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때의 장관을 잊을 수 없다. 응오사 마을과 옌종 마을 등 사업장 인근에 흩어져 사는 1만여 명의 베트남 직원들이 아침 일찍 쏟아져 나와 삼성전자 휴대폰 공장으로 출근하는 2㎞ 가량의 인간띠 행렬을 이룬 것이다.
마치 1970년대 한국 공업화 시대에나 볼 수 있음직한 이 장면은 베트남이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박닌성 옌퐁공단 내 삼성 베트남법인은 3만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연간 1억2000만대의 휴대폰을 만들어내는 대규모 생산단지다. 삼성은 베트남까지 어떻게 가게 됐을까.
삼성전자의 휴대폰 본산은 구미다. 삼성은 1988년부터 구미에서 휴대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3800만대를 생산해 삼성전자 전체 휴대폰 생산량의 10%도 안 되지만 출범 당시에는 그 위용이 상당했다. 구미는 국내 물량을 비롯해 해외 수출을 담당하는 첨병 역할을 했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휴대폰 해외 수출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1992년부터 중국 혜주에 휴대폰 공장을 가동하면서 구미와 쌍두마차 생산체제를 갖추긴 했지만 2000년대부터 휴대폰 해외생산기지 건립을 가속화한 삼성은 2차 해외 전진기지로 중국 천진과 심천을 택했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의 한 임원은 “당시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이 천진과 심천행을 추진했다. 이 사장은 삼성 휴대폰의 프리미엄 전략을 중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2001년 중국 천진에 8200만대 규모의 휴대폰 공장을, 2002년에 600만대 규모의 CDMA폰 공장을 설립했다. 삼성의 해외진출 전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기태 사장의 뒤를 이어 정보통신총괄을 맡게 된 최지성 사장(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관심을 물꼬를 돌렸다. 당시 최 사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임원의 증언이다.
“이기태 사장은 휴대폰 프리미엄 전략에 치중했지만 최지성 사장의 생각은 좀 달랐다. 최 사장은 중저가 보급형 제품의 물량이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휴대폰 사업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글로벌 영향력을 한층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 최 사장이 관심을 둔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한국의 구미공장은 보급형 휴대폰을 만들기에 부적합한 원가구조를 갖고 있었다. 인건비, 세금, 인프라 비용 등을 감안할 때 단가를 도저히 맞추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보급형 제품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생산원가가 저렴한 해외 생산기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검토된 지역이 베트남이었다. 중국 심천, 천진은 이미 하이엔드 휴대폰 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08년 완공돼 2009년 초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한 베트남공장은 2010년까지 50달러 이하의 보급형 휴대폰을 주로 만들어냈다. 당시 글로벌 점유율이 40%에 육박했던 노키아도 30~50달러의 저가폰을 쏟아내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 출시로 휴대폰 시장이 격변하기 시작했고 글로벌 휴대폰 지형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됐다. 휴대폰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어느 전자업체보다 스마트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덕분에 애플 아성을 깰 수 있었다”며 “삼성 베트남공장도 스마트폰 패러다임 변혁기 속에 전략의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삼성의 베트남 현지 직원들은 스마트폰 중심 생산체제에 적응을 잘 해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선천적으로 손재주에 능하고 눈이 밝다. 현재 삼성전자 베트남공장은 1억2000만대를 생산하는데 이 중 99%가 스마트폰이다. 결론적으로 최지성 당시 사장의 베트남행 결정은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의 중흥을 이끈 원동력이 됐다. 삼성전자는 베트남1공장에 이어 2공장 건립을 올 3월 결정했다. 2012년 여름부터 2공장 투자를 검토했는데 일사천리로 투자 결정을 내린 셈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2012년 10월 베트남 하노이로 건너와 베트남법인 임직원을 격려할 만큼 큰 기대를 보였다. 이때 2공장 진출 장소와 투자 규모 등을 최종 결정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수차례 베트남을 방문해 현지 생산시설을 둘러봤으며 2공장 진출을 사실상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응웬성에 자리 잡은 베트남2공장은 올 연말부터 시운전을 시작할 예정이다. 2공장이 완공되면 연간 1억2000만대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베트남에서만 총 2억4000만대 규모의 휴대폰 생산체제로 올라서 연 2억대가량 생산하는 중국을 누르고 세계 최대의 삼성 휴대폰 생산기지로 거듭나는 셈이다.
