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이 키스를 한다. 화면의 볼링공이 혀의 움직임에 따라 굴러가는 방향이 바뀐다. 혀가 게임 컨트롤러 역할을 하는 것.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디자이너 남혜연 씨(32) 머리에서 나왔다. ‘키스 컨트롤러’는 미국 장치부문 예비특허를 취득했다. 남씨는 지난 8월 미국 스미소니안 국립미술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7명의 작가 중 한 명으로 비디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남 씨는 “디자이너가 자라온 환경이 그 디자이너의 작업을 설명해준다”며 “정(情), 사랑, 그리고 화합으로 나타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정서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이라는 국가브랜드를 향상시킬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남씨의 따뜻한 작품관은 '허거블 네이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공원의 나무에 음성편지를 녹음해 놓은 다음, 나무를 안으면 음성편지가 재생된다.
박제성 씨(33)는 전쟁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의 상황을 영상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 'They are falling'은 연말의 낭만적인 분위기와 전쟁의 위험이 공존하는 한국의 상황을 무기들이 눈(雪) 결정을 이루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는 “전쟁의 위기가 눈 녹듯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고 말했다.
남씨와 박씨는 올해 지식경제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 매일경제신문이 선정한 ‘차세대 디자인 리더’들이다. 이 사업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스타 디자이너’ 육성을 위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우수 디자이너를 선정·지원하는 국가지원 프로그램으로 지난 2004년에 시작돼 지금까지 191명을 발굴했다. 올해는 남혜연 씨, 박제성 씨를 포함해 총 15명의 차세대 디자인 리더를 선정했다.
1.우기하 대표작품 [Phone on Board]<br>2.주홍규 대표작품 [라운지체어 DYAD]<br>3.최희선 대표작품
‘차세대 디자인 리더’들은 보통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생활에서도 디자인 요소를 끄집어낸다. 우기하 씨(32)는 벽시계에 들어가는 건전지도 단순히 부피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시계 디자인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벽시계 뒷면에만 위치하던 건전지를 전면으로 내세워 시침, 분침으로 활용했다. 우 씨가 디자인한 벽시계 'Front & Back'의 디자인은 1시간에 1바퀴 도는 큰 원판과 12시간에 1바퀴 도는 작은 원판, 그리고 각각의 원판 위에 위치한 건전지 두 개가 전부다. 요소의 줄임을 통해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실현한 것. 다른 작품 'Phone on Board'에서는 우씨의 관찰력이 돋보인다. 가정용 전화기 세트의 편의성을 개선한 이 작품은 전화 도중 메모하기 쉽도록 전화기 세트를 아예 화이트보드로 만들었다. 간단한 내용을 적을 수 있고 쉽게 지울 수도 있다. 또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화이트보드는 지갑이나 열쇠를 담을 수 있는 선반으로 활용될 수 있다. 'Phone on Board'는 컬럼비아 픽처스로부터 2013년 개봉 예정인 영화 '맨인블랙3'에 소품 협찬 문의를 받기도 했다.
박지원 씨(26)는 보도블록을 이용해 서체를 만들었다. 마치 별자리처럼 보도블록을 이으면 어떤 글씨 모양이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박씨가 만든 서체 디자인은 총 8가지다. 보도블록 각각의 모양과 배열이 다르기 때문에 이들 보도블록을 이어서 만드는 서체도 다양하다. 박씨는 “외국에서는 서울처럼 보도블록 형태가 다양하지 않다”며 “서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보도블록 형태와 패턴을 이용해 서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보도블록이 서울의 문화적 특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문화적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세계 3대 디자인상인 iF와 레드닷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수상했다. 박씨는 “사람과 사람을, 사회와 그 구성원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디자인”이라며 “서체도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성문 씨(34)는 차(茶) 거름망이 뜨거운 물에 잠기는 모습을 보며 잠수부원을 연상했다. 차 애호가라면 매일같이 접하는 차 거름망도 디자인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그래서 만든 것이 '티 다이버(Tea Diver)'다. 잠수부원 모양의 차 거름망이 뜨거운 물에 잠기는 모습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1.윤성문 대표작품 [티 다이버(Tea Diver]<br>2.성정기 대표작품. 보지 않아도 손으로 만져 구분할 수 있는 샴푸·린스 용기.
