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6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의 첫 세션의 주제는 ‘새로운 경제 현실’이었다. 왼쪽부터 주민 IMF 특별 고문, 아짐 프렘지 인도 와이프로 CEO,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마이클 엘리엇 타임지 국제편집장, 마틴 소렐 WPP 회장, 짐 털리 언스트&영 회장.
1971년부터다. 매년 1월 말이면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평지 ‘다보스’는 전 세계에서 올라 온 최고의 엘리트들로 북적인다. 경제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아이디어들과 이데올로기들이 이곳 다보스에 쏟아져 왔다. 바로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WEF), 속칭 ‘다보스포럼’ 얘기다. 다보스포럼은 매년 400여개의 세션(1인 스피치 및 패널 토론 등) 속에서 각국의 경제 리더들이 서로 감정을 섞어 왔던 장이다. 특히 다보스포럼이 유명해진 것은 유럽 각국의 외교관들이 행사장 주변에서 비공개 모임을 가지며 각종 현안들로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년 뚜렷한 언어로 일관된 메시지를 던져왔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은 언제나 옳다’, ‘자유무역은 후진국에게도 이익이다’라는 메시지들이다. 다보스를 하나의 커다란 축구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무대에서 뛰는 축구선수들은 대부분 유럽,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보스에서 향후 축구의 룰을 세팅하는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올해 다보스포럼은 판이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운 경제현실, 그리고 공통규범(Shared Norms in New Reality)’이라는 제목부터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스스로 과거의 경제현실을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다보스포럼이 왜 달라졌는지를 5가지 측면에서 추적해 보자. 그러면 자연스레 올해 다보스포럼이 전 세계 경제에 무엇을 시사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3스피드(three speed) 이론
주민(朱民) IMF 특별 고문은 첫날 메인 세션인 ‘새로운 현실’에서 “전 세계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속도에 따라 글로벌 리스크도 이동하고 있다”며 ‘3가지 속도(three speed)론’을 펼쳤다.
“전 세계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속도에 따라 글로벌 리스크도 이동하고 있다.”
주민(朱民) IMF 특별고문은 다보스포럼 첫날 메인 세션인 ‘새로운 현실’에서 전 세계 경제의 ‘3가지 속도(3speed)론’을 펼쳤다. 그는 “올해 이머징 경제는 6% 이상 성장하고 미국은 3%의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며 “반면 유로존의 성장률은 2% 미만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말은 올해 다보스포럼에서 가장 주목받은 키워드 중 하나로 떠올랐다.
과연 2011년 다보스포럼은 올해 신흥국의 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변모했다. 과거 유럽과 미국 참석자의 판이었던 다보스포럼에서는 중국, 인도 등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중국 측 참석자는 10년 전의 5배인 66명으로 성장했다. 메인 폐회식 저녁행사도 인도 정부에서 800만 달러를 들여 주관했다. 다보스에는 하루라도 인도의 전통음악이 그친 날이 없었다. 매일 행사장 부근에서 인도 정부측이 주최하는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보스 현장에서 오가는 말들 속에서 드러나는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조동성 서울대 교수는 “메인 세션에서 주민 IMF 특별고문 한 사람이 나머지 서양 연사들을 모두 압도해 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아시아 연사들의 발언력이 높아졌고 질적으로도 향상됐다는 얘기다. 존 페라로 언스트&영 COO는 “어느 나라 또는 어느 지역이 다른 곳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은 버려야 한다”며 “아시아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세션 토론장에서도 유럽에서 온 기자들이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언제까지 존속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쏟아냈지만 어느 연사도 “오래 가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작년만 해도 다보스포럼에서는 유럽에서 온 연사들이 “국가자본주의는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는 몰락할 것”이라고 비판해 왔지만 올해는 쏙 들어갔다.
모두 이미 선진국 경제가 성장 속도 측면에서 뒤쳐져 버렸기 때문이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의 프레드 벅스타인 이사는 “이머징 경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고성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이는 이머징 시장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미 전 세계 구매력의 50%를 넘어선 이머징 경제 규모가 향후 10~20년 뒤에는 3분의 2 수준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성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주를 이뤘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선진국 경제는 막대한 규모의 민간 및 공공부채 때문에 저성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앞으로 5년간 부채문제 해결에 따른 성장 정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마틴 소렐 WPP 회장은 <매일경제>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경제를 축구에 비유해 보자. 4부 리그로 나눈다면 나는 1부 리그를 중국, 인도 등 아시아라고 본다. 2부 리그는 미국, 3부 리그는 유럽, 4부 리그는 일본이다. 1부 리그를 달리는 선수들에게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보스포럼의 변모를 ‘윔블던 효과’로 비유했다. 테니스의 발상지 영국 윔블던에서 영국 선수들은 모두 퇴장하고 나머지는 외국 선수들로 메워진 것처럼 다보스포럼 역시 주전 선수들이 아시아 측 인사들로 채워졌다는 얘기다. 이미 전 세계 경제의 주전은 교체됐다. 다보스포럼 참석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게 됐다.
