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 이후 항공 수요 회복과 함께 항공 부문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지속가능항공유(SAF)가 정유업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실적 먹구름이 낀 정유업계가 매출은 작지만 미래 먹거리가 될 SAF와 윤활유 등 알짜 사업 부문 투자를 늘리며 사업 다각화에 힘쓰는 셈이다.
당장 3분기 적자가 우려되는 가운데 적자 폭을 최소화하고 향후 시장 성장이 예상되는 신사업을 선점해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단 계산이다.
지속가능항공유란 석유·석탄 등 화석 연료가 아닌 폐식용유·생활폐기물 등 대체 원료로 생산된 항공유를 뜻한다. 온실가스 저감 효과가 타 항공유 대비 40~82%나 돼 탄소중립 항공유로 불리기도 한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2025년부터 유럽연합(EU) 27개국에서 이륙하는 모든 항공기에 SAF 2% 이상 혼합을 의무화했고, 2050년엔 이 비율을 70%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2027년 SAF 시장 규모는 지금보다 20배 성장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현재 국내 정유업계 4사는 각각 SAF 투자에 공들이며 2030년까지 친환경 연료 분야에 6조원가량을 투입할 방침이다.
에쓰오일은 지난 1월 국내 정유사 중 최초로 바이오 원료를 정유 공정에 투입했다. 이어 국제항공 분야에서 SAF 생산을 공식 인증하는 ‘ISCC 탄소 상쇄 및 감축제도(CORSIA)’ 인증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받았다. HD현대오일뱅크는 지난 6월 국내 업체 가운데 최초로 SAF를 일본에 수출하는 등 가시적 성과를 거뒀다. 양사는 기존 정유설비에 동식물성 바이오 원료를 함께 투입하는 ‘코프로세싱’ 방식으로 SAF 생산에 나섰으나, 아직 전용 생산시설을 갖추지는 못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말까지 바이오 원료를 투입해 SAF를 생산하는 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 그린수소와 이산화탄소를 활용한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GS칼텍스는 지난해 6월 대한항공과 바이오 항공유 실증 추진 업무협약을 맺고 제품의 ISCC CORSIA 인증을 준비중이다.
정유업계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SAF 전용 시설 구축에 정부 차원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SAF 시장을 활성화 하기 위한 정책 추진에 나선다. 8월 SAF 확산 전략을 발표하고 SAF를 급유하는 상용 운항 방안 등을 발표했다. 해당 내용에는 2027년부터 한국에서 출발하는 모든 국제선 항공편에 SAF 1% 혼합 급유를 의무화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세계 1위 항공유 수출국인 한국의 에너지 신성장 동력으로 SAF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에 나선 것이다.
또 개정을 거쳐 10월 7일부터 시행되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에 대비하면서 SAF 산업 활성화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해당 법은 기존엔 석유 원료 제품만 생산할 수 있었던 석유정제업 범위에 친환경 정제 원료 혼합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SAF 설비의 투자세액공제 확대와 SAF 생산 및 사용 관련 차액 보조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생길 수 있다”며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국내 정유업계가 SAF 경쟁력을 놓친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한 SAF 생산시설이 전 세계적으로 320여 곳에 달하지만 국내에는 SAF 전용 생산시설이 전무해 정부와 정유업체 간 긴밀한 협조와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9월 말 기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따르면 전 세계 SAF 생산시설 323개 중 미국이 100개로 가장 많고 이어 캐나다(27개), 프랑스(19개), 영국(15개) 순인 것으로 확인됐다. 아시아에서도 중국(13개), 일본(12개) 등 주변 인접국에서 SAF 시설을 활발히 건설 중이거나 건설에 대한 발표가 이어진 가운데 국내 SAF 전용 시설은 0개인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미국의 SAF 생산능력은 연간 363억ℓ에 달해 65억ℓ인 캐나다, 18억ℓ인 프랑스를 압도한다. 이처럼 북미·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SAF 생산 체제가 구축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는 SAF 전용 시설이 한 곳도 없어 국가 차원의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정부 차원에서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신속한 정책 결정과 다양한 지원에 나서야만 크게 벌어진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항공유 수출 세계 1위를 지켜온 국내 정유업계 입장에선 급변하는 항공유 시장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할 경우 역풍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특히 정유업계 실적 부진 우려가 커지는 만큼 이러한 신사업 리더십을 잡지 못할 경우 침체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이란 우려도 크다. 각 업체들은 적자 폭을 줄이고 유가변동성 리스크와 무관하게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에 공을 들이는 상황이다.
