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부총재가 선임됐다고?”
지난 3월 3일 청와대는 신임 한국은행 총재에 ‘정통 한은맨’인 이주열 전 한은 부총재를 내정했다고 밝혔다. 발표를 들은 한은 임직원들은 예상치 못한 인사 결과에 술렁거렸다. 당초 한은 안팎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아는 사람’을 한은 총재로 낙점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나 현정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일부 서강대 출신 인사들이 거론됐다. 한은 출신 인사들도 총재 후보군에 거명됐지만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한은 35년 경력의 이주열 전 부총재였다. 2년 전 한은을 떠난 이 총재가 친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정작 이주열 총재는 내정 발표 사실을 전해 듣고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 총재는 발표 직후 매일경제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통화정책은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저에게 한국은행을 이끌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소통하는 총재가 되고 싶다”고 차분히 밝혔다.
‘35년 한은맨’ 누구보다 통화정책 구조 꿰뚫어
이 총재는 1952년 7월생으로 1970년 원주 대성고를 졸업하고 1977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매일경제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임명된 9명의 한은 총재를 분석한 결과 평균 취임 나이는 61.6세이고 서울대 경제학과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총재는 첫 연세대 출신 총재인데다 두 번째 강원도 출신이다. 총재들의 고향은 서울 2, 부산 2, 전북 2, 강원 2, 경북 1 등 다양했다. 이 총재의 취임으로 최근 9명의 총재 중 한은 내부 출신이 4명으로 가장 많아졌다. 17대 김건 총재, 19대 김명호 총재, 23대 이성태 총재도 한은 내부 출신이었다. 교수 출신으로 분류되는 22대 박승 총재도 한은에서 오래 근무하다 교수를 거쳤고 20대 이경식 총재도 한은을 거쳐 일찍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긴 재무관료 출신이다.
이주열 총재는 사고가 유연하고 대외적인 소통능력도 갖춘 인물로 묘사된다. 이 총재가 한은 부총재를 역임한 시절에 정부 측 상대였던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당시 기획재정부 1차관)은 “공식·비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도 그분과 언성을 높이거나 이견을 갖고 충돌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기재부 차관이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열석발언권을 행사하던 날도 매번 이 내정자의 방에 찾아가 담소를 나누다가 나올 정도로 정부 측과 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소개했다. 금통위원을 역임한 이성남 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될 만한 사람이 한은 총재를 맡았다. 총재는 통화정책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확실하고, 정부에도 자신의 의견을 잘 피력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 총재를 잘 아는 주변 지인들은 이 총재의 향후 경영 스타일을 종전의 부총재 시절에서 유추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한은 조사국장, 정책기획국장, 부총재보, 부총재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당시까지는 한은 총재의 ‘참모’로 활동할 뿐이었다. 향후 4년간은 한국의 통화신용정책을 최종 책임져야할 고독한 길을 걷게 된다. 리더와 참모는 성격이 다른 만큼 이 총재 본인도 참모일 때의 색깔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여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이 총재의 인사 스타일이 직전 김중수 전 총재와는 다를 것이라는 관측은 적지 않다. 김 전 총재는 파격적인 조직 개편을 통해 한은의 고여 있는 인사 구조를 깨려는 의식이 강했다. 김 전 총재는 “한은 2200여 명 임직원 중 30년 이상 근속자가 무려 30%에 달한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다. 한은 조직이 얼마나 순혈주의에 쌓여 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이런 조직 구조를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글로벌 파고 잘 타고 넘는 ‘경제 조타수’ 기대
반면 순수 한은 출신인 이 총재는 김 전 총재의 파격적인 조직 개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피력했다. 그는 3월 19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총재가 된다면 직원들의 동요를 피하고 조직의 안정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인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2년 전 부총재로서 한은을 떠날 당시 “60년에 걸쳐 형성된 (한은) 고유의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되면서 혼돈을 느낀 사람이 많아졌다”는 퇴임사를 남겼다. 한은 임직원들의 자존심을 대변한 듯한 이 문구는 한은 임직원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 총재는 김중수 총재와의 갈등설에 부담을 가진 듯 “퇴임사가 논란이 돼 곤혹스럽다. 김 총재가 (인사에) 공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언급했다.
