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서 불모지였던 땅을 개간한다. 정리된 땅을 경매에 부쳐 높은 가격을 써낸 입찰자에게 기한을 정해 빌려준다. 땅을 받은 사람은 그곳에 길을 건설해 사람들과 차량이 소통하도록 하고 이용료를 받아 이익을 얻는다.’
주파수 경매를 비유적으로 요약하면 이와 같다. 여기서 땅은 주파수를 의미하고 입찰자는 이동통신사, 길은 이통사가 구축하는 네트워크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과 차량은 음성과 데이터 등 휴대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지난 8월17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주파수 경매에서 SK텔레콤은 1.8GHz 대역 20Mhz폭, KT는 800Mhz대역 1GHz폭, LG유플러스는 2.1GHz 대역 20Mhz폭을 확보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3개 주파수 대역을 경매에 매물로 내놨지만 사실상 경쟁이 붙은 경매는 1.8Ghz 대역뿐이었다. 1.8GHz 대역을 두고 SK텔레콤과 KT는 82번이나 번갈아 가며 가격을 높였다. 결국 KT가 두 손 들고 경매를 포기해 최종적으로 SK텔레콤이 9950억원에 낙찰을 받았다.
1.8Ghz의 최초 경쟁가격 4455억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낙찰됐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사상 최초로 벌어진 주파수 경매에서 SK텔레콤과 KT 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1.8Ghz 대역의 주파수를 포기한 KT는 800Mhz 대역을 2610억원에 낙찰 받았고 2.1GHz 대역은 LG유플러스가 4455억원에 가져갔다.
수천억대 주파수, 도대체 뭐기에?
주파수가 무엇이기에 이동통신사들이 수천억원의 자금을 쏟아 붓는 것일까. 주파수는 음성과 데이터가 이동하는 통로와 같은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계에는 여러 대역의 주파수가 존재한다. 그 주파수 중 정해진 구역에 통신사들이 통신설비를 구축해 음성과 데이터가 소통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방송사의 경우 방송장비를 구축해 방송을 송출한다. 주파수는 국가가 세계 표준을 고려해 용도를 정해 분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파법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가 특정한 주파수 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휴대폰은 300MHz~3GHz 대역. 위성통신은 30~300GHz, 아마추어 무선은 300KHz~30MHz 대역을 사용하는 식이다. 정부는 이렇게 용도를 정한 후 시장 상황, 가치 등을 고려해 사업자들에게 주파수를 할당한다. 이때도 법에 따라 주파수를 이용하는 대가를 결정한다. 주파수를 이용해 방송하는 지상파 방송사 등의 경우 돈을 내지 않고 주파수를 받아서 쓴다. 반면 이동통신사는 대역, 대역폭, 이용기한 등에 따라 대가를 지불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통사의 사업계획 등을 평가해 주파수를 할당해주고 일정한 대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경매를 도입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연말 와이브로용 2.5GHz 주파수도 경매를 통해 통신사에 할당하는 등 앞으로는 기본적으로 경매를 통해 주파수를 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해외에서도 대부분 주파수 경매를 통해 주파수를 나눠주고 있다. 미국·독일·스위스·영국·홍콩·벨기에 등이 모두 주파수 경매를 받아들이고 있다.
주파수는 높고 낮음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 주파수가 높을수록 전파가 직진하려는 성질이 강해 대량의 정보 전송이 가능하므로 고정 통신, 초고속 통신 등에 적합하다. 낮은 주파수는 건물 등 장애물을 피해 돌아가는 성질(회절성)이 강하지만 전송 가능한 정보량이 적어 해상 항공통신 등 장거리 통신에 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통사, 포기할 수 없는 사업 밑천
지난 4월 SK텔레콤 사옥에서 열린 LTE 시연회에서 관계자들이 고화질 HD 영상통화와 3D 영상 스트리밍 등을 시연하고 있다.
이통사들에게 주파수는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통신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필수요건이 주파수 확보다. 주파수가 없다면 휴대폰 통화가 불가능하다. 특히 최근 휴대폰 데이터 이용량이 폭증하면서 주파수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보물이 됐다. 주파수(길)에 데이터(차)가 너무 많아 정체가 빚어진다면 최악의 상황에는 통신 두절 사태까지 나타날 수 있다. 이미 스마트폰 이용자들은 데이터 끊김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시스코는 모바일 데이터의 트래픽이 2010년 부터 오는 2015년 사이에 연평균 92%씩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유럽의 컨설팅그룹 IDATE는 오는 2020년에 2010년보다 트래픽이 33배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에서도 스마트폰 가입자가 2000만 명에 육박하면서 데이터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스마트 기기가 확산되고 활용하는 서비스도 대용량 데이터가 필요한 동영상, 방송 등으로 확장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여기에 앞으로 HD급 고화질 동영상, 클라우드 컴퓨팅 등이 확산되면서 데이터량은 훨씬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 SK텔레콤의 경우 지난 2009년 10월 128TB(테라바이트)에 불과했던 월간 데이터량이 지난 2월에는 3411TB로 27배나 늘어났다. KT와 LG유플러스도 같은 기간 각각 19배, 7.5배 증가했다.