리스크, 유럽으로 집중
다보스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변화는 “과연 다보스포럼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심각하게 떠올랐다는 점이다. 유럽 위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의 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첫째는 유로화 통화의 위기이며, 둘째는 인근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위기다. 그 안전하다던 스위스조차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위기의 진동 때문에 벌벌 떨 정도였다.
5일 일정으로 다보스를 취재한 기자는 다양한 인사들에게 유럽 재정위기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조심스러운 낙관론(Cautious Optimism)’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낙관론’에 방점을 찍었던 사람은 유럽 위기설에 대해 강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뿐이었다. 나머지는 ‘조심스러운’이라는 단어에 더 강한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하마다 준이치 도쿄대 총장은 기자에게 “정치인들의 말과 현실은 언제나 다르다. 나는 그들의 말을 항상 뒤집어 보는 습관이 있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론에 비친 다보스 주요 인사들의 코멘트는 “유럽 재정위기 문제는 크지 않다”는 쪽이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손을 내저으며 “유로화는 유로존 그 자체다. 절대 유로가 무너지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다. 장 끌로드 트리쉐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로존의 경제회복은 확인됐다(Confirmed)”고 표현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0년이 유로화 고난의 해였다면 2011년은 유로화 재탄생 원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드러난 ‘낙관론(Optimism)’이었다.
하지만 다보스포럼은 철저한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속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유럽 재정위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Cautious)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유럽과 지리상 가까운 북아프리카의 소요사태가 포럼 기간에 맞춰 뉴스로 중계되자 조바심은 극대화됐다. 다보스에서 2011년을 위협할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정학적 위험(Geopolitical Risk)’이 지목받은 이유도 사실 이집트나 튀니지 사태가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앞으로 정치적 압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며 “이집트 등에서 보이는 소요사태는 단지 아프리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등 다른 유럽으로도 확산될 수 있다”고 했다. 회계 컨설팅 회사인 언스트&영은 “인플레이션, 더블딥, 과잉규제 등의 문제보다 2011년을 뒤흔들 최대 위험 요인은 바로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는 시장 붕괴 위기라고 일갈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 아프리카의 지정학적 위기 등은 모두 바로 다보스가 속해 있는 유럽을 겨냥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G-제로 시대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세계 경제는 경기 상승과 하강의 위험이 맞서고 있는 ‘반쯤 물이 차 있는 컵(Half Full Cup)’과 같다”고 진단했다.
다보스포럼이 언제나 해법을 제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처럼 ‘해법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만 그친 적도 드물었다. 이 역시 다보스포럼의 큰 변화 중 하나다.
이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바로 ‘G-20 무용론’ 또는 ‘G-제로 시대’라는 단어다. G-제로란 글로벌 이슈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리더십을 발휘할 국가가 없다는 뜻이다. 전 세계에 생중계된 다보스포럼의 첫 공개세션에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교수가 이 말을 꺼내면서 일약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으로 그는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은 경기 회복과 재정적자 등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상황이고 신흥국은 계속 신흥국에 머무르길 원하기 때문에 국제적 문제를 책임질 리더십이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매일경제>는 그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아래와 같은 전망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일본·유럽 등 기존에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했던 국가들이 현재 자국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향후 전 세계 시장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글로벌 리더십이 부재한 G-제로 상태는 2013년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 때문에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 이슈는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중국이 그렇다고 지배력을 강화할 수도 없다. 인도가 중국에 맞먹을 만큼 성장해 양국은 심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또 중국은 빈부격차나 도시·농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는 미국과 동등한 위치까지 자리 잡기 힘들 수 있다.”
올해 G20 의장국인 프랑스마저 G20 리더십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경장관은 G20 그룹에 참여하지 못한 170개 나라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범위 확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가르드 장관은 “나머지 170개 나라가 볼 때 G20는 대표성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G20에서는 당장 G2로 꼽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 불균형마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리더십 부재 상태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 현재 가장 첨예하게 맞붙고 있는 지점이 바로 무역 불균형과 위안화 절상 문제임을 감안하면 이에 대한 논의들이 이번 다보스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주민 IMF 특별 고문은 “미국이 경제적으로 회복되면서 성장하면 중국이 수출을 늘리면서 무역 불균형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전 세계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서는 중국도 내수 성장을 촉진하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중국 측도 곧바로 “앞으로 우리도 수입을 늘릴 것”이라고 화답했다. 다보스포럼에서 최고 주목받은 인사 중 하나인 천더밍 중국 상무부 장관은 “미국의 대(對) 중국 수출은 5년 후 2000억 달러로 현재의 두 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장관급 고위 관리가 특정 국가에서의 수입을 늘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늘어날 미국 수입품으로는 원자재, 기술, 기계류, 소비재 등이 꼽혔다. 천 장관은 “중국이 적극적인 수입 확대 정책을 펼치면 10년 뒤엔 중국 수입액이 현재 세계 무역액 수준을 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미국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톱니바퀴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G-제로로 이해할 수 있다.
