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13일 타계한 철의 사나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박 회장을 2008년 여름 직접 만나 극히 개인적인 얘기부터 포스코 건설과정에서의 뒷얘기까지 허심탄회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다. 3개월 넘는 설득 노력 끝에 겨우 잡은 소중한 인터뷰였다. 박 명예회장을 빼고선 당시 매일경제가 진행하고 있던 ‘건국 60년 특별대담’은 무의미하다는 의견을 계속 전달했고 결국 승락을 받아냈다.
당시 이미 여든을 훌쩍 넘긴 박 회장의 나이를 고려해 당초 인터뷰는 30분 정도만 짧게 진행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박 회장과 과거로의 여행은 2시간10분을 넘겨서야 마무리됐다. 그는 2시간 넘는 인터뷰 동안 자리에서 단 한 차례도 일어서지 않을 정도로 집중력과 체력을 보여줬다. 특히 소파에 앉았으면서도 양복 윗도리 단추를 모두 채운 상태에서 꼿꼿한 자세를 계속 지켰다. 평소 철저했던 자기관리가 그대로 엿보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경제개발과정이나 포항제철 건설 대목을 얘기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더 들어갔고, 구체적인 일시와 장소·통계수치까지 수시로 꺼낼 정도로 기억도 또렷했다.
2시간 동안의 인터뷰는 기업인은 물론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뜨거운 강연이기도 했다.
2008년 7월23일 매일경제 인터뷰가 언론사와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당시 신문에 못다 실은 내용들을 포함해 메모해뒀던 인터뷰 전문을 공개한다. 최대한 박 회장 발언을 그대로 옮긴다.
편한 나라가 잘사는 나라
강연하는 박회장 / 1976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화입식
포항 1기 고로에서 첫 쇳물을 지켜보며 환호하고 있다.
80을 넘기니까 그동안은 건강에 자신 있었는데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더라. 1000만톤 제철소를 두 개 만들어도 괜찮았는데 70을 넘기면서 하나둘씩 예전같지 않은 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경제개발 역사를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선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에 근대화된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첫 번째 아닌가. 대만은 중국의 일부고 멕시코도 하다가 말았고 중남미도 고꾸라지고. 계속 성장하는 곳이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는데, 아마 첫 번째 아닐까 싶다.
영국이나 독일·프랑스 공항에 내렸을 때 분위기가 선진국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호텔 들어갈 때의 감각 같은 거다. 호텔 매니지먼트는 국가 매니지먼트를 대표한다.
정말 국제적으로 뭘 하겠다는 상황을 처리하는데 모든 조건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더라. 마음이 편했다. 무엇을 확인하려고 할 때 다른 도시에서는 오래 걸리는데 파리는 금방 된다. 편한 나라가 잘 사는 나라, 선진국이 아닌가 싶다.
1961년인가, 5.16 이후에 12월에 유럽에 갔는데 그때 파리에서 머문 호텔이 있다. 중간에 리모델링도 하고 몇 차례 바뀌긴 했지만 그 호텔이 지금도 있다. 매니지먼트가 바뀌어도 자기들 기록이 있으니까 지금도 나를 반기더라. 동양인 중에서 내가 가장 오랜 고객이라고 하더라.
세계경제를 알려면 유럽경제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변하고 발전하는지 어느 나라가 선도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미국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안 가봐도 다 아는 것이다. 여전하다. 결국은 미국과 유럽·일본이다. 그리고 요즘 중국이 상당히 성장하고 있다. 인도도 정신 차렸다.
