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8일 삼성 서초사옥에서는 수요사장단회의가 열렸다. 5일 전인 3일 사장단 인사 후 가진 첫 회의였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재한 이날 회의에는 새로 임명된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을 비롯해 신임 사장들이 대부분 참석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불참했다. 이날 사장단회의에서는 진형준 홍익대 불문과 교수가 ‘다원주의와 창의성, 그리고 새로운 글로벌 리더십-상상력 혁명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진 교수의 도움으로 이날 강연한 내용의 원문을 싣는다. 문맥을 일부 수정하고 지면 관계상 일부 내용이 빠졌음을 미리 밝힌다. '편집자 주'
‘서유기’의 심장법사와 손오공
오늘 사장님들 앞에서 아주 케케묵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서유기'입니다.
<서유기>에는 여러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딱 한 명을 주인공으로 꼽으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대개 손오공을 꼽습니다. 그런데 '서유기'라는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서유기'는 삼장법사가 제자들을 데리고 서역으로 불경을 찾아가는 이야기지요. 그러니 주인공은 분명 삼장법사입니다. 그런데 왜 손오공이 주인공처럼 여겨지게 된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우리가 손오공이 지닌 가치를 중시하는 세상을 아주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 손오공이 하는 일이나 성격이 삼장법사가 하는 일이나 성격에 비해 화려하기 때문입니다.
손오공은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반면 삼장법사는 아주 어리석고 무능합니다. 서역으로 행하는 여정에서 만난 모든 역경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손오공의 능력입니다. 반면 삼장법사는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변장한 괴물에게 여의봉을 내리치는 손오공을 꾸짖기까지 하니 정말 복장이 터질 노릇입니다.
하지만 삼장법사에게는 항심(恒心)이 있습니다. 그 항심은 멀리 보는 비전이기도 합니다. 괴물을 물리친 손오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안주하려 합니다. 스님에게 이제 그만 가자고 떼를 쓰기도 하고 스님에게서 벗어나려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손오공을 제어해 여정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은 삼장법사의 항심이며 비전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보자면 삼장법사건 손오공이건 결함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삼장법사요? 뜻은 고결하지만 정말 무능합니다. 삼장법사 혼자 서역으로 향했다면 아마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오공은 어떻습니까. 능력 있고 똑똑합니다.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눈앞의 일만 처리할 뿐이지요. 아마 손오공 혼자였더라면 애당초 서역으로 갈 생각조차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 합쳐지니 뜻을 이룹니다. 서유기의 결말을 보면 둘이 함께 성불을 합니다. 각각의 개성을 지닌 둘이 하나가 되어 각자 지닌 능력과 결함을 넘어서는, 훨씬 뛰어난 성과를 거둔 놀라운 예입니다. 그게 바로 시너지 효과입니다.
'서유기'에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손오공과 삼장법사가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질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극단입니다. 도저히 함께하기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서유기'는 최대의 시너지 효과는 비슷한 것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멀리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온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서유기'가 보여주는 그러한 정신이 바로 진정한 다원주의의 정신입니다.
다원주의의 뿌리는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
현대는 상상력과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대면서 동시에 다원주의를 중시하는 시대입니다. 다원주의의 뿌리는 일원론일까요, 이원론일까요?
사람들이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본다면 일원론과 이원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는 이원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아니면 일원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원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얼핏 보면 맞는 생각인 것 같지요. 일원론은 이 세상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통합적 원칙으로 설명하려는 태도고 이원론은 세상을 더 세분화해 설명하는 세련된 인식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원주의는 이원론이 더욱 발전한 결과 탄생한 인식이 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는 일원론적 세계 인식의 결과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을 나누어 보지 않은 채 하나의 원리로만 설명하려 하는 것이 일원론적인 태도며 세계를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이원론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원론이건 이원론이건 이 세상 현상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원론과 일원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사실 세상 현상을 나누어 보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선악이나 참거짓으로 나누는 이원론의 경우 그 나누어진 항들은 서로 대립하고 배척합니다.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었을 경우 선과 악은 서로 싸우는 관계며 악은 사라져야만 합니다. 이원론에서 악이 등장하는 것은 선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지요. ‘대립하는 두 항이 너무 철저하게 상호 부정적이거나 양립 불가능한 까닭에, 두 항 사이에서 그 둘을 아우르거나 통일시킬 수 있는 어떤 상호관계도 발견할 수 없거나 아니면 발견해 내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경우’가 엄밀한 의미에서 이원론입니다. 그 이원론이 더 강화되면 한쪽의 이름으로(선 혹은 진실) 다른 항(악 혹은 거짓)을 완전히 박멸시키고 없애버리는 태도가 나옵니다. 그것이 독단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원론을 독단론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다양한 생각, 가치관에 나름대로 의미와 존재 근거를 주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그것들 간의 조화와 화해를 중시하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모태가 같으니 화해하며 손잡고 지내라고 하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따라서 ‘세상 현상은 겉보기는 달라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의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다원주의의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원론적인 사고라는 것을 납득하셨겠지요. 일원론의 일원은 원칙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모태와 근원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다른 모양을 한 현상들도 그 현상을 낳은 모태는 같으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일원론의 원칙입니다. 그런 일원론적인 원칙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되며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를 지탱하는 원칙입니다. 첫째, 세상 모든 현상은 공통되는 요소로 모두 연결돼 있다. 둘째, 세상 모든 현상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원리가 숨어서 작동하고 있다.
