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도 교수가 서울대 발전기금 콘서트에서 인기가수 바비킴과 ‘사랑 그놈’을 함께 부르고 있다.
작년, 즉 2010년 12월 말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 몇을 만났다. 계속 이어지는 업무 관련한 송년회 일정 속에서 기적처럼 만든 사적인 자리였다. 대학 교수인 한 친구가 새로 책을 하나 냈다고 했다.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좀 있다고 쑥스러워 하면서 그 책을 건넸다.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후 과정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대한민국 출판계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책이 됐다. 이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아픈 청춘에서 행동하는 청춘으로
‘등록금은 오르고, 취업은 쉽지 않고, 학자금 대출이다 뭐다 해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빚쟁이가 되는 현실.’ 김난도 교수가 '20대, 돈보다 중요한 것'이란 책 중의 한 꼭지에서 20대 청춘이 돈과 관련해 처한 현실을 이렇게 요약했다.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20대 청춘을 지칭하는, 이제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단어가 있다. 바로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이다. 우석훈 교수가 사회운동가인 박권일 선생과 함께 집필해 2007년 발간한 같은 이름의 책에서 나온 용어이다. '88만원 세대' 책 표지에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쓰여 있다. 경제적인 문제점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정치적인 해결책을 직접 행동에 나서서 모색해야 한다는 결연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실제 젊은 청춘들은 2008년 촛불시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에 대거 거리로 나섰으나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청춘은 ‘20대 초반 대학 시절은 사회적으로는 어른 취급을 받지만 내면은 아직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치지 못한 아슬아슬한 경계의 시기이자, 입시준비로 유예됐던 사춘기의 성장기적 문제가 한 번에 터져 나오는 폭발의 시기’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지만 개인의 내면적인 고민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선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세게 조여지는 현실 속에서 청춘들은 따뜻함이 먼저 느껴지는 이 위로의 메시지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386세대가 88만원 세대를 만들었다고 우석훈 교수는 얘기한다. 그러면서 386세대가 20대에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을 현재의 청춘에게 촉구한다고 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88만원 세대라고 명명된 이들이 수용하기는 힘든 요구였다. 광장으로 나섰던 두 차례도 뚜렷한 목표나 중심점 없이 한풀이 한마당에 그쳐버렸다. 좌절을 겪은 암울함 속에서도 그들은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찾았다. 한편 같은 처지의 청춘들이 함께 위로를 나누며 격려할 수 있는 수단이 발견됐다. 바로 트위터를 필두로 한 소셜네트워크였다.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틀에서 빠져나와, 자신들만의 정보교환과 증폭의 통로를 만들었다. 디지털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그 새로운 통로가 오프라인에서도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 2011년 4월 선거를 통해 확실히 보여줬다. 책이나 언론을 통해서만 만나 볼 수 있었던 인사들과 직접 실시간으로 얘기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됐다. 개인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멘토’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며, ‘청춘의 멘토’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각광받는 인사들이 출현했다. 그 일련의 흐름은 지난 10월 서울시 보궐선거에서 정점을 이루며 폭발했다.
온라인과 소셜네트워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서울시장 선거 당시 5%에도 못 미치는 지지도를 보였던 박원순 시장이 안철수 교수의 후원을 받으며 이틀 만에 50% 이상의 지지도를 얻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제품으로 얘기하자면 ‘정치’라는 업종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제품이 다른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바로 선두로 뛰어오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안철수 교수도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가 정치를 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단 며칠 사이에 수년 동안 공을 들였던 기성 정치인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기존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에도 원인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어져 있던 경계선이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라는 말인데, 자신이 속한 방면에서만 활동하라는 얘기이다. 허나 최근엔 이런 구속적인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지도층 인사’, ‘존경하는 인물’과 같은 거리감이 없는 ‘멘토’형 인사에 청춘이 열광한다. 멘토라는 말 자체가 개인적, 일상적인 친밀함을 바탕에 둔 표현이다. 일방적으로 말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들어주고 의견을 교환하는 사람을 말한다. 소셜네트워크가 생겨 멘토로서 자리 잡을 여건이 생겼다. 그리고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만이 아니라 안철수 교수는 ‘시골의사’ 박경철과 전국을 돌며 ‘청춘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찾아가는 강연을 했다. 온라인, 소셜네트워크 상의 의사 전달은 불충분하다. 모든 것이 결합되어야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서울시 보궐선거가 이전 선거와 달랐던 점을 또 하나 꼽으라면 다수의 연예인을 필두로 한 유명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활동과 의사를 보일 수 있는 통로가 생겼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무조건적인 중립을 강요하던 기존 언론의 틀이 소셜네트워크라는 또 다른 소통 통로를 만나면서 느슨해졌다. 제한된 영역에서 빠져 나온 연예인들이 대거 멘토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멘토 열풍을 불러일으킨 사회적 현상 중 하나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오디션과 인생 이야기
‘멘토’라는 단어를 올해 최고의 단어로 만든 프로그램 "위대한탄생"
‘멘토’를 올해 최고의 단어로 만든 프로그램이 오디션 '위대한 탄생'이었다. 처음부터 멘토-멘티 체제를 확실하게 했고, 음악이라는 한정된 영역을 벗어나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진정한 멘토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우리 사회와 음악계의 비주류들을 포용하며 키운 김태원은 ‘김태원과 외인구단’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어록’까지 나오면서 많은 청춘들의 멘토로 우뚝 섰다. 2년 전 '슈퍼스타K'로 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올해 만개한 데는 바로 멘토를 중심으로 한 인간 드라마가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오디션은 근래 십여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던 한 시장에 폭풍을 몰고 왔다.
