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는 이슬람전통과 부족주의 전통이 교차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족주의는 이슬람주의보다 훨씬 이전부터 중요한 정체성의 근간이 되어왔다. 따라서 이슬람의 등장도 부족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가 등장하기 이전, 즉 소위 자힐리야(Jahiliyya) 시대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다양한 부족이 상호 가축, 영토, 그리고 명예를 놓고 갈등과 충돌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무함마드는 이러한 갈등의 부족 역사를 보다 연대감이 강한 정치적 공동체로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등장 이후에도 부족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족 내 주요 가문 간의 기득권 경쟁으로 이슬람 초기의 역사도 상당한 갈등이 발생해 왔다. 이러한 부족주의 현상은 아랍 곳곳에서 보인다. 200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Abdullah) 국왕 취임식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부족지도자들이 참석해 충성서약(baia)을 했다. 걸프지역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강력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세력은 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다. 쿠웨이트, 이라크 등 산유국의 의회 선거에는 부족을 대표하는 후보가 아직도 다수를 차지한다.
두 우물의 방정식
부족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중동의 생산 수단을 대표하는 유목문화가 있다. 거친 사막을 다니며 가축을 기르는 이들 유목 부족들의 전통이 아직 중동에는 상당부분 남아 있다.
유목문화는 중동의 대표적인 가치체계인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낳는다. 유목문화를 이해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접근법은 ‘두 우물의 방정식’이다.
유목민은 가축을 데리고 ‘정처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유목민이 이동하는 경로는 정해져 있다. 사막 속에서 정처 없이 다니다가는 목숨을 잃는다.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고 이동한다. 이 경로를 결정하는 것이 두 개의 큰 우물이다.
즉, 오아시스들이다. 강력한 부족은 더 많은 수의 오아시스를 가지지만, 유목 부족은 생존하기 위해서 최소 두 개의 큰 오아시스를 가져야 한다. 하나는 여름용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겨울용이다. 이 두 곳에서는 다소 오래 머물지만 가축이 먹을 풀이 떨어지면 이동해야 한다. 이동하는 경로에는 작은 우물들이 곳곳에 있다. 최소한 1주일에 한 번은 물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족은 이 여름용, 겨울용 오아시스를 왕복하는 여정에서 작은 우물들을 향해 이동하는 사람들이다.
이 이동경로가 부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부터 시인들은 유목민들의 이동을 ‘항해’로 은유하곤 했다. 사막을 바다로 보는 것이다. 사막이라는 바다 위에 간간이 떠 있는 섬이 바로 우물이다. 두 오아시스를 낀 삶 속에서 중요한 중동의 전통이 등장한다.
알제리 남부의 오아시스 샘
남성중심의 사회
유목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물리력 혹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다. 정착문명과는 달리 유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물이나 오아시스다. 여름용, 겨울용 큰 오아시스는 물론이고 이동경로에 있는 작은 우물들을 보호해야 했다. 작은 우물이라도 적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생사를 결정하는 우물 혹은 오아시스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남성은 무장을 해야 했다. 남성이 칼을 지니는 것은 당연했고, 유사시에는 우물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나가 싸워야 했다. 남성중심의 사회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의 생존이 남성의 전투력에 달려 있었다. 여성의 노동으로도 생존이 가능한 농경 정착문명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남성들이 우물을 지키지 못할 경우 부족은 멸할 수밖에 없었다. 무기는 남성의 자존심이자 생존의 수단이었다. 아직도 중동에 무장충돌이 빈번한 배경 중 하나로 무기소유의 전통이 언급된다.
강력한 권위주의
강력한 권위주의도 등장하게 된다. 모든 남성이 무장을 하고 1년 내내 전투태세를 유지해야 하는 사회였다. 무장한 부족 구성원을 다스리기 위해 지배 가문은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이들 가문 그리고 이 가문의 남자 어른은 군대의 사령관 같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 전투를 위한 엄격한 위계질서와 명령체계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즉, 강력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필요한 사회와 정치구조가 등장한다. 가장 강력한 가문 혹은 집안의 남자 어른에게 모든 지도력과 권력이 주어졌다. 여기에 전시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중동의 지배가문은 전통적으로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 권력도 가진다.
따라서 부족장의 힘은 두 가지 요소로 상징된다. 하나는 부족장이 보유한 자원과 재원의 규모이고, 나머지 하나는 부족장이 소유한 군사력이다. 자원은 곧 경제를 군사력은 정치력으로 대변된다. 부족 내 최고 엘리트인 부족장과 그의 일가는 경제 엘리트이자 정치 엘리트로서의 역량을 갖추고자 한다.
(왼쪽)예멘 남성에게 잠비야(단검)는 필수다. 소년들도 아직 칼을 차고 다닌다., (오른쪽)보수적인 사우디의 카페는 남성들만의 전유물
가부장주의
부족원은 물리력, 정치적 권위 그리고 경제력을 장악한 부족장의 명령과 권위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재원을 가지고 부족의 복지까지 책임지는 지도자는 또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갖는다.