다원주의 시대의 창의적 상상력을 위하여
삼성 서초 사옥
현대는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다원주의 시대는 일사불란한 조직보다 개인의 창의력을 중시하는 듯 보입니다.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창의력을 중시한다는 것이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을 중시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원주의 시대는 각 개인들이 보이지 않는 맥으로 연결돼 있는 시대입니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낳게 한 근본 원리를 생각하게 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다원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살기 위한 원칙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원주의의 뿌리인 일원론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맥을 보는 정신입니다. 이질적인 것들을 단순히 나열해 늘어놓는 것이 다원주의가 아닙니다. 이질적인 것들 간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그것을 연결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공통되는 접점으로 만나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경우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장님들을 나이트클럽으로 모시겠습니다. 나이트클럽은 단순히 춤을 추는 장소가 아니지요? 남녀가 만나서 즐기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나이트클럽의 가치는 아마 부킹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담 좀 섞어서 말한다면 나이트클럽에서 이루어지는 부킹, 그게 아주 창조적인 작업입니다. 생판 모르는 이질적인 남녀가 만나서 연애라는 전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니까요. 나이트클럽의 부킹에 융합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본 정신이 아주 잘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 융합의 정신이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융합을 통해 새롭게 창출된 결과물이 기존의 것들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부킹의 예에서 보듯이 융합이 더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융합을 낳은 기존의 가치들이 나름대로 더 발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는 더 예쁘게 보여야 하고 남자는 더 매력적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융합을 통한 연애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컨버전스는 다이버전스의 전문화를 더 촉진한다고.
다원주의 정신으로 본다면 컨버전스와 다이버전스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서로를 자극하는 상생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낳으려면 지금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의 전문성을 더 키워야 합니다. 물론 조건이 하나 있지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전문성이 되려면 그것은 열린 전문성이라야 합니다.
부분에서 전체를 보아라… 기계적 사유에서 유기적 사유로
신세계 삼성 쇼윈도 매장
일원론과 다원주의를 관통하고 있는 기본 정신이랄까 상상력은 바로 유기적 사유입니다. 그런데 유기적 정신은 인문학이나 철학에 국한된 정신이 아닙니다. 첨단의 자연과학,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등 첨단 물리학, 첨단 생물학, 화학 등에는 그러한 유기적 정신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셀드레이크(1942~)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셀드레이크가 애당초 관심을 가진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셀드레이크는 ‘같은 개면서 왜 개들이 그렇게 다른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개들을 모두 개라고 인지하게 만드는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 공통분모를 결정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무수한 연구와 실험 결과 그는 아주 과감한 결론을 내립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모양을 결정하는 원인은 생물체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외부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생명체의 모양과 형질을 결정해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그는 ‘형태발생의 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형태발생의 장에서의 ‘장’의 개념은 전기장, 자기장의 ‘장’과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전기나 자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공간 속에 분명히 힘을 발휘하면서 존재합니다.
셀드레이크의 ‘형태발생의 장’ 이론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형태발생의 장이라는 기본 틀이 시간의 흐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즉 각 생명체가 습득한 새로운 형질이나 능력은 형태발생의 장에 흡수돼 형태발생의 장을 변화시킨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렇게 변화한 형태발생의 장이 전 생명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말대로라면 형태발생의 장은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이기도 합니다. 각 생물체에게 작용해 그 모양새를 정해주는 근본 원인이지요. 하지만 형태발생의 장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며 전에 존재했던 모든 개체들이 겪은 구체적 변화의 모습이 누적돼 있습니다. 모든 개체들은 형태발생의 장의 결과이면서 원인입니다.
그의 이론을 입증해주는 실험을 하나 더 소개해보겠습니다.
형태공명 실험입니다. 형태공명 이론은 미국의 생물학자인 맥더갈McDougal(1871~1938) 교수가 실험을 통해 주장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개념입니다. 형태공명 이론이란 어떤 종의 한 개체가 경험한 행동이나 형질이 형태의 장을 통해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에 작용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쥐로 실험을 합니다. 일종의 미로 찾기 시행착오 실험으로써 그는 쥐에게 물에 잠긴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길을 잘못 들 때마다 전기 쇼크를 주어 제 길을 찾게 하는 방법이었지요. 처음 그 실험에 임한 쥐는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미로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쥐에게 실험을 하면 더 빨리 미로에서 빠져 나왔고 습득 속도가 더딘 놈들만 교미를 해서 실험을 해도 습득 속도는 더 빨라졌습니다. 22번째 세대에 와서는 처음보다 습득 속도가 무려 10배나 빨라졌지요. 그러나 그의 실험의 진정한 의미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실험에 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그러니까 미로 탈출 능력을 획득한 쥐와는 유전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쥐들에게 실험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쥐들은 10배 빨라진 속도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쥐라는 종족의 어느 개체가 획득한 능력이나 형질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종족 전체에 퍼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DNA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각 개체가 드러내는 생물학적 특질은 DNA에서 기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각 개체의 특질과 능력은 DNA를 통해 유전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DNA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의 궁극 원인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사장님들 자체가 조직에서는 하나의 형태발생의 장이기도 합니다. 사장님이 의기소침해지면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조직 전체 사기가 떨어지는 경우가 정말로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아마 그런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리더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지요?