(인도·중국·베트남 지도를 보면서) 인도 뉴델리·뭄바이는 IT를 중심으로 방갈로부터 발전하고 있다. 이번에는 남쪽부터 발전해나가는 모습이 흥미롭다. 뭄바이는 유럽경제 관련 문화가 모두 들어와 있다. 인도에서 가장 질서 있는 도시다. 대한중석 사장 때부터 뭄바이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
유럽에서 인도로 들어올 때 뭄바이부터 들어갔다. 옥스포드 캠브리지대학 나온 사람들, 영국에 집 있는 사람이 많다. 식민지 시절부터 충실히 일했던 사람들이다. 중국 상하이에도 가끔 들린다. 얼마 전에 다녀왔다. 대단히 걱정스럽다. 웬만하면 다 뺏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중국전략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다. 쑥쑥 빠져나가고 있다. 대우조선은 포스코가 관리해야 한다. 중국 때문이다. 포스코가 하면 절대 안 빼앗긴다. 재정자금 다 있다. 요즘 재무구조도 엉망이고 적자 상태인 기업들이 돈 빌려서 너도 나도 달려들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해야 한다. 왜 질질 끄는지 모르겠다.
박태준에게 박정희는
도전정신·기업가정신이 갈수록 퇴색한다는 얘기들 하는데 너무 빨리 발전해서 그렇다. 너무 빨리 먹는 게 해결돼서 그렇다. 세끼 해결된 게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다. 그때 북한과 경제도 역전됐다. 비서실장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 잉여 농산물을 거지처럼 받아서 되겠나”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농사를 제대로 안지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토론해서 나온 게 새마을 운동이다. 의식구조를 고치자는 거다.
새마을운동 하자고 한 뒤에 새마을 노래 메모가 내 책상 위에 전달돼 왔다. 사실 나도 어떻게 추진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퉁’하고 나왔다. 깜짝 놀랐다. 그런 리더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정신으로 모셨다. 이래선 안 되는데 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멘트·비료공장도 했는데 제철소가 없었다. 절실했다. 하지만 제철소는 기계를 외상해 와야 하는데 그럴려면 시멘트공장 20~30개 들어갈 비용이 필요하다니까 다 손들었다.
그런데 나한테 이게 돌아왔다. 내가 박 대통령하고 제철소 관련 보고를 그동안 받아 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는데, 이게 오니까 ‘아차, 죽었다’ 싶었다. 그 뒤로 2~3년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1962년에 시작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2차 계획에 제철소 건설이 다 들어가 있었다. 1차 때 유일하게 안 된 게 제철소였고 2차 때도 안됐다. 대통령 결정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법이든 해결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대일청구권 자금이 딱 떠올랐는데, 내가 먼저 일본에 가서 해놓고 JP(김종필)가 가서 타결시켰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도 당시에 자주 만났다. 이 회장을 수차례 찾아갔다. 이 회장은 “내가 해온 것은 밀가루나 설탕 같은 소비재다. 그런 것만 했으니까 빚져도 얼마든지 된다. 박 사장의 제철소 건설은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 제철소가 있어야 한다. 국도도 짓고 하려면 철이 엄청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나는 “회장님이 일찍이 기업으로 성공했고 끝없이 성장할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삼성 하나로 되겠는가. 중공업은 이익은 안 난다. 그러나 이익 없어도 소재를 만들어줘야 고속도로도 만들고 댐도 건설할 것 아닙니까”라고 다시 말씀드렸다.
그는 “그건 맞는 말인데…. 내 기업이라 생각해서 검토해 본적이 없다. 내가 설탕·밀가루만 만들어서…. 검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긴 해야지 하는 생각을 명확히 가져본 적이 없다”면서 고민을 함께했다.
박태준에게 일본은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끝난 뒤에 1년간 일본에서 경제개발 공부하라고 보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공부할게 뭐 있나.
대학도 일본에서 나왔으니까 일본으로 가라”고 하더라.
북해도에서 큐슈까지 제철소들을 다 훑었다. 일본 사람들도 쉽게 제철소를 하는 것은 아니더라. 하지만 내가 철저히 하고 열심히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저 놈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생각했다.
