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눈으로 고개를 들라는 변학도의 말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거절하는 춘향.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춘향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광경을 중계방송하던 아나운서들이 엉뚱하게 변학도 편을 들어 해설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어른한테 째려보는 거 보십시오. 춘향이는 가정교육이 필요합니다.”
순간 관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온다. 흔히 알고 있던 이야기를 뒤집어 해석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개그맨 최국(36)이다. 올해로 데뷔 10년차인 그는 최근 MBN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공화국의 '편파중계석' 코너와 스포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스포츠 스테이션M의 '나도 훈수다' 코너에서 활동 중이다. 10년 전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남희석 닮은꼴’로 불리는 데 그쳤지만 이제는 예리한 풍자와 독특한 아이디어로 자신만의 입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편파중계석' 연습에 한창이던 그를 지난 12월 14일 서울 필동 매경미디어그룹 MBN 연습실에서 만났다.
“어려서 춘향전을 읽었을 땐 변학도가 나쁜 놈이라고만 생각했죠. 커서 보니 변학도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더라고요(웃음). 뻔한 스토리와는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야 관객들이 빵 터지거든요.”
편파중계석은 말 그대로 어느 한쪽 편에서만 해석하는 '편파적인 중계'를 보여주는 코너다. 악인으로 비치던 등장인물 편에 서기 때문에 ‘권선징악’의 교과서적인 교훈이 아닌 현실에 있을 법한 ‘약육강식’ 이야기가 솔직하게 펼쳐져 묘한 통쾌함을 준다.
“현실에서는 잘사는 사람이 계속 잘살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공감 코드를 살리는 게 개그고요.”
그의 개그에는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마패를 꺼내며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는 이몽룡에게 마패 두 개를 꺼내 들며 “스펙 자랑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는가 하면 10명의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는 흥부에게 “강남구로 가면 양육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권하는 식이다.
최근 코미디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문제를 다룬 개그가 유행인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개그는 원래 풍자라고 생각한다”며 “옛날에 있었던 '동작그만'도 군대를 풍자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지금은 이렇듯 뼈 있는 개그로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그이지만 데뷔 초만 해도 그는 개그맨 선배인 남희석 성대모사만 하곤 했다.
“당시에는 솔직히 ‘입시 전략’으로 성대모사를 했죠. 하지만 데뷔 이후에는 말로 웃기고 싶은 바람이 더 커지더라고요. 개그맨이 계속 개그맨 따라하면서 웃기는 것도 좀 그렇고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양한 방송사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그는 ‘죄민수’로 유명한 개그맨 조원석 등과 함께 만든 개그 코너 '별을 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코너 '최국TV' 등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가슴앓이를 한 적도 많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상대방을 비하하는 대화가 오고가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는 나가지 않아 인지도를 높이기 힘들었고, 공들여 만든 개그가 새벽에 편성돼 인터넷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시청률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웃기는 데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후배들과 개그를 짜서 사람들을 웃기고 싶은 게 소박하지만 가장 큰 소망이다.
“10년을 하니 이제 코미디가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현장에서 단발적으로 터지는 웃음도 좋지만 페이소스와 여운이 있는 개그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