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진 않았지만, 의외의 큰손이다.”
자산규모 83조원으로 재계 서열 5위에 빛나는 롯데그룹은 화랑가의 숨겨진 큰손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과 신동빈 그룹 회장이 조용하게 수천만, 수억원대의 그림을 구입하지만 외부로 알려지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롯데가 화랑가에서 낯선 기업도 아니다. 롯데그룹은 주력기업인 롯데쇼핑이 운영하는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 등을 통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거래하고 있어, 화랑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워낙 조용하게 활동한 나머지 ‘롯데’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또한 유통업계의 맞수인 신세계그룹이 아트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목이 집중돼 롯데의 존재감을 가볍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화통한 큰손이지만, 너무나도 조용하게 활동하고 있는 롯데그룹의 아트마케팅 전략을 살펴봤다.
폐쇄적인 롯데의 소극적인 예술 투자
롯데그룹은 국내 유통업체들 중 가장 먼저 전국 단위 시설의 갤러리를 구축했다. 지난 1979년 그룹 내 주력 계열사인 롯데백화점이 “문화백화점으로 위상을 높이겠다”며 서울 본점에 최초로 갤러리를 열었다.
이후 롯데백화점은 영등포점과 청량리점, 일산점, 안양점, 부산본점, 광복점, 대전점, 광주점, 파주아울렛점 등 10곳에 갤러리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올해에는 잠실점과 노원점 등에도 전시관을 오픈할 예정이다. 단순하게 전시관 규모만 놓고 보면 국내 최대 규모라는 삼성그룹의 리움미술관과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나 롯데갤러리의 명성은 리움미술관은 제쳐두고라도 유통가 맞수인 신세계백화점보다 낮은 편이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지만 소극적인 투자와 작품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예술인들의 원성을 사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5월 신동빈 롯데 회장이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추정가 5억원대의 예술품 12점을 구입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화랑가 인사들 사이에서 이 사건을 놓고 롯데의 소극적인 예술 투자의 단면을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롯데그룹은 복수의 미술품 업체들에게 작품이 놓일 공간의 조감도와 평면도를 제공한 후, 작품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성보다 공간과 가격에 맞추는 롯데의 경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란 게 미술계의 지적이다.
여기에 신동빈 회장의 그림 매입을 담당한 부서가 갤러리 운영을 맡고 있는 문화사업팀이 아닌 집무실 인테리어를 담당한 팀이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작가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예술 투자 아닌 단순 마케팅으로 활용
평창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한 인사는 “미술품은 작품성을 따진 후 인테리어 전문가와 함께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전시공간을 재구성하는데, 당시 롯데는 집무실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예술품들을 구입한 것처럼 보였다”며 “각고의 노력 끝에 작품을 만든 작가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름이 알려진 중견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기보다는 많은 이들에게 전시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작가들의 작품이 단순한 고객마케팅에 사용되는 점도 롯데에 대한 반감을 키우고 있다.
화랑을 운영하는 업체들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그림 매입보다는 전시회나 인테리어 차원의 렌털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술작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경매업체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이나 신세계백화점의 경우 그림 매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지만 롯데는 소극적이다”며 “매입보다는 렌털을 통한 인테리어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해 5월에는 롯데그룹의 문화마케팅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 있었다. 신세계백화점이 창립 80주년을 맞아 세계적인 팝아트 예술가로 알려진 제프 쿤스의 300억원대의 작품을 본점 옥상에 설치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를 벌인 반면, 롯데백화점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쇼핑백과 증정품을 만드는 데 사용해 대조를 이뤘다.
업계에서는 롯데백화점이 예술작품을 단순한 고객 상품으로 활용한 것은 과거에 이런 마케팅으로 큰 효과를 봤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2005년 3월 명품관인 애비뉴엘 개관 당시 일본 대표작가 세이지 후로시로의 작품을 활용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문제는 5년째 같은 기획만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보업체의 한 임원은 “초기에 예술작품들을 고객서비스 도구로 활용해 대중에게 예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오랜 기간 계속되면서 단순한 마케팅수단으로 비치기 때문에 전략의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룹 차원의 전략 구성해야
마케팅 전문가들은 롯데그룹의 아트마케팅이 유독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룹 차원의 전략을 주도할 ‘컨트롤타워 부재’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회사의 브랜드와 마케팅 방향에 맞춰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음에도 갤러리별로 행사를 따로 진행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10곳이 넘는 갤러리를 전국에 걸쳐 보유하고 있는 롯데백화점의 경우 마케팅 부문 문화사업팀이 갤러리 사업을 진행하는데, 사실상 그룹 차원이 아닌 지점별로 따로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업체인 신세계백화점이 별도의 갤러리팀을 운영하며 전체적인 기획과 일정을 잡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롯데백화점도 업계의 이 같은 지적에 수긍하고 있다. 그러나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예술 작품에 대한 투자는 고객 서비스 차원일 뿐, 문화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투자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