실제 지난 2분기 국내 4대 정유업체 중 3곳의 석유사업 부문이 적자 전환했고 SK에너지의 모회사 SK이노베이션만 1442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증권사들 역시 3분기 정유사들의 실적 전망을 하향 조정하며 적자 폭이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 정유업계 최대 화두 중 하나인 SAF를 중심으로 한 항공유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페트로넷에 따르면 지난 8월 국내 항공유 소비량은 346만 배럴을 기록했다. 이는 코로나 직전인 2019년 12월 369만 6000배럴 이후 최대치다. 엔데믹이 본격화되며 늘어난 여행 수요에 맞춰 항공기 이용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항공유 공급도 자연스레 확대되고 있다. 이런 여행 특수에 더해 정부 주도의 SAF 시장 확대 기조는 향후 정유업계가 글로벌 항공유 시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발판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정유업계는 올해 내내 SAF 관련 가시적 성과를 내놓으며 시장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GS칼텍스가 국내 최초로 지속가능항공유(SAF)를 일본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약 5000㎘(킬로리터) 규모다. 한국 정유사 중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 인증받은 국제항공 탄소상쇄·감축제도(CORSIA) SAF를 상업적 규모로 판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물량은 일본 이토추 상사를 통해 일본 나리타공항에 지난 9월 13일 처음 공급됐다. 향후 일본 국적 항공사인 전일본공수(ANA), 일본항공(JAL)에도 판매될 예정이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 규제와 온실가스 감축 트렌드가 강화되는 가운데 항공업계에서도 탄소 배출량을 최대 80% 감축하는 SAF를 사용하는 것이 점차 의무화되는 추세다. 한국 정유업계는 설비 고도화와 규모의 경제 효과를 앞세워 올해 대일본 휘발유 수출액 측면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9월 19일 관세청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올해(1~8월 기준) 정유업계의 휘발유 일본 수출액은 14억4643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미 전년도 전체 규모(13억8453만달러)를 뛰어넘었고, 1992년 통계 집계 이래 최대치다. 한국 정유업계는 설비 고도화와 규모의 경제 효과를 앞세워 올해 대일본 휘발유 수출액 측면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1~8월 기준으로 휘발유 일본 수출액의 종전 최고 기록은 2012년에 달성한 13억3986만달러다. 당시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일본 정유사의 시설 가동률 감소 여파로 대일 수출액이 크게 늘었다.
올해 대일 수출 증대는 자연재해와 같은 일시적 외부 충격이 아니라 국내 정유업계의 경쟁력 강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으로 평가받는다. 업계에서는 올해에만 수출액 20억달러 경신도 유력할 것으로 기대한다.
유연백 석유협회 상근부회장은 “최근 대일 석유제품 수출량 증대는 국내 정유업계의 경쟁력 강화 노력이 뒷받침 된 결과”라며 “친환경 에너지 전환 시대에도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만큼 경쟁국 수준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HD현대오일뱅크 역시 지난 6월 국내 최초로 EU인증 SAF를 일본에 수출한 바 있다.
SAF와 더불어 정유업계서 숨은 진주라 불리는 윤활유 시장에서 국내 정유사들은 최근 전기차용 윤활유 시장과 인공지능(AI) 산업 확대로 대폭 증가 중인 데이터센터 냉각용으로 주목받는 액침냉각 기술 투자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액침냉각유 실증을 완료한 SK이노베이션은 본격적으로 액침냉각유 상용화에 돌입하며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AI 관련 계열사 간 협력을 통한 시너지를 내고 있다. GS칼텍스와 HD현대오일뱅크 역시 액침냉각유 출시와 상표 출원에 나서며 연구개발에 대한 구체적 성과를 내고 있다. 에쓰오일 역시 전기차 전용 윤활유 브랜드를 출시하고 국제 품질등급에 따른 그룹Ⅰ~Ⅲ 윤활기유를 모두 생산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10년간 연평균 20% 이상 액침냉각 시장 성장이 기대되는 만큼 AI시대에 걸맞은 액침냉각 솔루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석유데이터 포털 페트로넷에 따르면 국내 윤활유 생산은 지난 7월 280만 8000배럴로 올해 들어 최대량을 기록했다. 원유 가격 반등이 이뤄지지 못한 가운데 윤활유 생산 및 판매가 늘어나며 실적 개선에 기여할 여지가 커진 셈이다.
다만 항공유 및 윤활유 사업에서 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휘발유와 경유 등 전통적인 연료 사업 의존도가 높아 그 효과가 적다는 지적이다. 결국 유가 변동성 및 이에 따른 정제마진에 따른 실적이 전체 성적표를 판가름하는 만큼 이러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신사업 발굴의 필요성 역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유업계 고위 관계자는 “아직 윤활유와 항공유 등은 매출 기준으론 그 영향력이 적을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미래 산업의 트렌드 변화에 따라 정유업계 역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야 보다 내실 있는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