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굴착기가 암반을 깎아내던 굉음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맑고 푸른 물이 차오르더니 에메랄드빛 호수가 됐다. ‘속세와 떨어진 유토피아’라 불리는 ‘무릉별유천지’의 시작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자리는 바로 그 당시에 문을 연 쌍용C&E(옛 쌍용시멘트)가 석회석을 채광하던 광산(무릉 3지구)이었다. 50여 년의 채광 작업을 마치고 푸른 호수를 품게 된 광산은 이제 한 해 수십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매년 6월에 열리는 라벤더 축제에만 10만여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그럼 9월은 어떨까. 늦여름의 유토피아는 산 너머 잡힐 듯 보이는 동해의 시원한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라벤더 정원을 정리하고 새로운 꽃밭을 일구는 손길도 분주하다. 가을맞이란 게 이런 걸까.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1357m)과 청옥산(1407m) 자락에 안기듯 자리한 이곳은 ‘하늘 아래 경치가 최고 좋은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문 닫힌 광산에 304억원의 국비와 지방비가 투입돼 107만㎡의 복합체험관광단지를 조성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싶지만, 호수와 산등성이를 잇는 산책로(동해소금길 제3코스, 무릉별유천지 옛길)에 서면 산업 유산과 자연이 교차하며 색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지금도 쌍용C&E 동해공장이 자리한 삼화동 일대는 석회석 광산을 개발하며 이름을 알린 곳이다. 무릉3지구는 이후 1978년 부터 2017년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굴착기와 발파음이 끊이지 않던 채석장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대의 트럭이 오가며 시멘트 생산의 핵심 원료인 석회석을 공급했다. 그 땅이 버려진 건 2017년 이후. 그런데 채광을 멈추고 모든 장비가 철수한 웅덩이에 지하수와 빗물이 차오르더니 석회석 성분과 어우러지며 에메랄드빛 색조를 띠기 시작했다.
청옥호(靑玉湖)와 금곡호(金谷湖)라 이름 붙은 두 호수는 그렇게 태동한다. 어떤 이는 기적이라 했고, 다른 이는 선물이라 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게 아니라 시간과 자연이 협업해 빚어낸 우연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해시가 그 우연에서 기회를 봤다. 동해시와 쌍용C&E, 중앙정부가 협력한 ‘무릉권역 상생 복구 방안’ 사업은 4년간 공들여 진행되며 무릉별유천지를 갈고닦는다. 그렇게 2021년 11월, 무릉3지구는 새로운 손님으로 트럭 대신 관광객을 맞았다.
이곳에서 놓쳐선 안 될 산책로는 ‘동해소금길 제3코스’다. 이름하여 ‘무릉별유천지 옛길’. 약 5㎞에 이르는 길은 과거 이 지역 사람들이 실제로 소금을 지고 다니던 금곡동 옛길을 따라 그대로 조성됐다. 바다에서 나는 소금이 산간 내륙으로, 산에서 나는 임산물이 해안으로 오가던 일상의 길이 지금은 푸른 호수를 곁에 두고 걷는 감성 산책로가 됐다. 길은 완만하다. 급격한 경사나 험한 바위 없이 숲길과 호숫가 데크, 옛 광산 도로의 흔적이 교차하며 이어진다. 발밑의 돌 하나하나가 수십 년 전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의 발자국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와 자연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걷는 이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산책을 끝내고 들르게 되는 별마루 카페는 어쩌면 최종 보상 같은 공간이다. 시그니처 메뉴는 ‘콘크리트 빙수’. 삽 모양의 숟가락으로 떠먹는 빙수 위에 콘크리트 가루처럼 흩뿌린 토핑이 색다르다. SNS상에선 이미 유명한 무릉별유천지의 명물 먹거리다.
무릉별유천지의 심장은 역시 두 개의 호수다. 청옥호와 금곡호는 햇빛의 각도에 따라 청록에서 비취, 때로는 깊은 남빛으로 변한다. 두 호수를 둘러싼 웅장한 석회석 절개면은 이 풍경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수십 년의 채광이 남긴 수직 절벽은 1억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지층을 드러내며 새삼 세월의 두께를 실감하게 한다. 청옥호에선 라벤덕이라 불리는 전동 오리배, 파티보트, 문보트, 페달카약까지 다양한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다. 이곳의 대표 시설이자 국내 최초로 설치된 왕복형 글라이딩 시설 ‘스카이글라이더’도 그중 하나. 총길이 777m, 최고 125m 상공에서 호수를 가로지르는 이 레저 시설은 최대 4명이 탑승 가능한 왕복형 구조로 설계됐다. 가는 길과 오는 길에서 각각 다른 각도로 청옥호와 금곡호, 두타산과 청옥산의 능선을 둘러볼 수 있다.
짜릿한 스릴의 즐거움을 한 단계 낮추면 오프로드 루지가 기다린다. 총 구간 1.2㎞, 평균 운행 시간 15분의 레일 위 카트 체험은 과거 채석장의 임시도로로 쓰이던 길을 그대로 활용했다. 브레이크와 핸들만으로 구불구불한 코스를 달리는 재미와 함께 달리는 내내 역사 흔적 위를 지나간다는 사실이 묘한 감흥을 더한다. 산악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레일 썰매 알파인코스터, 소나무 숲 사이 300m 곡선형 롤러코스터형 집라인도 이 공간을 채우는 체험 시설이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무릉별유천지가 가장 유명해지는 시기는 5500평 규모의 라벤더 정원이 보랏빛 물결로 물드는 6월 축제 기간이다. 폐광지의 보랏빛 변신이란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시기다. 그럼 그 이전과 이후는 어떨까. 봄이면 벚꽃과 산수유,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에메랄드 호수, 가을은 단풍, 겨울은 설경이 공간을 채운다. 꽃이 졌다고 라벤더 정원이 없어진 건 아니다. 너른 정원을 가득 메운 향은 사계절 내내 객을 반긴다. 살짝 잎을 따 손에 부비면 한동안 향이 코끝을 떠나지 않는다.
[글 · 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