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 오전.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천으로 차를 달렸다. 이날은 SK하이닉스가 SK그룹의 일원으로 공식 출범하는 날이다. 이미 임시주총을 마쳤고 이사진 선임도 끝난 뒤였다.
SK하이닉스 이천 본사에 도착한 최 회장은 권오철 사장 등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 최고 반도체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새 출발을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자신의 행복경영 철학을 역설했다.
“행복을 만들고, 그 행복을 회사 구성원과 지역사회, 고객들과 나누는 것이 SK의 기업철학이다. 이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행복을 생산하는 SK의 기반이 탄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하이닉스를 인수하게 됐다.”
최 회장은 특히 “하이닉스가 SK의 식구가 된 이상 시장에서 혼자 악전고투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대신 하이닉스도 SK가 지향하는 행복 만들기에 동참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최 회장은 SK그룹이 지난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설립하고 반도체 산업 진출을 모색했으나 석유파동으로 꿈을 접었던 일을 상기시킨 뒤 “책임감을 갖고 반도체 사업에 투자해 하이닉스를 더 크게 키울 것이고 이를 위해 어떤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고 강조했다. 에너지나 정보통신와 함께 반도체를 그룹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당초 올해 4조2000억원으로 잡았던 투자와는 별도로 반도체 시장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도 있는 엘피다 인수에 나섰다.
이미 정보통신 분야의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있던 SK는 반도체를 끌어들임으로써 정보통신기술 산업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됐는데 여기에 엘피다까지 인수할 경우 파워는 더욱 커질 수도 있다.
성장 과실은 함께 나눠야
이처럼 M&A로 그룹이 빠르게 커가고 있지만 성장의 과실은 사회와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이 제시하는 행복경영의 골자다.
사실 그의 행복경영은 몇 년 전 시작됐다.
지난 2004년 4월 최 회장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SK그룹 연수원에서 열린 그룹 창사 51주년 기념식에서 ‘뉴SK 재도약’을 선언한 뒤 “앞으로 SK의 경영철학은 모든 이해관계자의 행복 극대화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SK는 ‘이해관계자’에는 고객이나 구성원 주주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계속하되 사회 전체의 행복극대화로 발전해야 되고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웃과 우리 모두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만드는 게 행복경영이란 것이다.
경영이념이 ‘이윤 극대화’가 아닌 ‘사회의 행복’으로 바뀐 것이다. 이듬해 나온 ‘행복날개’ 로고는 물론이고, ‘고객이 행복할 때까지’나 ‘행복 바리러스’라는 기업의 카피도 새로운 경영이념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경영이념을 내세우면서 SK 임직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실행원칙도 바뀌었다. 행복경영은 SK의 새로운 기업문화로 자리를 잡았고 ‘사회의 행복’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이나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 경영 등으로 구체화됐다.
SK의 동반성장은 단순히 나눠주는 것보다 함께 성장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는’ 사회공헌 활동과 맥을 같이 한다.
실질적 동반성장은 교육과 기술협력
SK는 협력업체 CEO들을 대상으로 상생CEO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07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2067명의 협력업체 CEO가 이 교육을 받았다고 SK는 밝혔다. 이와는 별도로 연평균 110명의 협력업체 중간관리자가 참석하는 상생MDP도 실시중인데 지금까지 588명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또 2008년부터 협력업체 직원들은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교육인 상생e-Learning도 하고 있다. 연간 8차례에 걸쳐 105개 과정을 운영하는데 매년 평균 570여 협력사가 참가하고 있고 그동안 7만8000여 명이 수강했다고 한다.
협력업체의 실력이 향상되면 자연스레 함께 성장해갈 길이 열린다는 게 최 회장의 지론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계열사들도 사업특성에 맞는 대·중소기업 간 기술협력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SK텔레콤은 대형 장비 제조사와 중소 중계기 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동반성장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6월엔 SK종합화학이 6월 동반성장 간담회를 열어 SK종합화학 협력사인 제이콘 등이 베트남 BSR사의 정기보수 업체로 선정된 사례를 동반성장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제이콘과 유창, 대창기계기술 등 3개 협력사는 지난해 4월 SK의 지원을 바탕으로 입찰에 참여해 베트남 정유회사인 BSR사의 정기보수 업체로 선정된 바 있다.