이통사들이 차세대 통신방식 4세대(4G) LTE(롱텀에볼루션)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를 없앤 것도 이런 문제를 막겠다는 생각에서다.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매김으로써 데이터 과소비를 막겠다는 의도다. 이통사들이 주파수 확보를 지상과제로 설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길을 넓혀야 소통량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사가 주파수를 포기한다면 그 주파수를 경쟁사가 갖게 된다는 점이 이통사들을 자극하고 있다. 주파수는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이다. 통신사들은 일단 주파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갖고 있는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데이터 트래픽 폭증에 대한 대응으로 LTE 네트워크 조기 구축, 와이파이와 펨토셀 등 우회망 확보, 클라우드 기술 활용 등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각 이통사별 주파수 전쟁, 소비자의 선택은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국내 이통 3사는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각기 할당 받은 주파수를 활용해 통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통사들은 각사의 전략에 맞춰 서로 다른 대역에서 1~4세대 통신서비스를 하고 있다.
SK텔레콤은 2세대 통신 서비스를 800MHz 대역을 활용해 진행해 왔다. 이와 비교해 KT와 LG유플러스는 1.8GHz 대역에서 2G 서비스를 제공했다. 3G 통신의 경우 SK텔레콤과 KT는 모두 2.1GHz 대역에서 각각 60MHz와 40MHz 폭을 활용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현재 이통 3사가 활발하게 구축하고 있는 4G LTE 서비스에서는 구도가 더 복잡하다.
현재 LTE 서비스를 시작한 SK텔레콤은 800MHz 대역에서 10MHz 대역폭을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 2G 가입자들이 빠져나가면 800MHz 대역을 LTE에 추가하고 경매를 통해 받은 1.8GHz 대역도 LTE용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SK텔레콤과 함께 LTE를 시작한 LG유플러스는 800MHz 대역에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역시 경매로 획득한 2.1GHz에도 LTE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KT의 경우 이번 경매를 통해 받게 된 800Mhz 대역의 10MHz 구간과 얼마 전 할당받은 900Mhz 대역의 20Mhz 구간 등을 활용해서 LTE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통사마다 활용하는 대역과 기술방식이 다른 만큼 통신서비스에도 차이가 있다. SK텔레콤과 KT는 2G, 3G, 4G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고 있지만 4G에는 기술방식의 차이가 있다. SK텔레콤은 LTE를 택했고 KT는 LTE와 함께 4세대 기술인 와이브로 중심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 KT는 11월 LTE를 시작할 계획이다.
데이터 전송속도는 SK텔레콤의 LTE가 약간 빠르지만 전국망을 갖췄다는 점에서는 KT의 와이브로가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방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KT 와이브로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SK텔레콤은 2013년에 LTE 전국망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SK텔레콤, KT와 달리 LG유플러스는 3G 서비스를 하지 않고 있다. 2G를 진화시킨 기술을 활용해 3G와 유사한 속도를 구현했다. LG유플러스 통신서비스의 경우 기술방식과 주파수 대역이 해외 사업자들과 달라 해외 로밍에서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음성 통화의 경우 대부분 해외에서 자동로밍 되지만 데이터 로밍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LG유플러스는 이런 문제를 LTE를 통해 해소할 계획이다. LTE서비스는 2012년 7월 전국망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역폭은 SK텔레콤, LTE 주파수는 LG유플러스
사상 첫 주파수 경매 이후 승패에 관한 분석이 분분하다. 여전히 주파수 총량으로는 SK텔레콤이 가장 많은 양을 확보하고 있다. SK텔레콤은 기존 갖고 있던 주파수 폭 130MHz에 1.8GHz대역의 20MHz폭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150MHz를 보유하게 됐다. KT는 120MHz폭에서 800MHz 대역 10MHz폭을 확보해 130MHz폭을, LG유플러스 최종적으로 60MHz폭을 갖게 됐다.
일단 많은 주파수 대역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빠른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길이 넓으면 더 많은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하지만 LTE용 주파수 총량에 있어서는 LG유플러스가 가장 앞서 있다. LG유플러스는 총 40MHz 폭의 LTE 주파수를 갖게 됐고 SK텔레콤과 KT는 각각 30MHz를 확보하고 있다. 때문에 LG유플러스는 SK텔레콤보다 2배 넓은 대역을 이용한 LTE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SK텔레콤보다 2배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반면 회절성이 높아 멀리까지 다다르는 저대역 주파수(700~900MHz)는 SK텔레콤과 KT가 각각 30MHz씩 같은 양을 갖고 있다.
LG유플러스는 20MHz만 보유하고 있다. 낮은 주파수가 더 멀리 가기 때문에 통신 장비를 더 적게 구축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700~900MHz 저대역 주파수가 ‘황금주파수’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 세계 유력 통신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이 유리한 대역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SK텔레콤이 확보한 1.8GHz 대역은 전 세계적으로 LTE용으로 개발되고 있는 대역이기 때문에 국내외 제조사의 LTE용 단말기를 수급하는 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주파수 경매 결과만으로 이통 3사의 경쟁구도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통신사에게 주파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지만 그 밖의 요인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동섭 SK증권 애널리스트는 “통신 시장의 경쟁구도는 주파수뿐만 아니라 트래픽 분산과 수용, 단말기 라인업, 차세대 네트워크 구축, 콘텐츠 및 부가서비스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