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박세당 고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추구하였던 이상향의 전형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거주 공간을 조성하면서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박세당은 세상에서 벗어나 사색과 학문을 하는 공간으로 퇴계의 도산구곡, 율곡의 고산구곡과 같은 별업(別業)을 두고자 하였다. 별업은 집 인근에 원림을 조성하고 정자 건물을 세우는 형식을 취하는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던 박세당은 도연명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꿈꾸었다. 고택이 있는 석천동에 세상과 절연된 별천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꿈을 꾸며 남구만의 글씨를 받아 바위에 ‘수락동천(水落洞天)’을 새겼다.
동천(洞天)은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명산승경을 말한다. 박세당의 석천동 고택은 수락산을 주산으로 하고, 도봉산 선인봉을 안대로 삼았다. 수락산에서 갈라져 내려오는 좌청룡과 우백호 사이에 서계가 흘러 중랑천에 이른다. 석천동은 외부에서 진입하려면 수락산과 도봉산 사이 좁혀져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꺾어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입구가 좁고 계곡이 긴 석천동은 수락산 일대에서 공간적으로 가장 깊은 곳이다. 그러나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하고 거주 공간을 배산임수로 배치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은거의 최적지라 할 수 있다.
박세당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다. 인조반정 공신 박정(朴炡)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4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녹록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다. 17세에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과 혼인하면서 당시 습속에따라 서울 처가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마침내 1660년(현종1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서 서울 양덕방(陽德坊·종로구 계동 일대)에 새집을 장만하였다. 그러나 새로 이사 온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아내 의령 남씨가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선비에게 시집을 와서 15년간 뒷바라지를 하여 지아비를 문과에 급제시키고 두 아들을 낳아준 고마운 아내였다. 수락산 서쪽 기슭 장자곡에 터를 잡아 장례 지내고 그곳의 천석(泉石)을 사랑하여 동네를 석천동(石泉洞)이라 하고 마침내 터를 잡고 살 뜻을 품게 되었다. 박세당은 1668년 봄에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 박정의 사패지(賜牌地)였던 석천동에 은거하였다. 중국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이 40세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고향으로 돌아갔듯이 박세당도 같은 40세에 수락산 아래에 들어와 ‘석천동인(石泉洞人)’이 되었다. 박세당은 주변의 자연에 이름을 붙여서 인격체로 인식하였다. 바위에 이름을 짓고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여서 주변 자연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우선 자신의 집을 둘러싼 마을 일대를 석천동(石泉洞)이라 하고 바위에 글자를 새겨두었다. 그런 다음 산등성이는 동강(東岡), 시내는 동계(東溪), 개울에 흐르는 물은 잠수(潛水), 집 뒤편의 언덕은 잠구(潛丘)라 이름 붙였다. 동강과 동계는 석천동이 방위상 도성의 동쪽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었는데, 후일 박세당은 이곳이 수락산 서쪽이라는 새로운 방위 개념을 적용하여 동계(東溪)를 서계(西溪)로 고치고 스스로 자호(自號)하였다.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박세당의 집은 5칸 규모로 소박한 초옥이었다. 개울가에 지은 집에는 울타리를 치지 않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집 주위에 둘러 심고 오이를 심고 밭을 개간하고 땔감을 팔아 생활하였다. 농사철에는 늘 밭에서 지냈으며 가래를 메고 쟁기를 진 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박세당은 이 같은 농업 현장에서의 실습과 경험을 바탕으로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을 저술하여 농가에서 필요로 하는 필수적인 지식과 상식들을 조목조목 정리함으로써 백성을 위하는 실학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세당이 자연과 교감하면서 심신을 달랬던 일상의 공간은 취승대(聚勝臺)였다. 취승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동계의 좌우에 4개의 자연석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시를 짓는 곳이라 하여 음대(吟臺)라고도 하였다. 취승대는 아침과 저녁으로 즐거움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사철마다 제각각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봄에는 동대에서 꽃을 감상하고 여름에는 남대에서 바람을 쐬며, 가을에는 서대에서 달을 맞이하고 겨울에는 북대에서 눈을 완상(玩賞)하였다. 학문을 배우고 강론하는 강학공간은 궤산정(簣山亭)과 관란정(觀瀾亭)이다. 박세당은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옴에 이를 물리치지 않고 수용하여 계곡 위에 서실(書室)을 지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학업을 청하는 이가 서재를 가득 메울 정도로 증가하자 궤산정(簣山亭)과 관란정(觀瀾亭)을 건립하여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학생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치기도 하고, 제술(製述)을 지도하고 문답(問答)하면서 종일토록 강론에 전념하였다.