필요할 경우 중기에 직접 지원
BSR 사례는 중소기업이 필요할 경우 SK가 직접 나서서 지원까지 한다는 하나의 사례가 됐다. SK는 이를 보다 발전시켜 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엔 자금까지 지원한다는 전향적인 동반성장 모델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SK그룹은 현재 230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 지원용 ‘SK동반성장펀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지난 2009년 6월 1200억원 규모로 1차 출범한 SK동반성장펀드는 같은 해 300억원이 추가로 들어왔고 지난해 6월 800억원이 더 들어와 대형 펀드의 위상을 갖췄다. SK동반성장펀드엔 SK텔레콤과 SK종합화학 등 SK그룹 관계사와 매칭펀드로 나선 IBK기업은행 등 금융기관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최 회장은 “동반성장을 위한 대·중소기업의 행복 동반자 경영은 SK가 천명한 경영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또 일회성 지원이 아닌 지속성과 효율성을 갖는 동반성장의 플랫폼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처럼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하는 동시에 SK는 중소기업이 할 만한 일은 앞으로 중소기업에 맡긴다는 원칙도 정립했다.
지난 3월 연매출 1300억원대로 국내 최대 규모의 사회적 기업인 ‘행복나래’(옛 MRO코리아)를 출범시킨 것이 단적인 사례다. 최 회장은 대기업의 MRO사업에 논란이 일자 지난해 8월 그룹의 MRO사업을 맡고 있던 MRO코리아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도록 주문했다. MRO 사업이 중소기업과의 상생에 역행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예 중소 MRO업체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이익도 나누는 새로운 사회적 기업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사회적 기업 전환을 위해 SK는 미국 그레이너 인터내셔널사가 보유하고 있던 이 회사 지분 49%를 모두 사들인 바 있다. 이에 따라 행복나래는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등이 주주로 있지만 완전한 사회적 기업으로 독자 경영을 하고 있다.
SK는 더 나아가 사회적 기업 모델을 외국에 전파하는 역할도 자임하고 있다.
SK 사회적 기업 모델 세계로 보급
“사회적기업의 콘셉트는 단순히 (사회에) 무엇인가를 줘버리고 마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업의 혁신 능력을 활용해 사회적 이슈들에 접근해가는 것이다.”
지난 4월 2일 중국 하이난다오에서 열린 보아오포럼 둘째 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조찬행사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이 행사엔 리션밍 중국 사회과학원 부원장, 롱용투 전 중국 국무원 상무부 부부장, 장야페이 화웨이그룹 부사장 등 중국의 정·관계 인사들과 기업인, 학자 등 다수가 참석했다.
최 회장은 모두 발언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에 수반되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기업이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특히 “사회구조와 경제발전 경로 등이 한국과 유사한 중국에서도 SK식 사회적 기업 모델이 매우 유용할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중국 내 SK 파트너 기업들이 SK의 경험과 노하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포럼이었던 만큼 각국 언론은 즉각 최 회장이 사회적 기업의 개념을 선도해나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일보 인터넷판은 이날 한국 SK그룹이 민간 섹터의 역량을 사회적 문제들의 해법으로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쟁사들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이난다오 소식통인 홧스온산야는 최 회장이 사회적 기업에 관한 노하우를 중국 파트너와 공유하겠다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첸잉 유엔글로벌콤팩트네트워크 이사는 “SK의 사례는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중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SK는 이날 발표와 관련해 사회적기업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기업 이익이 사회로 흐를 수 있게 하는 SK식 ‘행복 플랫폼’ 모델이 글로벌 무대에서도 인정받고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기문 총장도 인정한 SK 사회 공헌
