을 위반해 미국이나 EU 등에서 부과 받은 벌금이 3조3000억원에 이르는 만큼 글로벌 경영 차원에서라도 공정거래에 대한 기업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공정위의 시각이다. 아울러 헌법이 보장하는 사유재산권은 부자의 권리 뿐 아니라 약자의 권리이기도 한 만큼 부자들의 협조가 요구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