이나야마 회장은 몇 번 만나더니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인품이 대단했다. 그분이 나의 인간성도 파악하고 애국심도 있다고 본 것이다. 나중에 친해져서 같이 차 타고 다니면서 술도 마시고 차 안에서 둘이서 노래도 불렀다. 일본 유행가를 내가 먼저 부르면 이나야마 회장이 그걸 메모하며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내 앞에서 부르면서 맞게 불렀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들과 친해지려고 일본 유행가를 미리 연습했다. 미리 노력해야 한다. 또 술을 못하면 안 된다. 마실 줄 알아야 한다. 술 안 먹고 어떻게 사업을 하나. 술을 한잔 했을 때 진짜 대화가 나온다. 게이샤가 있는 술집에 가서도 나는 내가 더 팔팔하니까 뺏길 순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와세다대학을 나와서 일본 사정도 잘 알았기 때문에 게이샤들도 맘 놓고 편하게 대했다. 이나야마 회장이 나중엔 “이러다간 동경 시내 계집 다 빼앗기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터놓고 지낼 수 있게 만들었다.
한·일 경제회의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나를 다 아는데 우리 측에서 나를 더 몰라보더라. 나야 부지런히 뛰어다녔지. 갈수록 대일 창구가 없어지고 있다. 내가 보고 있어도 답답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일본 측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만난다. 다 80살이 넘었다.
나는 일본에 가면 호텔에서 일본 고위층 비서에게 박태준이 왔다고 연락해 놓고 밖으로 나가서 만날 사람 만나면서 돌아다닌다. 호텔로 돌아와 보면 일본 측 비서들의 언제 언제 시간이된다는 메모가 남아있다. 부지런히 만나느라 피곤하지만 저녁 파티에도 부지런히 나간다. 내가 나가면 하나 둘씩 데리고 나오니까 적어도 다섯명 이상은 나온다. 일본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건 어떻게 된거냐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서 별거별거 다 물어본다. 피곤해도 일일이 다 설명한다.
박태준과 포스코
1987년 광양제철소 준공식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1992년 민자당 단배식 / 2011년 9월 퇴직 직원들과 함께
처음 쇳물 나올 당시 사진을 보면 내 표정만 좀 다르다.
난 당연히 쇳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철소를 부분적으로만 보는 직원들은 과연 이게 제대로 나올까 걱정도 했겠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당연히 나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부분적으로만 본 사람은 모른다. 사전에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안 나오겠나. 나는 사전준비 때 시끄럽다. 일단 한 다음 6개월 정도는 아무소리 안한다. 6개월쯤 되면 그때부터 다시 본다. 허점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포스코 주식이 하나도 없다. 그 좋은 자리 많이 차지했는데, 하려고 했으면 천하의 부자가 됐을 것이다. 주식을 가지려면 얼마든지 가졌을 것이다. 포항제철을 처음에 주식회사가 아닌 공사로 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 그래야 바로 얘기하고 제지할 것은 제지할 수 있지 않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각하, 엉뚱한 놈이 와서 엉뚱한 짓을 한다고 해도 다 보고가 어차피 될 것이고 제지하려고 하면 제지할 수 있다. 나 몰라라 하시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기간산업을 규제해 놓으면 나라 예산으로 뭐를 할 수 있나? 어차피 밖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데. 아무 규제가 없다는 것을 보고 유럽에서 돈을 빌려주고 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회사가 좌지우지되면 돈 안 빌려준다. 어차피 소문 다 난다.
120만톤 달성도 대통령께 보고한 것보다 6개월 일찍 했다. 박 대통령은 나에 관해서는 120% 믿어줬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뛰어다녔다. 경제기획원·상공부 일일이 돌아다니며 설명하면 대부분 안 된다고 했다. 한꺼번에 200만톤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한국에 120만톤, 350만톤, 550만톤 만들었다. 일본은 명치 40년 30만톤에서 시작해서 100년 걸려서 한 것이다.
