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 민감 산업이었다. 스마트폰과 PC 판매량이 꺾이면 가격은 급락했고 공급과잉이 시작되면 호황도 오래가지 못했다. 시장은 이를 ‘메모리 사이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공식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AI 데이터센터 경쟁이 본격화되자 메모리 반도체는 더 이상 소비재용 부품이 아니라 AI 인프라를 움직이는 핵심 자산으로 떠올랐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그래픽처리장치(GPU)만큼이나 메모리 확보에 사활을 걸기 시작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으로 이에 화답했다. 특히 이번 호황은 고대역폭메모리(HBM)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서버용 D램과 범용 메모리, 낸드플래시까지 가격이 동반 급등하며 산업 전반이 ‘전면 상승장’에 들어서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가격보다 물량 확보가 우선”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문제는 공급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증설에 나서고 있지만 HBM과 첨단 메모리 생산 확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AI 수요는 폭증하는데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업계에서는 공급부족이 2027년 이후 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지금의 호황을 두고 엇갈린 시선이 교차한다. AI 시대가 메모리 산업을 완전히 새로운 구조로 바꾸고 있다는 기대와, 결국 공급 확대 이후 과거처럼 급격한 조정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계론이 동시에 나오는 것이다. 지금의 기록적 실적이 ‘이익의 정점’인지, 아니면 더 거대한 슈퍼사이클의 시작인지를 두고 메모리 산업이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올해 1분기 실적은 메모리 산업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회사는 나란히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고 수익성은 엔비디아와 TSMC를 웃도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과거 스마트폰과 PC 경기 흐름에 따라 움직이던 메모리 산업이 이제는 AI 데이터센터 경쟁의 핵심 인프라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은 올해 1분기 매출 81조7000억원, 영업이익 53조7000억원을 기록했다. 전 사 영업이익의 94%를 DS 부문이 책임졌다. 시장에서는 메모리 사업부 영업이익률만 70~75% 수준에 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매출 52조5763억원, 영업이익 37조 6103억원으로 사상 처음 분기 매출 50조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률은 72%를 기록했다. 이는 엔비디아(65%)와 TSMC(58%)보다 높은 수준이다.
실적 배경에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있다.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증설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GPU뿐 아니라 HBM과 서버용 D램, 고성능 SSD 등 메모리 확보 경쟁도 동시에 치열해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AI용 고부가 메모리 판매 확대가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시장에서는 메모리 산업의 수요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는 스마트폰과 PC 출하량에 따라 가격이 급등락하는 전형적인 경기 민감 산업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지금은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장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AI 산업이 대형 모델 학습 중심에서 실시간 추론 중심의 ‘에이전틱 AI’ 단계로 진화하면서 메모리 수요 기반이 D램과 낸드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확대도 시장 변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알파벳과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아마존 등은 올해 AI 관련 자본지출(CAPEX) 규모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시장에서는 이들 기업의 올해 AI 인프라 투자 규모 합산액이 7000 억달러를 웃돌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가 더 이상 단순 부품이 아니라 AI 인프라 경쟁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의미다. 이번 메모리 호황이 과거와 다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상승세가 특정 제품군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시장은 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중심의 제한적 호황을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버용 D램과 범용 D램, 낸드플래시까지 가격이 동반 급등하며 메모리 산업 전반이 ‘전면 상승장’에 진입하는 모습이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PC용범용 D램(DDR4 8Gb 1Gx8)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16달러를 기록했다. 전월 대비 23% 상승한 수치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가격이 약 10배 뛰었다.
낸드플래시 가격 상승세도 가파르다. 메모리카드·USB용 낸드 범용 제품(128Gb 16Gx8 MLC)의 4월 평균 고정 거래가격은 24.16달러로 전월 대비 36% 넘게 올랐다. 16개월 연속 상승세다.
시장에서는 추가 가격 상승 가능성에도 무게를 싣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2분기 범용 D램 계약 가격이 직전 분기 대비 58~63%, 낸드는 70~75%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일부 PC용 D램과 서버용 D램 제품군은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상승폭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엔터프라이즈 SSD 역시 50% 이상 가격 상승 전망이 나온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HBM 중심의 생산 전략 변화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수익성 높은 HBM과 서버용 D램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범용 메모리 공급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HBM은 일반 D램보다 칩 크기가 크고 공정 난도가 높아 동일 웨이퍼를 투입해도 생산량은 크게 줄어든다. 업계에서는 “HBM이 범용 D램 생산라인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결국 AI 메모리 수요 확대가 범용 메모리 공급 부족으로까지 이어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시장에서는 서버와 스마트폰, PC용 메모리 물량 확보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일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장기 공급 계약과 선급금 지급까지 감수하며 물량 확보에 나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가격 상승세는 이제 반도체 산업을 넘어 완제품 시장까지 흔들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최근 노트북과 태블릿 가격을 잇따라 인상했고 스마트폰과 게임기 가격도 줄줄이 오르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메모리 산업뿐 아니라 글로벌 IT 가격 질서 전반을 흔드는 ‘칩플레이션’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지금의 메모리 호황을 두고 엇갈린 전망이 동시에 나온다. 한쪽에서는 AI 시대가 메모리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이클이 과거와는 다른 장기 슈퍼 사이클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결국 메모리 산업 특유의 공급 확대와 가격 조정 국면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경계론도 여전하다.
현재 시장 분위기는 장기 호황론에 무게가 실리는 모습이다. 실제 주요 시장조사업체들은 공급부족이 최소 2027년 이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옴디아는 올해 메모리 시장 규모가 기존 전망치를 크게 웃도는 6700억 달러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고, 트렌드포스 역시 D램과 낸드 가격 강세가 내년 이후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제시했다. JP모건은 메모리 출하량과 가격 강세가 2028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수요 구조 변화가 과거와 다르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 메모리 호황은 스마트폰과 PC 교체 수요, 가상자산 채굴 같은 단기 이벤트에 크게 좌우됐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경쟁을 위해 수년 단위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메모리 산업이 소비재 경기 사이클보다 AI 인프라 투자 사이클과 더 강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시장 구조 변화도 뚜렷하다. 최근 메모리 시장에서는 장기공급 계약과 선급금 지급, 초단기 가격 재협상 같은 과거에 보기 어려웠던 계약 형태까지 등장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산업이 범용 기성품 시장에서 사실상 주문형 공급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공급사가 가격과 물량 주도권을 동시에 쥐는 ‘슈퍼 을’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위험 요인도 적지 않다. AI 투자 확대 속도가 둔화되거나 주요 메모리 업체들의 증설 효과가 본격화될 경우 시장 분위기가 급격히 바뀔 가능성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HBM과 첨단 메모리 생산 확대를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고, 미국 마이크론 역시 공격적인 증설에 나서고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인 CXMT와 YMTC의 추격도 변수다. 실제 시장은 아직 메모리 산업을 완전히 ‘장기 성장 산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등했음에도 주가수익비율(PER)은 엔비디아나 TSMC보다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시장이 여전히 메모리 산업 특유의 변동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한 가지 변화만큼은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메모리 반도체는 더 이상 단순 부품 산업에 머물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제 시장의 관심은 단순히 ‘이번 호황이 언제 끝나느냐’가 아니라, 메모리 산업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 산업으로 얼마나 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