베트남 휴대폰 1대당 제조 가공비 구미의 29%
삼성은 베트남에서 올해 2만여 명을 채용할 계획이다. 생산량이 늘어나는 요인도 있지만 여직원의 연간 이직률이 40~50%나 된다. 심원환 삼성전자 전무는 “매주 600명 이상 뽑아야 휴대폰 생산계획을 맞출 수 있다. 성수기엔 주 1000명을 충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근 서울대 교수는 “구미의 휴대폰 1대당 인건비가 100이라면 베트남은 16에 불과하다. 만약 삼성이 베트남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연간 7000억원 이상의 제조비용 감소 효과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삼성이 베트남으로 진출한 핵심 요인은 낮은 인건비로 인한 제조비용 절감”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휴대폰 1대당 제조 가공비는 베트남이 구미의 2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사업장에서 똑같은 스마트폰 1대를 만들 때 드는 제조 가공비의 차이는 5.7달러였다. 삼성전자 베트남법인의 연간 생산량은 1억2000만대. 삼성이 베트남으로 진출해 제조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연간 6억8000만달러(약 7000억원)에 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2만~3만명에 달하는 생산직을 한국에서 끌어모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임춘수 삼성전자 상무는 “전국의 여자 실업계 고교에서 대학 진학자를 빼고 뽑을 만한 대상을 다 끌어모으면 2만명 정도”라고 말했다. 휴대폰 생산 원조인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는 9500명이 일한다. 연간 채용 규모는 약 500명. 생산라인에 서는 고졸 여사원 전원이 정규직인 데다 연봉이 4000만원을 넘는데도 사람을 채우기가 만만치 않다는 게 삼성 인사팀의 토로다.
박호환 아주대 교수는 “9000만명이 넘는 베트남 인구의 평균 연령은 27.4세로 한국(38.5세)보다 훨씬 젊다. 베트남은 젊은 생산인력이 많은 피라미드 인구구조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은 항아리형 구조로 고졸 생산직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 통계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생산직 구직자는 21만6000명이지만 구인자는 30만7000명으로 오히려 많았다. 이미 2010년부터 구직-구인 미스매칭이 발생했다. 생산가능인구가 늘지 않고 청년층이 생산직을 기피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베트나 삼성공장 근로자들
심원환 전무는 “베트남에선 250달러 월급으로 한 해 2만명의 생산직을 문제없이 뽑을 수 있다. 구미에서 이 정도 월급으로 이만한 규모의 인력을 뽑을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물론 베트남 인력시장이 장밋빛 일색인 건 아니다. 박 교수는 “연평균 50% 안팎의 높은 이직률과 노사분규 증가 추세는 베트남 진출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삼성 측은 베트남법인 내에 기숙사 시설을 확충하고 사내대학을 적극 운영해 이직률을 낮출 방침이다. 문휘창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은 “고용은 단순 숫자가 아니라 퀄리티가 관건이다. 삼성의 베트남 진출로 생산직 일자리가 줄었더라도 휴대폰 사업의 경쟁력 향상과 함께 개발, 기술, 디자인 등 고급 인력은 한국에서 몇 배씩 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활동도 삼성의 베트남 진출에 한몫했다. 한국에 존재하는 반기업정서와 경제민주화 기류를 감안하면 베트남에선 한국 대기업들이 ‘황제대접’을 받는다. 베트남 재정부, 투자계획부, 상공부, 과학기술부, 박닌성 인민위원회 관계자 10여명으로 구성된 삼성 TF팀은 응웬 떤 중 베트남 총리에게 삼성 프로젝트 진행 현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했고 총리는 신속한 행정 처리와 애로 해소를 재차 강조했다. 전 부국장은 “외국계 기업의 투자 프로젝트는 지자체에서 먼저 논의돼 중앙 정부로 보고되고 승인되는 게 일반적인데 삼성 투자 건은 중앙 정부가 직접 발 벗고 뛰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부는 법인세법이 허용할 수 있는 최고 면세 혜택을 삼성에 부여하기로 했다. 이는 외국계 기업 중 인텔에 이은 두 번째 적용 사례다. 이에 따라 삼성은 2007년 초기 투자 과정에서 첫 4년간 100% 면제, 이후 12년간 법인세율 5%, 그 이후로는 법인세율 10%라는 감세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