철이라는 게 참 중요하다. 포항과 광양에 제철소가 두 개 떡하니 있다. 외국인들이 서울에 와서 경제에 대해 말할 때 포항과 광양제철소 얘기하면 깜짝 놀란다.
사우디와 중동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는데 만나서 포항과 광양을 얘기해준다. 내말 듣고 보고 난 뒤에 꼭 다시 나를 보겠다고 다시 오더라. 한 제철소에서도 하루 종일 끌려다닐 정도로 큰 규모를 보고 놀라는 거다. 너무 커서 좀 줄일 수 없느냐는 얘기도 한다.
선철이라는 게 있다. 예전에는 이걸로 다했는데, 이제는 석회석이나 망간 크롬 같은 것들을 삽입해서 강철로 변화시킨다. 강철 품질이 좋아야한다. 강철로 만드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포스코에서 나올 때 후배들에게 주원료가 철광석과 유연탄인데 자기 광산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게 참 어려운 일이지. 그러나 장래를 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꼭 있을 것이라고 본다.
세계 철강시장에 대한 상황 판단을 잘해야 한다. 부문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해야 한다. 전체적 경영전략은 세계 철강시장을 잘 봐야한다. 철수요 측면에서 미국·러시아·중국 그런 소비가 지속되는지, 아프리카·동남아 수요가 어떻게 변천하는지…. 이런 판단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2000만톤 유지 관리하면서 품질과 기술을 관리해야 할지, 아니면 1000만톤 더 늘려야 할지도 살피면서 세계 철강 판도를 잘 봐야 한다.
지휘자 책임이 크다. 평소 보고 받고 밥만 먹는 건 쉽다. 세계 판도에 대한 자기의 복안을 가지면서 보고 받아야 한다. 또 부지런해야 한다. 주저앉으면 마냥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지휘감독도 역시 포인트가 있다. 그걸 판단하지 못하면 어려운 거다. 밤새도록 공장 돌아다닐 것이냐. 무엇 무엇을 체크하면 될지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CEO는 중요도를 어떻게 파악해 어디를 짚어야 할지, 중점적으로 보는 것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최고경영자는 시간 있으면 외국에 나가서 보며 역사를 검토하고 애로사항이 뭔지도 보고 와야 한다. 나는 뭘 조심해야 할지 직접 보고 돌아와서 지시했다. 중요한 결정사항, 예를 들어 돈을 빌릴지 결정할 때는 직접 바로 가서 결정 내렸다. 앞으로 이렇게 해나갈 것이라고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명성 있는 경영자들은 믿어준다. 후진국이나 개도국, 전부 권력 영향 때문에 잘 안 되는 것이다.
박태준에게 중국은
중국과 경제협력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단독으로 하긴 어렵다. 구조 자체가 해외 의존적이다. 중국·일본과 협력해야 한다. 특히 중국과의 협력이 상당히 중요하다. 기업들도 중국과 협력하기 위해 뛰어다닐 때다. 물건 안 팔리면 중국은 한 건해도 크잖나. 홍콩 광둥성만 해도 옛날부터 큰 시장이었다. 중국 전체가 큰 시장이다.
가만히 앉아서 걱정하면 뭐하나. 마케팅부터 뛰고 자신부터 뛰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생산을 잘하지만 손실도 많다. 생산성을 높이고 기술과 자본이 뒷받침 제대로 해야 한다.
중국이라는 방대한 경제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어떻게 경제적으로 나가느냐 잘 파악해서 잘 활용해야 한다. 중국이 저렇게 뛰는데 우리에겐 얼마나 좋은 기회냐. 가장 가깝고 가장 잠재력도 있고. 중국이 저렇게 뛰어다닐 때 기회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움직임에 편승하지 못하면 안 되는데 굉장히 아쉽고 안타깝다. 중국이 날아가 버리면 다시는 그런 기회 안 온다.