2011년 최고의 히트상품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꼬꼬면’이다. 오디션 형식의 요리 경연대회에 요리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50대 남성 코미디언이 만든 새로운 라면 요리라는 배경이 없이 그런 성공이 가능했을까? 올해의 오디션은 예전과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과 자기만족을 위해 기꺼이 무대에 오르는 비주류나 아마추어를 위한 행사가 됐다. 어느 순간 오디션이란 형식을 벗어나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을 허물어뜨린다.
2011년 광고 노래 중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불린 것을 꼽으면 바로 우루사의 ‘간 때문이야’일 것이다. 이 광고로 차두리는 대한민국 광고대상에서 ‘최고의 광고모델상’을 받았다. 실제 이 광고가 성공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광고 모델인 차두리의 건강하면서도 풋풋한 이미지, 바로 모델로서는 아마추어 같은 모습이었다. 차두리와 올해의 광고모델상에서 각축을 벌인 이들은 '남자의 자격'의 박칼린과 '슈퍼스타K' 출신의 허각이었다고 한다. 둘 다 기존의 프로페셔널 모델들과는 다른 아마추어 같은 신선함과 어색함이 주요 매력 포인트였다.
기존의 틀을 깨라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로 얼싸안고 있다.
‘폐인’이란 말이 오랜만에 다시 등장했다. 바로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줄여서 ‘나꼼수’에 빠져버린 ‘나꼼수 폐인’들이 양산되면서 다시 폐인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거의 망한 인터넷 패러디 신문의 발행인, 끈 떨어진 정치인, 학교와 방송에서 쫓겨난 전직 교수, 소송에 시달리는 중소 잡지의 기자’와 같은 사회 통념상 루저(Loser)들이 만든 방송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주말 내내 언제 팟캐스트로 뜰까 시시각각 확인하고, 자발적으로 ‘3만 댓글 올리기 운동’을 펼치며 빨리 업데이트 하라는 압력을 주기도 한다. 이들은 실제 10월 서울시장 선거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줬다. 야권 단일후보 통합선거를 앞두고 두 명의 야권 예비후보를 마이크 앞에 세웠을 뿐만 아니라, 집권당의 당대표까지도 자청해 출연했다. 서울시장 선거의 막판 쟁점으로 떠오른 두 가지 사안들은 모두 나꼼수 방송에서 처음 알려진 것들이었다.
‘끈 떨어진’ 전직 국회의원은 선거본부장이 되어, 본인의 표현으로 당내에서 질시어린 ‘왕따’를 당할 정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팟캐스트 방송에서 벗어나 오프라인 콘서트까지 열풍은 이어졌다. 어디서 열리는가를 떠나 이들의 콘서트는 몇 십분 만에 모두 예매가 완료된다. 티셔츠 등 관련 상품은 이미 컬렉터의 아이템이 됐다.
'뉴욕타임즈' 아시아판에서까지 1면 머리기사와 함께 2면에 걸쳐서 나꼼수 열풍을 다룰 정도였다.
이런 나꼼수에 대해 기성 언론들은 자신들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대며 비판한다. ‘영향력이 있는 만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역사와 소설, 개그와 평론의 벽이 허물어졌다’, ‘검증 안 된 음모론 남발’과 같은 비판은 시기어린 질투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리고 부메랑으로 기성 언론에게 역풍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
모름지기 우리가 ‘언론’ 혹은 ‘방송’이라고 생각했던 틀 밖에서 나꼼수가 태어났고 존재한단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들에게 기존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틀에서 벗어났다고 소리치는 것 자체가 바로 ‘꼰대질’이다. 그리고 ‘부러우면 너희도 만들어’와 같은 조롱만 들을 뿐이다.
지난 2009년 팀 쿡 애플 CEO와 고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오른쪽)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던 주의 나꼼수 방송 마지막 멘트는 “잡스, 졸라 땡큐”였다. 나꼼수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방송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인물에 대한 나꼼수 스타일의 감사 인사였다.
잡스가 죽기 직전 그의 뒤를 이어 애플의 CEO가 된 팀 쿡이 아이폰4S를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세상에 내놓았다. 세간의 반응은 아주 차가웠다. 잡스식 프레젠테이션에 빠진 사람들에게 팀 쿡의 발표는 어색했다. 획기적인 아이폰5를 기대했는데, 기존의 제품에 ‘시리(Siri)’라고 이름 붙인 음성인식 기능만을 첨가한 개정판이 나왔다. 경쟁업체의 기술자들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은 시리와 대화하며 노는 데 푹 빠졌고, 아이폰4S는 아이폰 판매 기록을 계속 갱신하고 있다.
90년대 말 삼성전자의 핸드폰이 미국 시장에 발을 붙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음성인식 기술이었다. 당시 ‘이름 부르기 놀이(Name game)’란 경쾌한 노래와 함께 광고도 꽤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도 음성인식 기능만을 가지고 했던 핸드폰 광고도 있었다. 필자도 그 음성인식 기능을 다른 친구들이 보고 놀랄 정도로 즐겨 썼다.
그런데 음성인식 기능의 인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바로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 관계가 아닌 기술의 관점에서만 생성되고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제품도 수익 집단이나 특정한 기능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고객과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의 시작은 듣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어 있는가? 실시간으로 경청하고 있는가? 이야기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는가? 우리 기업이나 제품은 고객에게 위안이나 흥미를 제공하고 있는가? 고객이 나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어떤 부분에서 또 내가 멘토로서 기능하고 있는가? 광고 모델이 지나치게 프로의 티를 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와 대화를 나눈 고객이 취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고객과 대화를 통해 우리 내부와 제품은 무엇이 바뀌었는가? 멘토는 함께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함께 행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