이 작품은 파리에서 열리는 인테리어 박람회인 ‘메종 오브제’ 행사에서 미리 준비한 물량이 모두 동날 정도로 창의적이고 실용성 높은 디자인으로 호평 받았다.
그의 상상력은 티백에도 미쳤다. 윤씨는 티백이 실로 연결돼 컵 위에 있는 종이로 고정돼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낚시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서 종이인형이 컵에 걸터앉아 티백을 물에 담궈 낚시하는 모습의 티 피싱(Tea Fishing)을 디자인했다. 이 작품은 컵 소유주마다 종이인형의 모양을 달리 함을 통해 컵의 소유주를 구분해주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성정기 씨(38)도 무심코 넘겨 버리기 쉬운 일상의 작은 실수에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이끌어냈다. LG생활건강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샴푸 용기 디자인은 눈을 감고 머리를 감다가 샴푸와 린스를 구별하지 못해 실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보지 않아도 손으로 느껴 구분할 수 있도록 샴푸와 린스 용기에 다른 형태의 홈을 넣었다. 이 작품은 독일 레드닷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성씨의 다른 작품 '이스틱(e-stick)'은 공원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지켜보다 아이디어를 얻었다.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이 작품은 지팡이에 휴대전화나 내비게이션 등 정보기기를 결합시켰다. 성씨는 국내 디자이너 최초로 세계적인 미국 디자인 회사 IDEO에 입사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디자인업체 취직을 희망하는 예비 디자이너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든든한 선배 디자이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박사 과정에 진학 예정인 최희선 씨(39)는 한강 주변 조경 사업이 활성화되기 전인 7년 전에 조경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최씨는 “홍수 때 물 흐름을 방해한다며 나무도 심지 못하게 해 7년 전 한강 주변은 버려진 땅과 같았다”며 “관리사무소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해 인공섬, 문화시설 등을 갖출 것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강 주변에 문화시설을 만들고 조경을 강화하자는 내용의 논문 ‘도시 수변(水邊)의 자연친화적 공간조성에 관한 환경디자인 모형 사례연구’로 주목 받았다. 최씨의 지론은 ‘디자인 논문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최근에는 통일을 대비해 북한 디자인 연구도 시작했다.
3.박지원 대표작품<br>4.박윤녕 대표작품<br>5.안지용 대표작품. 도시 내부의 버려진 공간을 활용한 자전거 거치대.
건축 디자이너 안지용 씨(38)는 도시 내부의 작은 버려진 공간들을 주목했다. 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자전거 거치대를 만든 것. 기존 대규모 자전거 거치대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안씨는 도시디자인이 숟가락 길이에서부터 정의될 수 있다는 독특한 디자인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숟가락이 길면 식탁의 폭도 달라지고 방의 너비에 영향을 주며, 나아가 건물의 규격이 달라져 도시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며 “건축 디자인의 범위는 비단 ‘건물’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디자인 컨설턴트 박윤녕 씨(29)는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문제 해결사’로 불린다. 그의 대표작품은 다국적회사인 유니레버의 새로운 아이콘을 찾는 작업 <Project Iconic>이다. 그는 매번 다른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상황, 물건 등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따로 모으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재활용을 통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graphics facilitation’영역을 개척하고자 한다. graphics facilitation이란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 다양한 지적 수준과 스타일을 가진 대중들과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론을 말한다. 그는 세계 최고 디자인 스쿨로 불리는 영국 왕립예술학교(RCA)에서 Visiting Tutor로 학생들을 지도한 경력도 있다.
가구 디자이너 주홍규 씨(31)는 '라운지체어 DYAD'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고주파 전력으로 성형된 두 장의 합판을 엇갈리게 끼워서 만들어진다. 두 장의 합판을 조립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제품의 생산, 적재, 유통이 간편하다.
'라운지체어 DYAD'는 세계적인 가구 박람회인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 2009년에 전시됐다. 주씨는 가을, 겨울 동안 볼 수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옷걸이 스탠드 ‘코트 스탠드 FW’도 만들었다.
[용환진 / 매일경제 기업경영팀 기자 techmask@mk.co.kr│사진 =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