4년 임기를 부여받는 이주열 총재 앞에는 갖가지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와 신흥국 경제 불안 등 긴박하게 변화하는 글로벌 시장의 파고를 잘 타고 넘는 ‘경제 조타수’가 돼야 한다. 그만큼 넓은 안목과 전문성, 돌파력이 요구되는 자리다. 경제 전문가들은 한은이 물가 안정을 제1 목표로 삼는 시기는 지났다고 지적한다. 정부와 함께 경제 안정과 성장을 견인할 수 있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은 총재의 역할은 단순히 금리를 결정하는 통화정책을 펼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돈이 필요한 기업과 가계로 적정히 흘러가게 해 경제 회복을 뒷받침하는 신용정책의 중요성이 커졌다. 내수와 수출의 불균형, 성장잠재력 상실, 청년 실업난, 가계부채 위기 등 한국경제의 현안을 해소하는데 ‘통화신용정책의 칼’을 지닌 한은이 어떤 역할을 해낼지가 관건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앙은행의 목표가 과거에는 물가 안정이었다면 지금의 저성장·저물가 시대에는 불씨 지피기 기능에 더 비중을 둬야 한다. 한은 총재의 역할은 전통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에서 디플레이션 치유자로 변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면 재정·통화정책을 통해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느냐가 세계 각국의 과제였지만 앞으로는 경제 구조를 탄탄하게 만들어 성장을 이끌어가는 데 관심이 모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목표가 비전통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경제 발전을 위해 정책을 정상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한 박근혜정부와 어떻게 균형감을 유지하느냐가 중요한 숙제다. 한은법에 명시된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지켜내면서 경제 성장의 한축을 담당하느냐에 따라 한은의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총재가 직면한 현안 중 하나는 미국 양적완화 축소와 금리 정상화에 대비한 통화정책을 어떻게 펼칠 것이냐다. 지난 1월 미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일부 위원은 기준금리를 지금까지 제시해온 것보다 ‘상대적으로 빨리’(relatively soon) 인상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美테이퍼링 대응·국내 가계부채 등 현안 산적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세계경제연구원 주최 강연회에서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해 주목을 끌었다. 펠드스타인 교수는 “최근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낮아 연준이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고 있지 않다. 물가가 얼마나 빠르게 상승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1%대였던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960년대 후반 5.5%, 1970년대 중반에는 11%를 기록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인플레이션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연준이 어떻게 대처할지 분명히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펠드스타인 교수는 강조했다. 미국 기준금리가 예상보다 빨리 오르면 10개월 연속 금리(연 2.50%)를 동결한 한은도 인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격적인 양적완화 축소로 신흥국 시장이 타격을 받고 최근 중국 경기마저 둔화된 가운데 금리 인상은 한국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이 총재는 부총재 겸 금통위원으로 재직할 당시 한은 금통위가 금리를 제때 인상하지 못해 가계부채 문제를 키운 게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섯 차례 금리를 올렸으나 이것이 늦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며 어느 정도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 총재는 “2013년 4월에 금리인하 예상이 많았는데 시장에서 인하 기대가 형성됐다는 것은 중앙은행이 시그널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대와 어긋났다고 시장에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소통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총재의 통화정책 성향은 아직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도 금리정책에 대한 방향성을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신중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는 “물가와 성장의 균형 있는 조합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금리를 결정할 때 가계부채도 고려하겠지만 물가, 경기, 금융시장 상황을 전반적으로 감안할 것”이라고 언급해 정책의 균형감각을 강조했다. 금리 결정에 있어서 매파(강경파)냐 비둘기파(온건파)냐는 이분법적 분류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겠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작년 말로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는 사상 첫 1000조원을 넘었다. 금리를 인상하면 가계부채에 타격을 주고 금리를 인하하면 가계부채가 늘어날 수 있는 ‘금리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총재가 가계부채 문제에 어떤 접근법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한국의 낮은 물가상승률도 이 총재가 숙고해야할 과제다. 한은은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낮다’며 금리를 동결해왔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2013~2015년 물가안정 목표치(연 2.5~3.5%)를 한참 밑도는 1%대 초반에 머물고 있다. 경제계 일각에서는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 총재는 1%대의 낮은 물가상승률에 대해 ‘한은의 예측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기존 물가안정 목표(연 2.5~3.5%)를 수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총재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거시건전성 정책 체계를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금융안정 역할을 강화한 것처럼 한국은행의 정책 수단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최근 한은의 기준금리 결정이 시장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만큼 한은의 위상을 높이고 시장과의 소통에 성공한 총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이 총재의 향후 행보에 시장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