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 가격만 수억원을 호가하는 럭셔리카들이 잇달아 출시되면서 브랜드 간 자존심 경쟁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당 4억원대를 넘나드는 럭셔리 클래식카 부문에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두 브랜드가 격돌하고 있어 주목된다. 바로 세계 3대 명차로 꼽히는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다. 두 브랜드는 사실 영국에서 태어난 동향친구다. 벤틀리는 맨체스터 인근 크루공장에서 생산되며, 롤스로이스는 클래식카 페스티벌로 유명한 굿우드에서 전량 생산된다. 이런 연유로 두 브랜드는 현재 영국 왕실의 의전차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두 브랜드의 진짜 주인은 독일 기업들이다. 한때 롤스로이스가 벤틀리를 인수하면서 한집안 식구이기도 했지만 지난 1998년 모두 독일 기업들 소유(벤틀리는 폭스바겐그룹, 롤스로이스는 BMW그룹 계열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는 여전히 세계 3대 명차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화려하고 기품 있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며, 장인들의 손을 통해 수작업으로 생산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어서다. 럭셔리 클래식카 시장을 놓고 화려한 경쟁을 펼치는 두 브랜드를 살펴봤다.
화려한 우아함 vs 격조 있는 품격
롤스로이스 콰트 SWB
롤스로이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환희의 여신상(The spirit of Ecstasy)’이다. 전면부 후드 그릴 위에서 도로 위로 금세 날아갈 것 같은 이 심벌은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롤스로이스의 상징으로 전 세계 부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벤틀리 역시 자사의 브랜드를 상징하는 ‘B’와 독수리의 날개를 조합시킨 엠블럼을 10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다. ‘벤틀리윙’으로 불리는 이 엠블럼은 경쟁 업체들이 유사한 엠블럼을 사용할 정도로 높은 지명도를 자랑한다. 이처럼 회사를 상징하는 엠블럼 하나만으로도 경쟁 업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는 주력 모델의 스타일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벤틀리는 브랜드만의 전통성인 물방울 헤드라이트 디자인과 부드러운 느낌의 라디에이터그릴을 사용해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국내 주력 모델인 플라잉스퍼는 이 같은 벤틀리만의 고유 디자인을 살리면서도 역동적이고 중후한 면을 갖고 있다.
실내 인테리어 역시 마찬가지다. 플래그십 모델인 뮬산은 우드그레인을 사용해 클래식해 보이기도 하지만, 컨티넨탈 시리즈는 가죽과 카본을 사용해 화려함을 강조한다.
반면 롤스로이스는 초기의 디자인이 여전히 그대로 사용될 정도로 전통성을 자랑한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전면 라디에이터 그릴은 그야말로 이 차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우드그레인 위주로 제작되는 실내 인테리어는 1930년대 영국 빈티지카의 스타일을 제대로 뽐내준다. 또한 롤스로이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된 코치도어(뒷좌석이 문이 트렁크 쪽으로 열리는 방식, 수어사이드 도어라고도 불림)는 이 차의 품격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폭발적인 주행 성능 vs 흔들리지 않은 안락함
실내 편의사양 및 인테리어 역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두 브랜드 모두 영국 공장에서 장인들의 손에 의해 수작업을 거쳐 완성된다는 점에선 같지만, 브랜드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벤틀리는 운전자 중심의 설계로 인해 편의사양들의 대부분 운전석 인근에 집중돼 있다. 물론 뒷좌석 탑승자를 위한 편의사양도 경쟁자인 롤스로이스에 비해 뒤처지지 않으나 운전자를 위한 퍼포먼스 위주의 기능이 대부분이다. 실제 벤틀리 플라잉스퍼 스피드 모델은 경쟁차종인 롤스로이스 고스트에 비해 마력수가 살짝 부족하고 제로백도 조금 늦지만 최고속도는 훨씬 높다. VIP들이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즐기는 이들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달리기 성능이 강조됐기 때문이다.
반면 롤스로이스는 달리기 성능보다는 안락함에 집중했다. 마력과 변속기의 성능이 뛰어남에도 롤스로이스는 최고 속도를 250km/h로 제한했다. 그 이상의 속도는 뒷좌석 탑승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에어서스펜션이 매우 민감해 뒷좌석 탑승자가 위치를 바꿀 경우에도 무게 변화를 감지할 정도다. 또한 뒷좌석 VIP들을 중시하는 설계로 인해 운전자를 거치지 않고 실내 편의사양들을 제어할 수 있다. 또한 코치도어는 뒷좌석 탑승자에게 보다 깊은 안락감을 제공한다.
오너드리븐 vs 쇼퍼드리븐
Bentley Mulsanne
같은 럭셔리카 시장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두 브랜드가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목표로 하는 고객층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 제일의 부호들이 타는 차란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나 벤틀리는 오너드리븐, 롤스로이스는 쇼퍼드리븐이 주요 타깃이다. 다시 말해 벤틀리는 직접 운전하기 좋아하는 VIP들을 위해 설계됐으며, 롤스로이스는 뒷좌석에 타는 VIP를 위한 자동차인 셈이다. 그러나 설립 초창기였던 1910년대에는 플래그십 세단만을 만드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두 브랜드 모두 뒷좌석 VIP를 위한 차량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쟁관계에 있던 두 회사가 서로 다른 마케팅에 나서게 된 데에는 60여 년간 한집안 식구로 보낸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36년 롤스로이스가 벤틀리를 인수한 뒤 고객층이 겹치면서 벤틀리를 프라이빗카로 아이덴티티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후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의 식객으로 지내던 60여 년 동안 럭셔리카 시장에서 ‘롤스로이스의 아류작’이란 평가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벤틀리는 오히려 설움을 약으로 삼았다. 폭스바겐에 인수된 후 럭셔리와 스피드라는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브랜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폭스바겐AG vs BMW그룹
RollsRoyce Phamton
이처럼 서로의 영역에서 확실하게 고객층을 다져왔던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는 최근 각자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벤틀리가 쇼퍼드리븐 고객층을 향한 뮬산느를 출시한 데 이어 롤스로이스 역시 오너드리븐 고객층을 노린 고스트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두 업체의 변화에 대해 “럭셔리카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본격적인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제는 다양한 고객의 요구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라인업을 갖춰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도 두 브랜드의 경쟁은 그야말로 치열하다. 먼저 진출한 벤틀리가 80여 대 이상을 팔아 치우며 국내 럭셔리카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롤스로이스 역시 출시 동시에 돌풍을 일으키며 부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수입차 업계의 모 임원은 “벤츠, 아우디, BMW의 플래그십 세단을 탔지만, 뭔가 특별한 자동차를 원하던 이들이 벤틀리와 롤스로이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국내 럭셔리카 시장 역시 급성장하고 있다”며 “특히 기업체 오너들이 프라이빗카로는 벤틀리를, 회사 의전차량으로는 롤스로이스를 선호하고 있어 두 업체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