박세당은 외부와의 교유도 극도로 자제하면서 국왕의 부름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석천동으로 은거한 첫해인 1668년 성절사(聖節使)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것과 1670년 외직인 통진현감을 역임한 것을 제외하면 이조판서, 좌참찬, 판중추부사 등 고위 관직이 수십 차례 내려왔음에도 부임하지 않았다.
두 아들의 죽음으로 정치판에 대한 혐오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1686년 맏아들 박태유(朴泰維)가 병든 몸으로 고산찰방에 부임하였다가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뒤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가 당쟁 중에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36세의 아들을 석천동에 안장한 박세당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석천동에 더욱 깊이 은거하게 되었다. 현재의 박세당 고택은 1846년(헌종 12년) 박세당의 5대손 박종길(朴宗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것이다. 살림집은 본래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 사당 등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바깥사랑채만 남았다.
안채, 안사랑, 행랑채는 바깥사랑채의 북쪽과 서쪽의 공터에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안채가 복원되어 고택의 원형이 살아나고 있다. 현존하는 사랑채의 규모는 전면에서 보아 5칸 크기이다. 온돌방 2칸, 대청 한 칸 등 3칸을 중심으로 죄우에 각각 툇간이 있고 다시 남쪽으로 누마루가 한 칸 부가되었다. 북측면은 한 칸에 전후 각각 툇간이 있는 2칸 규모이고 남측면은 2칸에 전면 툇간이 있는 2.5칸 규모이다. 특히 바깥사랑채는 주산인 동쪽 수락산과 안산인 도봉산 선인봉을 잇는 축선상에 배치하였다. 도봉산 선인봉을 안대로 삼아 서향을 하고 있지만 대청과 누마루는 남쪽의 계곡을 향하고 있다. 누마루를 남쪽으로 한 칸 돌출시켜 설치한 것에서 이러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이 누마루의 남쪽 처마에는 ‘관어정(觀魚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계곡물을 바라보는 정자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 뒤에 있는 영당은 1960년대에 건립된 한옥으로 박정과 박세당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주위에 흩어진 안채의 부재를 활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영당에 모셔진 박정의 초상화는 2점이다. 하나는 인조반정 공신에 올랐을때 그려진 것으로 박정의 맏아들 박세규(朴世圭)의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종손이 당쟁으로 역모에 연루되어 집안이 파탄지경에 이르면서 박세당 종택에다 위탁해 둔 것이다. 그리고 1625년경에 제작된 박정의 초상화는 4세에 아버지를 여읜 박세당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앞의 초상화를 모사한 것이다. 한편 박세당(朴世堂)의 초상화는 1690년경 조세걸(曺世傑)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박세당의 모습은 석천동에서 박세당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도연명이나 김시습과 같은 은자(隱者), 가난과 슬픔 속에서도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는 학자(學者), 서예에 대한 남다른 능력과 안목을 가진 예술인(藝術人), 당쟁으로 치열한 정치판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있으면서도 현실 정치와 연결고리를 가지는 산림(山林)으로서의 존재감이 그의 초상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고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서울 부근에 박세당 고택이 현존하는 것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삶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고택들은 대부분 권력자의 집으로 권력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박세당은 일찍이 당쟁으로 치열했던 정치에 혐오감을 느끼고 자연 속으로 들어와 소신을 가진 학자로써, 예술을 사랑하는 예인으로서, 정치판에서는 한걸음 물러나 있으면서도 현실 정치와 연결고리를 가지는 산림(山林)으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의 집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