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Biz] 율촌 공동기획 Business Law & Case ⑦ 내가 낼 세금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입력 : 2012.05.04 13:11:08
수정 : 2012.05.25 09:06:28
현빈처럼 잘 생기지 않았다. 나는 경륜이라고 부르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허리를 감싸고 있고, 물론 이것이 위치를 조금 잘못 잡고 있는 까닭에 남자의 자격이라는 식스팩으로도 불리지 못할 뿐더러 내가 보아도 그냥 핸들이라는 점 인정한다. 현빈처럼(물론 입대하기 전의 현빈) 머리를 넘기고 옷을 입더라도 거기서 과연 현빈을 ‘찰나’라도 떠올려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따라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런데 단 하나, 꼭 따라하고 싶은 대사는 있다. ‘현빈앓이’라서가 아니라 한 명의 납세자로서, 또 어떤 때에는 어느 납세자를 위한 한 변호사로서 할 수만 있다면 그 표정 그대로 하루에도 몇 번씩 판사에게 또는 세무서에게…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이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A씨는 어느 한 지방의 공장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주말이 적적해졌다. 도심같이 번잡하지 않아서 좋지만 딱히 주말에는 할 일이 없었다. 100평도 안 되는 작은 논, 주말에 해보는 농사. 재미도 꽤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농사가 10년이 지났고 공장에서 은퇴할 무렵 마침 땅도 수용이 되었다. 8년 동안 농사지은 땅은 양도소득세도 감면해 준다는 얘기도 그동안 같이 농사짓던 이웃 사람들에게 들었던 터라 기분도 좋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세무서에서 A씨만 안 된다고 한다. 그동안 직장도 있었고 딱히 비료나 농약 같은 걸 구입한 영수증도 모아 둔 게 없고, 해마다 얼마나 수확했는지 적어 놓은 자료도 없다. 직접 농사지었다는 걸 소명하라고 하는데, 이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8년만 농사지으면, 그 땐 널(세금감면)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소송까지 했지만 별다른 증거도 없는 까닭에 자경농지 세금 감면은커녕 비사업용토지 중과세율의 적용으로 양도차익의 2/3에 가까운 세금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네고시에이터 혹은 글래디에이터
세법의 영역에서 납세자는 사무엘 잭슨(Samuel L. Jackson)의 네고시에이터(negotiator)가 되기도 하고 러셀 크로우(Russel Crowe)의 글래디에이터(gladiator)가 되기도 한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다만 세법의 영역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사무엘 잭슨이 결국 투구와 칼을 들고 러셀 크로우로 변신할 수는 있어도, 러셀 크로우가 들고 있던 칼을 버리고 사무엘 잭슨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슨 말일까?
민사 소송을 하다 보면 법원은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들고 있는 칼을 휘두르기 보다는 다른 한쪽 팔에 들고 있는 저울을 선호할 때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누구나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될 말만 할 뿐이고, CSI 그리섬 반장처럼 어느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꼼짝 못하게 가려내기는 어렵다. 모두가 양보하면서도 이익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세법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만일 이 사람이 내야 할 세금을 덜 낸다면 결국 누군가의 주머니가 더 털릴 수 있다”라는 불안감이 조용히 법정에 내려앉는다. 세무조사를 받을 때에는 사무엘 잭슨이 되었다가 일단 불복을 시작하면 러셀 크로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사실관계가 복잡하거나 법리가 애매할 때, 적어도 ‘세법은 All or Nothing’이라는 믿음이 결국 ‘의심스러울 때는 국가의 이익으로’라는 복음으로 바뀌어 전파되기도 한다. 세법의 법정에서는 죽든 살든 휘둘러 볼 러셀 크로우의 칼은 있어도 사무엘 잭슨의 협상은 별로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지어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스턴트우먼(길라임·하지원 분)에게 없는 게 없는 백화점 사장(김주원·현빈 분)이 그 여자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현빈이 된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떠밀려 현빈이 된 것은 싫다. 얼떨결에 현빈이 된 A씨는 이렇게 한 번 더 묻는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협상을 할 수 있다면 중과세율의 적용만 면하게 해주는 식으로 일부는 세금을 낼 용의가 있다. 나중에 대법원까지 집요하게 다툰다면 그 과세처분의 근거가 된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이 위헌으로 선언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다투지는 않을 테니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해서 소송을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누가 감히 세금을 쿠팡하려 하는가?” 그런데 All or Nothing은 세법의 영역에서 불변의 복음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납세자에게는 물론 과세관청을 향해서도 휘둘리는 양날의 칼인 까닭이다. A씨와 같이 현빈이 되고 싶지 않은 납세자를 현빈으로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처음부터 당연히 현빈이었어야만 할 납세자를 처분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놓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민사소송의 경우 어차피 두 당사자 사이의 이해만 조정할 수 있으면 충분하겠지만 세금은 다르다.
