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경제 지표가 요동치면서 투자 심리 또한 혼조세에 빠졌다. 일각선 AI 버블론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여전히 AI 반도체 수요 확대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은 8월 파리 올림픽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 출장 성과에 관한 질문을 받자 “실적으로 보이겠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AI발 반도체 훈풍에 올라타면서 올 2분기 호실적을 입증했다. 올해 2분기 반도체 사업에서만 6조원을 넘게 벌어들이며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연결 기준 올해 2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74조 683억원, 10조 4439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23.44%, 1462.29% 증가했다. 순이익은 9조 8413억원으로 470.97% 늘었다. AI 시장 확대에 따른 메모리 반도체 수요 회복과 가격 상승 등이 반도체 부문의 실적을 크게 개선하며 전체 실적을 견인했다. 시장 전망치 10조 2866억원을 1.5% 상회했다. 삼성전자 분기 영업이익이 10조원을 넘은 것은 2022년 3분기(10조 8520억원) 이후 7개 분기만이다.
2분기 실적을 부문별로 보면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매출 28조 5600억원, 영업이익 6조 4500억원을 기록했다. 메모리는 생성형 AI 서버용 제품의 수요 강세에 힘입어 시장 회복세가 지속되는 동시에 기업용 자체 서버 시장의 수요도 증가하며 DDR5와 고용량 SSD 제품 등 프리미엄 수요가 확대됐다.
시스템LSI의 경우 주요 고객사 신제품용 시스템온칩(SoC)·이미지센서 등의 제품 공급 증가로 실적이 개선돼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 파운드리는 5나노 이하 선단 공정 수주 확대로 전년 대비 AI와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 고객 수가 약 2배로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하반기 전망에 대해 “메모리는 주요 클라우드 서비스 공급자와 일반 기업체의 AI 서버 투자가 확대됨에 따라 시장 내 AI 서버 구축을 위해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서버용 메모리 제품의 수요 강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낸드의 경우 서버·PC·모바일 전분야에 최적화된 라인업을 기반으로 고객 수요에 적기 대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AI 서버용 고부가가치 제품 수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HBM 생산 능력 확충을 통해 차세대 제품인 HBM3E 판매 비중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시장의 가장 큰 관심은 5세대 HBM인 HBM3E의 엔비디아 납품 시점이다. 삼성전자는 HBM3E 인증과 공급 등을 놓고 다양한 추측이 나오자 7월 31일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HBM3E 8단 제품을 3분기 내 양산해 공급을 본격화하고 12단 제품도 하반기에 공급할 예정이라며 향후 계획을 공식화했다. HBM은 통상 사전에 고객사와 맺은 계약을 토대로 공급 물량을 결정하는 만큼 삼성전자가 이처럼 HBM의 공급 시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사실상 고객사를 이미 확보했고, 공급이 임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다음 세대 제품인 HBM4 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내년 하반기 HBM4 출하를 목표로 개발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삼성전자는 HBM 경쟁력과 공급 역량을 바탕으로 수요 증가에 적기에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HBM뿐 아니라 낸드플래시 제품 종류인 서버용 SSD 시장의 성장도 기대하고 있다. 김 실장은 “AI 연산량이 늘어나 고성능 SSD 수요는 강세를 보일 것”이라며 “하반기에는 전년 동기보다 4배를 넘어선 성장이 가능할 전망”이라 밝혔다. 특히 최신 제품군인 쿼드러플레벨셀(QLC) 기반 SSD 매출은 10배 이상 성장할 것이라 예상했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젓기 위해 경영진들도 더욱 고삐를 죄고 나섰다.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부회장은 실적 발표 직후 사내게시판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고 ‘다시 뛸 것’을 주문했다. 지난 5월 반도체 부문 수장에 오른 전 부회장이 임직원들에게 공식 메시지를 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2분기 실적이 좋아진 건 근본적인 경쟁력을 회복한 덕분이라기보다는 시황이 좋아진 데 따른 것”이라면서 “근원적 경쟁력 회복 없이 시황에 의존하다 보면 또다시 지난해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국내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도 주도권을 가진 HBM을 앞세워 호실적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는 올 2분기 매출 16조 4233억원, 영업이익 5조 4685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2018년 이후 분기 기준 3번째로 높은 영업이익이다. 지난 2018년 2분기와 3분기에는 각각 5조 5739억원, 6조 4724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SK하이닉스의 2분기 영업이익률은 33%로 1분기(23.2%)보다 10%P 상승했다.