최 회장이 세계적 포럼에서 공식적으로 SK그룹의 사회적 기업 모델 수출을 제안한 것은 그동안 쌓은 노하우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SK그룹의 사회적기업 출발은 지난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K그룹은 그해 5월 소외계층 일자리 창출 계획을 발표했고 12월엔 SK텔레콤이 실업극복국민재단과 ‘결식이웃 도시락 급식사업’ 실행 협약을 체결했다. 오늘날 ‘행복도시락’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행복도시락 사업은 단지 결식 이웃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무료도시락을 전하는 동시에 공익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고 있다. 현재 행복도시락 급식센터는 서울에 5개, 강원도 3개 등 전국에 30개 센터가 있는데, 이 가운데 8곳을 제외한 전 센터가 정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SK는 이들 8곳도 2014년까지는 정부 지원 없이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자립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료도시락 사업을 하면서도 자립이 가능한 것은 최상 품질의 도시락으로 다양한 판로를 개척해 수익원을 확보함으로써 지속적인 공익사업을 가능케 하는 재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행복도시락은 결식아동이나 저소득층 노인에게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취약계층 시민들에게는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구로서 자리매김했다. 현재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종사자는 조리원과 배달원을 포함해 700여명에 달한다. 적어도 700여 가구에 안정적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단란한 가정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나눔은 가르침
최 회장이 보아오포럼에서 밝힌 것처럼 SK의 사회적기업은 단지 필요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게 아니라 SK의 노하우를 전수해 지속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의 여러 나라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가르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SK그룹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직접 설립하거나 설립을 지원한 사회적기업은 73개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는 오랜 역사의 ‘장학퀴즈’를 시작한 그룹답게 ‘교육’ 관련 사회적기업이 많다.
행복나눔재단의 SK행복카스쿨에 대표적인 사례.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선발해 자동차 정비 교육을 시켜 어엿한 사회인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행복카스쿨’은 지금까지 4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현재 22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하순봉 매니저는 밝혔다. 졸업생 중엔 외제차 정비공으로 취업한 인물도 있다.
우선 방과후학교 사회적기업 모델인 ‘행복한 학교’를 서울과 부산, 대구, 울산에서 운영 중이다. 이 사업은 방과후학교를 위탁운영하면서 교육격차를 해소하고 사교육비 부담을 완화할 뿐 아니라 강사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효과까지 있다. 지난해까지 60여 개 학교에서 9200여 명이 수강했는데 이를 위해 강사 381명을 채용했다.
‘행복한 도서관’은 도서관 분야 최초의 사회적기업. 지난해 군포시 등 37개 아파트 도서관을 지원했으며 7만여 권의 도서를 70개 소외지역에 기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는 또 출소자의 사회적응을 돕기 위한 ‘행복한 뉴라이프’나 조경 및 재활용 사업을 통해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을 유도하는 ‘행복한 농원’과 ‘행복한 녹색재생’ 등 사회적기업 10개를 직접 설립했다.
SK가 설립을 지원한 대표적 사회적기업은 ‘행복 도시락’이다. 이 밖에도 SK는 취약계층 여성의 보육문제를 돕기 위한 ‘마을과 아이들’과 ‘아가야’ 등 63개 사회적 기업 설립을 지원했다.
사회적기업에 필요한 전문가 육성과 인프라를 조성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SK는 사회적기업가 육성을 위해 사회적 기업 스쿨과 창업 아카데미를 10여 차례 열었고 사회적 기업에 필요한 재무, 회계, 법무, 마케팅 등을 맞춤식 봉사로 지원하는 ‘SK프로보노’도 운영 중이다.
또 사회적기업 간 협력 네트워크 체제인 웹사이트 ‘세상’을 통해 사회적기업 간 또 정부와 연구기관, 기업,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 사이의 소통과 정보공유를 돕고 있다.
지난 2010년엔 그룹 내 ‘사회적기업사업단’을 독립기구로 출범시키고 2011년까지 500억원의 사회적기업 육성기금을 조성해 지원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지난해 8월 유엔글로벌콤팩트(UNGC) 한국협회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최 회장이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사회적기업 캠페인은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선도하고 있다”면서 “기업들은 사회문제를 다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SK그룹이 한 것처럼 하라(Do what SK Group did)”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최 회장이 보아오포럼에서 중국에 사회적기업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