국가는 받아야 할 세금을 못 받으면 다른 방법으로 세수를 찾아야 하고, 그러다가 법을 새로 만들어서라도 억울한 납세자를 새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세요건 사실의 인정 또는 관련 법리의 적용 범위에 있어 어느 정도 의문이 있을 때 과연 무리하게 어느 하나를 인정하거나 부인하면서까지 그 결론의 파장을 감수하여야 하는지 조금 의문이 있다. 납세자와 과세관청 사이에서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중도의 길이 공공의 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렌치 퀴진(French Cuisine)의 묘미
서울시 38세금징수과 조사관이 체남자들의 압류재산을 봉인하고 있다.
상대방을 속이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동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협상이 아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면 자기가 반드시 취하여야 할 이해관계(예컨대 명분)와 포기할 수도 있는 이해관계(예컨대 실리)를 분명히 나누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 협상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정당하게 도출된 결론과 그 과정에서 양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다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야 한다.
세법의 경우, 특히 법리의 적용 한계가 법원의 판결로 확정될 경우 그 파장이 매우 크다. 그 당사자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국가 경제적으로 동시에 퍼져 나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행여 미처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정한 결론 때문에 구제가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때문에 세법의 영역 또한 과세관청과 납세자 사이의 협상이 필요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적어도 소송이 아니라 세무조사 등 소송 이전의 단계에서 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과세관청과 납세자가 사실관계나 쟁점을 토의하면서 각자 자신 없는 부분에 대하여 협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단 어떠한 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지면 과세관청을 신뢰한 납세자가 불복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 합의라는 것이 진정한 협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많고, 또 일단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정책 감사’라는 제도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과세관청이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따라 납세자와의 합의를 먼저 깨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결국 법원의 All or nothing에 입각한 심판을 받아야만 끝장이 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Closing Agreements 같은 제도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진정한 협상은 소송에서 그 빛을 발할 지도 모른다. 불복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에서 법원이 법리와 사실관계를 무리하게 판단하면서 확실하지 않은 선례를 남기기보다 구체적 타당성을 고려하면서 공공의 선을 찾는 묘미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All or Nothing의 판단은 경우에 따라서 더 큰 공공의 선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실무적으로 법원의 ‘조정권고’가 받아들여지는 예가 많지 않고 법원 또한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재의 노력을 너무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절정의 프렌치 퀴진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1mg의 소금만 더 들어갔어도 아우~ 짜! 했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맛의 경계!”
그러한 맛의 경계를 찾는 것 또한 우리가 법원에 기대하는 법원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의 디케(Dike)는 로마 시대에 이르러 유스티티아(Justitia)로 바뀌었고, 이 유스티티아에서 오늘날 정의를 뜻하는 ‘Justice’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세특례제한법 제66조 제12항은 자경(직접경작)의 의미를 ‘농작업의 2분의 1 이상을 자기 노동력으로 재배· 경작’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실무적으로는 전업 농민이 아닌 이상 ‘자경’의 요건을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라. 필요한 농작업을 어떻게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내가 투입한 노동력이 필요한 농작업의 51%인지 아니면 49%인지 법원이 과연 가려낼 수가 있을까? 그 기준이 되는 농작업은 무엇을 또는 누구를 기준으로 하여야 할까? 흔히 말하는 과세요건 명확성의 원칙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 보인다. 때문에 이 조항에 대하여는 여전히 위헌·무효의 시비가 있다.
김동수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육군 법무관을 거쳐 법무법인 율촌에 합류했다. 율촌 재직 중 미국 플로리다 대학에서 법학석사과정을 밟고 국세조세연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조세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법무법인 율촌에서 약 15년간 조세업무의 스페셜리스트로 활동한 것은 물론 현재 중부지방국세청 고문변호사로 공익업무에도 힘쓰고 있다. 이외에도 국세청 과세품질 혁신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8년과 2009년 Aisa Law&Practice에서 선정하는 조세분야 ‘Leading Lawers’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