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직관적이며 아름다운 시 ‘풀꽃’은 클래식에도 잘 들어맞는 듯하다. 평생 관련 분야 연구에 매진한 학자나 클래식의 ‘C’자도 모르는 사람까지 폭넓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아름다움을 가졌지만 첫눈에 반하기란 쉽지 않다. 분야의 방대함과 화성악이나 악기에 대한 부족한 식견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클래식이 도도함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 클래식 감상을 취미라고 밝히는 전학생에게 “오~~”라는 시기 섞인 탄성이 나오는 것도 바로 도도함 때문이 아닐까. 때때로 그 도도함으로 인해 “돈 있는 사람들이나 즐긴다”는 잘못된 수사가 붙기도 하지만 클래식은 그만큼 ‘지적 유희’를 느낄 수 있는 취미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클래식 감상을 취미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이를 숨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연유를 물었더니 여러 사람이 ‘커밍아웃’ 이후 쏟아질 질문이나 대화의 물꼬가 트인 후 밑천이 드러날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악을 들어도 상식이 부족하다 싶어 신분(?)을 숨기는 격이다. 심지어 오랜 기간 클래식을 즐기고 상당한 식견을 가진 지인에게 신년 클래식 공연 티켓을 맞춤형으로 선물했더니 “감사합니다만, 제가 워낙 클래식을 잘 몰라서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평소 성품을 알고 있는 터라 기뻐하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던진 그의 대답이 겸손의 탈을 쓴 오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정도 구분할 입문자 수준의 기자 역시 클래식을 즐기는 숨은 1인이다. 집안 분위기를 바꾸고 싶거나 나른한 오후에 클래식을 들으며 기분을 전환하지만 클래식에 관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한 대화는 부담스럽다. 초급자의 영어 공포증과 유사하게 클래식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감으로 듣고 느끼는 예술을 단편적인 책으로 익히거나 배경지식 없이 ‘클래식 전집’을 반복해서 들어봐도 갈증이 해소될 리 만무하다.
제6회 동서커피클래식 공연 장면
역사·연주·감상이 어우러진 수다
클래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클래식 강좌다. 클래식 음악의 체계적인 이해와 감상을 통해 음성적(?)인 취미 생활을 양지로 끌어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월 중순, 강좌가 열릴 때마다 클래식 마니아들이 꽉꽉 들어찬다는 압구정동의 클래식 음반 전문 매장이자 아카데미인 풍월당을 찾아 직접 강의를 들어봤다. 수업 시작 전부터 90개의 좌석이 준비된 강의실에는 보조의자까지 설치돼 100여 명의 수강생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돈 많은 사모님들이 대다수 일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어린 남학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자리해 있었다.
강사는 클래식 칼럼리스트 김문경 씨였다. 주제는 브루크너 교향곡 4번 ‘로맨틱’이었다. 어려운 클래식 강의를 어떻게 풀어낼까 우려도 있었지만 수업은 상당히 쉽고 유쾌했다. “브루크너의 생가가 자리한 안스펠덴에 가려면 공항에서 내려 상당히 들어가야 하는데 택시비만 몇 십만원이 듭니다. 돈을 좀 아끼려고 버스를 탔는데 꽤 걸어야 하는 거리여서 고생 좀 했습니다.”
‘로맨틱’과 ‘낭만’을 주제로 한 드라마 등 부드러운 소재로 시작된 강의는 작곡가의 일생에 대해 유쾌하게 설명해 나갔다. 유난히 어린 여성을 사랑했던 작곡가의 취향까지 공개하며 흥미를 높였다. 특히 브루크너의 생가를 방문했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직접 촬영한 다양한 사진과 함께 자연스레 작곡가의 일대기를 소개할 때의 집중도는 상당했다.
“교향곡 4번 로맨틱 2악장은 참 산책하기 좋은 음악이죠?”
강사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소녀처럼 손을 모은 중년 여인들이 눈에 띄었고, 브루크너의 우상이었던 바그너의 사진이 영상으로 등장하자 마치 아이돌 가수를 본 듯한 탄성도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작곡가에 대한 충분한 사전 설명이 끝나고 교향곡 4번 1악장에 등장하는 중요한 악기 트레몰로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음악 이야기로 흘러갔다. 강사의 피아노 연주와 1억원이 넘는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곁들여지며 지루할 틈이 없었다. 친구와 수다를 떠는 듯 즐겁게 수업을 듣고 난 이후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사전 지식을 ‘체득’한 후 감상하는 ‘로맨틱’은 확실히 모르고 들었을 때와 달랐다.
입체적인 강의를 통해 클래식 감상의 폭을 넓혀주는 아카데미는 안타깝게도 많은 편은 아니다.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학기제로 클래식 아카데미를 열고 있는 풍월당의 경우 CEO 클래스나,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월요포럼 등 다양한 강좌를 열고 있지만 100석이라는 제한적인 장소 때문에 수강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은행은 금융사에서 드물게 ‘하나클래식아카데미’를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몇몇 은행이나 시향 등에서 비정기적 클래식 강좌를 열고 있으니 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정기 강좌를 통해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클래식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전공으로 공부하는 사람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적은 것도 아니고 꽤 많은 사람이 오늘도 클래식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생업을 가진 우리네들이 그들보다 많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취미다. 배드민턴을 막 시작하면 다양한 몸 개그를 하기 마련이다.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클래식 감상이 취미라는 것을 숨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클래식 정기 강좌 열리는 곳
풍월당 www.pungwoldang.kr (02)512-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