비전과 기능의 공존, 특히 비전·마음·항심
다원주의 시대는 개성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스템이며 우리가 시스템의 영향을 받고 우리가 시스템을 창조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가능해집니다. ‘창의성은 개인의 산물이 아니다. 창의성은 시스템에서 온다.’
사실 시스템 하면 우리는 일종의 하드웨어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일종의 기계적 시스템을 연상하지요. 하지만 시스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계적 시스템과 유기적 시스템입니다. 기계적 시스템은 개성이 사라진 시스템이고 유기적 시스템은 개성이 살아 있는 시스템입니다. 개성이 사라진 시스템은 개인 간의 경쟁을 유발하고 개성이 살아 있는 시스템은 시너지 효과를 가져옵니다. 기계적 시스템에는 IQ 130인 구성원들을 모아 놓았는데 조직의 IQ가 60이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정말 좋은 유기적 시스템이란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곳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그 시스템 속에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잠재된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러한 유기적 시스템은 형태발생의 장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스템입니다.
유기적 조직은 어떻게 가능하냐? 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합니다.
유기적 조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중의 중요한 하나가 보이지 않는 힘, 권위의 존재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창의성을 존중하는 것이 곧 모든 권위의 부정과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권위의 전면 부정이 아니라 권위의 성격의 변화이며 권위에 대한 우리의 발상의 전환입니다. 그 권위는 군림하는 권위가 아닙니다. 리더의 인격, 리더의 도덕성, 조직의 역사와 스토리, 조직에 대한 평판, 조직에 대해 갖고 있는 구성원들의 자부심, 조직의 윤리, 조직원들간의 인화, 이 모든 것이 권위의 역할을 합니다. 곳곳에 스며들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이 바로 권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모든 조직원이 공유하면서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그 조직은 아주 유기적인 조직입니다.
조직원들이 일체감을 갖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냐? 가능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벽입니다. 우선 그 벽을 허물어야지요.
이제 다시 서유기로 돌아가 보기로 할까요. '서유기'에서 저는 은근히 삼장법사 편을 더 들고 싶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손오공적인 가치만 중시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능력, 효율성, 기술, 지능, 뭐 이런 것들이 세상을 지배해 왔고 그것이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좀 바뀌어야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좀 바뀌고 있습니다.
조직을 사랑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비전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롤프 옌센은 스톡옵션이나 성과급보다 자부심, 성취감,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회사에 묶어두는 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애사심, 자부심, 사랑 이런 것을 강조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도 일종의 비전이라고 봅니다. 조직원들을 한데 묶어주는 비전. 그는 과감히 말합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느슨하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는 역동적인 조직이 미래의 기업이라고.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기계적 질서가 아니라 동일한 신념과 아이디어, 목표 같은 것이라고.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유기적 상상력의 출발은 사랑에 있다, 이런 이야기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꼭 눈에 보이는 목표만 비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정서적 만족, 자부심, 삶의 목표, 성취감 이런 것들이 함께 공유해야 할 비전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원주의에 입각한 글로벌 리더십 일등 욕구에서 일체감으로
마지막으로 제 바람에 빗대어 좀 더 적극적인 비전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제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패스트 팔로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저는 퍼스트 무버가 되는 길이 단순히 기술혁신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퍼스트 무버가 되는 첩경이 바로 새로운 비전의 제시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조화와 균형의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
조화와 균형의 정신을 지구촌에서 실현한다는 것은 지구촌이 가족이라는 정신으로 공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다원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공존은 단순히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때 필요한 덕목은 톨레랑스가 아닙니다. 역지사지의 상상력입니다. 큰 틀에서 일체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장법사가 되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비전으로 일원론의 일체감을 제시합니다. 일체감을 모토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고 삼성의 제품을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
경제 규모라는 양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샌드위치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가치 창출이라는 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샌드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기회를 잡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 어떤 기업도, 그 어떤 국가도 조화와 균형의 마인드를 모토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제품과 기업과 사람 혁신의 기본 원칙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정신이 전 분야에 스며들어 하나의 동력이 된 적은 없습니다. 다만 표면적인 구호나 윤리적 당위로 주어진 경우만 간간이 있을 뿐이지요.
그렇기에 조화와 균형을 모토로 내세우고 직접 실현을 하면 그것은 아주 창의적인 발상이요, 실천이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바로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루오션의 개념을 내세운 김위찬 교수가 말했듯이 경쟁심을 버린 상태에서 획득되는 최고의 경쟁력, 그게 가장 창의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런 마인드를 갖는 것, 그런 마인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기업을 우리가 하나 가져보는 것, 그것이 제 꿈이기도 합니다. 그 기업은 진정한 의미에서 글로벌 리더로서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