SK하이닉스의 경영진은 내년 시장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을 밝혔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최근 임직원들 대상 간담회에서 “내년 상반기까지 메모리 수요가 견조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내년에도 AI 시장 확대에 따른 메모리 수요가 높을 것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HBM을 비롯한 차세대 D램 생산능력을 지속 확장할 계획이다. 지난 4월 청주 M15X을 신규 D램 공장으로 낙점하고 5조 3000억 원을 투입하며 HBM 생산 최적화에 나섰다. 또 최근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번째 팹 건설에 9조 40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 외에도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핏에도 38억 7000만달러를 들여 AI 메모리용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를 짓는다. 미국 상무부는 이 투자와 관련해 직접 보조금 4억 5000만달러와 대출 5억달러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 경영진도 직원들에게 HBM 리더십을 유지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달라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시장 90%를 장악한 엔비디아에 4세대 HBM인 HBM3를 사실상 독점 공급해 온 데 이어 올 3월 업계 처음으로 HBM3E 8단 제품을 엔비디아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HBM3E 12단 제품은 이번 분기 양산을 시작해 4분기부터 고객에게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말과 내년도를 관통할 AI반도체는 HBM뿐이 아니다. 차세대 모바일 D램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저전력 D램(LPDDR)과 그래픽용 D램(GDDR)은 전력 소모를 줄이고도 데이터 처리 속도는 향상한 대표적인 AI 메모리다. 시장 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는 최근 7세대 LPDDR인 ‘LPDDR5X’ D램 양산을 시작했다.
LPDDR은 전력 소모를 줄이고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모바일용 D램이다. 주로 스마트폰 등에 탑재되며 최근에는 AI 가속기, 서버, 전장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삼성전자 LPDDR5X의 최대 장점은 손톱만큼 얇은 두께다. 기존 제품(0.71㎜)보다 더 줄인 0.65㎜에 불과하다. 현존 12GB(기가바이트) 이상 LPDDR D램 중 가장 얇다. 메모리 두께가 얇아지면 스마트폰 등도 완제품을 얇게 만드는 데 유리해진다. 애플 등 완제품 기업들이 최근 ‘슬림’ 제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같은 삼성의 메모리도 주목받고 있다. SK하이닉스는 LPDDR5X 성능을 높인 LPDDR5T를 지난해 선보인 바 있다. SK하이닉스는 이 제품을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인 비보에 납품하고 있다. 기술 경쟁은 그래픽 메모리 제품 GDDR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GDDR은 그래픽처리장치(GPU) 주변에 탑재돼 GPU 연산을 돕는 메모리인데, 고성능 HBM이 필요하지 않은 AI 가속기에는 GDDR이 유용하다. 실제 반도체 거장으로 꼽히는 짐 켈러가 최고경영자(CEO)로 있는 캐나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텐스토렌트는 HBM 대신 GDDR6를 사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년 전인 지난해 7월 7세대 GDDR7 D램을 업계 최초로 개발했다. 32Gbps 동작 속도를 구현하며 이전 세대 제품 대비 데이터 처리 속도는 1.4배, 전력 효율은 20% 개선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최고 수준의 성능을 구현한 GDDR7을 공개했다. SK하이닉스는 GDDR7 개발은 삼성전자보다 다소 늦었지만 경쟁사보다 빠른 최고 동작 속도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신무기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반도체 양강의 하반기 실적은 역대급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올 하반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배 증가한 27조 6000억 원을 제시하며 “2021년 하반기 29조7000억원 이후 3년 만에 최대 실적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고영민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의 올 3분기 영업이익이 전 분기 대비 26% 증가한 6조 900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했다.
오찬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