Black, not Green
현장에서 본 다보스포럼은 ‘녹색’을 표방하고 있었다. 전에는 종이로 나눠줬던 행사 안내 책자들이 이제는 희망자에 한해 USB로 대체됐다. 종이 낭비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 PC에서 파일을 열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취리히에서 다보스로 입장하는 차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녹색’ 티켓을 부여받았다. 탄소저감을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녹색 기술 또는 녹색 산업을 화두로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색’의 석유와 식량 가격에 관심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블룸버그>는 “다보스에서는 2011년을 칠할 색깔은 녹색이 아니라 검정색이라는 전망이 팽배하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다보스포럼에 참가한 연사들은 올해 원자재 가격 상승 전망에 대해 거의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였다. 세계 최대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미탈의 락시미 미탈 CEO는 이날 “철강을 비롯한 원자재에 대한 신흥국가들의 수요는 지금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또 머스크의 닐스 앤더슨 CEO는 “컨테이너 시장이 올해 8% 이상 성장할 것”이라며 “실제로 올해 말이 되면 성장률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에 물류비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원유를 비롯한 천연자원 부국인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자국 내 테러 참사에도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경제성장률 10%를 달성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열린 아프리카 관련 세션에서는 천연자원에 대한 많은 관심으로 인해 60명용 공간에 100명 이상이 몰려 입장하지 못한 참가자들이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일까지 생겼다. 미국 최대 알루미늄 생산업체인 알코아의 클라우스 클라인펠트 CEO는 “2020년이 되면 전 세계의 금속류 수요가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경우 지난해 소비량의 21%, 올해 소비량의 13%만큼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런 전망치를 산출했다.
향후 원자재 가격 상승은 ‘원자재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식품 가격이 앞으로 계속 오르면 다음 경제전쟁(Next economic war)은 환율이나 무역이 아니라 원자재 시장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 소로스는 “향후 2~3년간 원자재 가격은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과연 컵은 반쯤 차오른 것인가?
분명히 전체적인 전 세계 경제 전망은 다소 나아지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나아진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미지수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세계 경제는 경기 상승과 하강의 위험이 맞서고 있는 ‘반쯤 물이 차 있는 컵(Half Full Cup)’과 같다”고 진단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쯤 물이 차 있는 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반쯤 물을 따르다 만 컵’과 다를 바 없다. 과연 지금 세계경제는 반쯤 차 오른 것인가? 아니면 반쯤 따르다 만 것인가?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매년 다보스포럼이 열리기 직전 기업 경영자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설문조사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올해 발표 결과는 ‘반쯤 따르다 만 물컵’을 연상하게 했다. 모두 1201명의 기업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는데 응답자의 48%가 향후 1년간 회사의 성장에 대해 ‘매우 확신한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CEO들이 21%만 ‘매우 확신한다’고 답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경기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다는 낙관론이다.
폴 불케 네슬레 CEO는 “우리는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고, 웨이 지아후 중국해운그룹 회장 “경제가 분명한 회복의 경로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낙관론의 원인은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주요 신흥국의 성장 전망 때문이다. PwC의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0%가 향후 1년간 아시아에서 그들의 사업 기회 확대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중남미(84%), 아프리카(75%), 중동(72%)의 잠재력도 큰 것으로 평가됐다. 제라드 라이온스 SC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030년까지 글로벌 GDP는 143조 달러로 팽창하면서 ‘슈퍼 사이클’이 도래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슈퍼 사이클이란 새로운 거대 경제 국가들이 출현하면서 무역, 투자, 기술혁신이 증대함에 따라 한 차례 전 세계의 고도 경제 성장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의 신조어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식품 가격이 앞으로 계속 오르면 다음 경제전쟁(Next economic war)은 환율이나 무역이 아니라 원자재 시장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처럼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곳들도 다보스 무대에 가세했다. 탄자니아, 세네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들은 직접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아프리카가 지난 10년간 연평균 5%에 달하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며 “인구 10억 아프리카 시장의 잠재력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자원시장과 소비시장을 겸비하고 있는 자국에 대한 투자가 높은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선진국들이 프런티어 마켓과의 동반성장(Inclusive Growth)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몇몇 국가나 산업별로 보면 ‘반쯤 찬 물컵’이 아니라 ‘반쯤 따르다 만 물컵’과 같아 보이는 곳들도 눈에 띄었다. 대표적인 곳이 금융업이다. 2008년 이후 다보스포럼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진 사람들은 글로벌 금융회사의 세일즈맨, 그리고 미국의 정치인들이다. 그 이전만 해도 다보스는 위의 두 부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었다. 금융회사 세일즈맨들은 각종 자료를 들고 다보스를 찾아오면 돈을 벌기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 미국의 정치인들 역시 선거자금 모금이나 정견 발표에 다보스는 좋은 자리였다. 빌 클린턴이 2000년도 다보스를 방문하면서 이후 미국 대통령들도 계속 다보스를 찾았다.
하지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2008년 이후부터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금융회사의 경우 국민들의 혈세로 구제금융을 받았기 때문에 다보스에서 흥청망청 쓰는 모습이 결코 여론에 좋게 비춰지지 않았다. 미국 정치인들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국 경제를 더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올해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들은 다보스라는 국제 경제 무대의 컵에서 흘러내려 떨어진 셈이다.
[신현규 / 매일경제 지식부 기자 haneul9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