현 정치에 대해서
2008년 7월 매일경제와 인터뷰 당시 모습. 이날 인터뷰가 언론사와의 사실상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애초 건강을 고려해 30분정도 짧게 진행하기로 했지만 박회장과 과거로의 여행은 2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마무리됐다.인터뷰는 기업인은 물론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뜨거운 강연이기도 했다.
국가원수가 알아서 해줘야 하는데, 지난 10년간 장사나 경제 얘기가 너무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에 굉장히 기대하는데 짧은 시간 내에 하기는 어려운 거다. 국민들의 기대는 큰데 효과가 그다지 없으니까. 내가 만약에 한다면 정상적으로 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하면서 뭔가 특수한 케이스를 만들어 중국과 확 협력해 크게 팔아먹을 것을 만들겠다. 그게 TV나 신문에 나오면 국민들이 ‘아,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평소 이공계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철소 만들 때 그분야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기술적으로 연구한 사람을 찾으려니까 정말 없었다. 그래서 이공계 무조건 뽑아서 신일본제철에 보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사람, 특히 이공계 양성해야 한다. 이공계 교육기관 늘려야하고 수준도 높여야 한다. 포스코는 재투자하고 시설 늘리고 했어도 돈이 남았다. 그래서 남은 돈을 교육기관에 투자했다. 기업이 만들어줘야 한다. 정부가 교육기관을 전부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을 봐라 MIT·하버드 같은 곳이 전부 그렇다. 미국 기업이 성공하면 교육기관을 만든다. 좋은 학교는 다 사립이다. 포스코가 돈 벌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익을 냈는지,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어떻게 교육에 투자했는지를 깊게 봐야 한다.
포스코 생산 세계 3위… 수익성도 독보적 43년만에 세계 철강 리더로
포스코 광양제철소
세계철강협회는 포스코가 지난 2010년에 354만톤의 철강을 생산해 신일본제철을 제치고 아르셀로미탈과 바오스틸에 이어 세계 3위의 철강회사가 됐다고 밝혔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인도의 타타스틸이나 미국 US스틸의 조강 능력은 포스코에 한참 뒤쳐지는 수준이다.
지난 1968년 포항 모래벌판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해 1973년에 처음으로 조강 생산을 시작했던 회사가 이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철강회사가 된 것이다. 포스코는 특히 오랫동안 세계 철강회사를 선도하던 US스틸과 미국 피츠버그에 합작회사를 설립해 운영할 정도로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여기엔 세계 어느 경쟁사보다 뛰어난 재무안전성이 큰 힘이 되고 있다. 1968년 16억원으로 출발한 포스코의 자산은 2011년 말 기준 78조원(IFRS 기준) 선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부채는 연간 매출액의 절반 정도이고 부채비율로도 82%선 (2010년 말 기준)에 머물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포스코가 시가총액 규모로 세계 철강회사 가운데 3위이며, 아시아 철강회사 가운데 가장 수익성이 높다고 소개하고 있다.
포스코는 특히 창사 이후 단 한 차례도 적자를 내지 않은 회사로도 유명하다. 이 회사는 포항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돼서 닥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나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어김없이 흑자를 냈다. 그만큼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연구개발에도 엄청난 투자를 해서 외국 기술을 들여다 쓰던 회사가 이제는 세계 철강업계를 선도할 정도로 기술력이 강해졌다.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 공법 상용화에 성공한 게 단적인 사례다.
포스코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연산 150만 톤 규모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를 2007년 5월 말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누구도 하지않던 세계 최초의 플랜트인데 포스코는 그해 9월 정상 조업도를 달성했다. 지난 100년간 이어오던 고로방식의 제철 프로세스를 단숨에 대체하는 신공법을 입증한 것이다.
뛰어난 재무안전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포스코는 이제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포스코는 현재 인도 마하라슈트라주와 중국 광동성에 각각 5만톤 규모, 멕시코 타마울리파스주에 50만톤 규모의 공장을 건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