아버지에게 도전하는 것은 금기시돼 왔다. 아랍의 부족을 일컬을 때 ‘바누(Banu)+부족장 이름’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바누는 아들(이븐 혹은 빈)의 복수다. 따라서 아버지 역할을 담당하는 ‘부족장의 아들들’이 부족의 이름이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체제는 이처럼 중동 유목 사회의 가장 중요한 세계관이다. 중동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의문 중에 하나는 ‘왜 중동이 변하지 않고 과거의 전통에 싸여 있나’라는 것이다. 답은 우리보다 훨씬 강력한 남성중심의 권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변하는 속도가 늦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중동 유목 부족이 가진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생존을 위한 강력한 것이었다. 변하는 속도가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동은 이상한 권위주의 문화를 가진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권위주의 체계를 가져서 서구화가 다른 지역보다 늦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우디의 통치방식은 이슬람식?
이런 유목문화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물리력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권위주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중동의 정치경제 및 사회에 깊숙이 영향을 주고 있다.
때로는 이슬람 종교보다는 이 유목문화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때문에 중동의 정치는 ‘죽어야 바뀌는 정권’의 특징을 가진다. 아버지는 죽어야 그 지위를 상실한다. 소위 왕정이라 불리는 걸프국가에서는 가문의 수장이 절대 그리고 세습군주로 군림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우드’ 가문,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는 ‘나흐얀’ 가문, 두바이는 ‘마크툼’ 가문, 카타르는 ‘싸니’ 가문, 쿠웨이트는 ‘사바흐’ 가문이 왕위는 물론 주요 정부 요직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문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권도 사실상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사우디 등 이들 걸프 산유국의 정치경제가 이슬람에 의해 운용된다는 시각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부족주의적인 것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공화정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군부 쿠데타 세력이 대부분 죽을 때까지 집권한다. 선거는 있지만 이름뿐이다. 정권교체가 없고, 장기독재가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1969년 27세의 나이로 쿠데타에 성공해 41년 동안 통치했던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다. 반정부 시민군에 대해 카다피는 사살되기 직전까지도 물리력을 동원해 자신의 권위를 끝까지 지키려고 무차별 진압을 펼쳤다. 자국인에 대해 전투기와 공격용 헬기까지 투입했다.
이런 마인드를 중동의 독재정권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군부 출신의 대통령은 자주 군복을 입고 대국민 연설을 행하였다. 군은 물론 군 출신이 대거 포진한 정보부 그리고 경찰까지 최고 권력을 호위하는 세력으로 만들었다. 군대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전 자치정부 수반, 독재자 사담 후세인 등이 군복을 자주 입고 빈 권총집을 차고 다녔던 것도 물리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걸프 왕정에서도 왕세자나 왕세제가 되는 정규코스는 영국의 사관학교를 이수하고 경찰청장과 국방장관을 거치는 것이다. 왕이 된 이후에도 정보기관과 군부는 자신의 직속 명령체계 하에 둔다. 더불어 ‘공화국수비대’ 혹은 ‘왕정수비대’ 등 친위부대를 별도로 두고 권좌를 지키는 물리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중동 및 아랍의 정치 및 경제에 유목문화에 바탕을 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슬람보다는 이런 유목문화가 오히려 중동의 정치경제에서는 더 중요한 변수다. 이슬람의 렌즈를 끼고 중동의 정치경제를 이해하려 한다면 상당히 왜곡된 모습만 보게 될 것이다.
중동 미니상식
칭찬은 중동 상인을 춤추게 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인식체계를 가진 중동에는 이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명예와 체면 문화가 팽배해 있다. 지도자는 물론 일반인 남성들도 위엄을 갖추고자 한다. 비방과 중상 그리고 모욕은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다. 오히려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중요한 전통이다. 사실과 다르고 다소 과장된 것이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동에는 무자말라(mujamalah)라는 문화가 있다. ‘아름답게 하다’라는 동사의 동명사 형태다. 상대방을 좋게 평가하고 꾸며주는 것은 일종의 문화다. 따라서 ‘최고’ 혹은 ‘최대’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무안할 정도로 상대방을 높이 치켜세우는 것이 좋은 행동이다. 특히,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그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몇 차례’ 거래를 해보았더라도 ‘자주’ 거래를 해보았는데 품질 혹은 신용이 ‘최고’인 업체라고 소개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보는 앞에서 혹은 뒤에서라도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비난하는 언행은 절대 안 된다. 상대방의 명예와 체면을 구기는 행동이다.
속이 상하고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과 단둘이 있을 때만 조용히 차분하게 언급해야 한다. 공식석상에서는 최대한 즐겁게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높아진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큰손’이 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