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중국이 우리 앞에 있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반도체 하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매일경제 이코노미스트클럽 강연에서 내놓은 뼈아픈 진단이 청중의 온도를 바꿔놓았다. 정부 당국자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 제조업의 열세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인정하는 장면은 흔치 않다.
그는 중국 현장을 다녀온 뒤 “샤오미 전기차 공장을 보고 가슴이 턱 막혔다”라고 했다.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며 76초마다 차량 한 대가 생산되고, 자동화율은 91%. 재고를 쌓아두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면 곧바로 생산·출하되는 방식이었다. 한국이 노사 갈등과 규제 논쟁으로 시간을 쓰는 동안, 중국은 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제조 현장을 다시 설계하고 있었다. 장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그 격차는 ‘뒤쫓는 수준’이 아니라 ‘앞서 있는 현실’이었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중국이 강해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경제가 그 강해진 중국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성장 구조가 한쪽으로 더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 숫자에서 반도체의 존재감은 압도적이고, 특히 인공지능 붐이 만든 메모리 호황이 전체의 표정을 좌우한다. 호황이 계속되면 다행이지만, 사이클이 꺾일 때의 충격이 과거보다 커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정부발표에 따르면 2025년 한국 수출은 사상 처음 7000억달러를 넘어섰고, 반도체는 그 중심에 있었다. 연간 수출 기록 경신은 분명 고무적이다. 다만 수출 총량이 커질수록 중요한 질문이 따라붙는다. ‘무엇이 늘었는가’뿐 아니라 ‘어떤 구조로 늘었는가’다. 반도체가 전체 성적표를 떠받칠 때, 다른 산업이 동시에 탄력을 받는다면 지속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러나 반도체가 증가분을 과도하게 흡수하면, 통계상 호황과 현장의 체감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이 간극은 단지 심리의 문제가 아니다. 메모리 중심의 호황은 공정 고도화와 함께 장비·소프트웨어·핵심 IP의 해외 의존도를 높이고, 그만큼 국내 밸류체인에 남는 부가가치가 기대만큼 넓게 퍼지지 않을 수 있다. 수출이 좋고 기업 이익이 늘어도, 고용·내수로 번지는 속도가 더딜 수 있는 이유다. ‘성공한 산업 하나가 전체를 끌어올린다’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공식이 자동으로 사회 전반의 활력을 보장하던 시대와는 환경이 달라졌다. 숫자가 좋아질수록 오히려 산업구조의 쏠림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 여기 있다.
AI 반도체 호황을 말할 때 사람들은 먼저 GPU를 떠올린다. 하지만 한국이 강하게 체감하는 수혜는 GPU 자체보다 그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주변부에서 발생한다.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고용량 D램, 그리고 이를 고성능으로 묶어내는 첨단 패키징이 AI 시대의 핵심 구성요소로 부상했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면 연산 칩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메모리와 인터커넥트, 냉각과 전력 설비까지 연쇄적으로 수요가 확대된다. AI 붐이 단지 ‘반도체 수요 증가’가 아니라 ‘산업 인프라 수요의 동시 증가’로 번지는 이유다.
이 변화는 한국에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던진다. 하나는 경쟁력의 상단이 어디로 이동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고성능 컴퓨팅의 성능은 단일 칩의 공정 미세화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메모리를 얼마나 가까이 붙이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열을 관리하며, 시스템 전체에서 효율을 끌어올리느냐가 관건이다. 다른 하나는 ‘물리적 제약’이 성장의 상한선을 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전기를 먹고 자란다. 전력망과 계통, 냉각과 용수, 인허가와 지역 갈등 같은 요소가 기술 로드맵만큼 중요해진다. 호황의 엔진이 커질수록 연료 공급 체계도 동시에 강화돼야 한다는 요구가 더 선명해진다.
AI 수요가 장기적으로 확대된다는 전망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사이클 산업에서 ‘장기 수요’와 ‘단기 가격’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인 리스크는 AI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AI가 계속 성장하더라도 메모리 가격이 꺾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수요가 분명하면 공급은 따라붙고, 공급이 따라붙는 속도가 어느 순간 수요의 속도를 앞지르면 가격 협상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메모리 산업이 반복해온 장면이다.
HBM은 AI 시대에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지만, 바로 그 독보성이 투자 경쟁을 더 자극한다. 생산라인 전환과 증설, 고객사 다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면 초기의 타이트한 수급은 완화되고, ‘호황의 조건’이 바뀐다. 이때 한국 경제가 느끼는 충격은 단순히 한 기업의 수익성이 줄어드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 반도체가 수출과 경상수지, 기업 투자와 주가, 심지어 세수에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에서 가격 조정은 경제 전반의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트리거가 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수요의 편중이다. AI가 메모리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AI 투자 조정의 파급도 커진다. 한쪽으로 몰린 수요는 호황기엔 레버리지처럼 작동하지만, 시장 심리가 흔들릴 때는 반대로 더 큰 진폭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현재 호황을 단순한 ‘호재’로만 소비하기보다 미래의 안전장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한다”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중국의 위협을 이해하려면 ‘중국이 첨단에서 한 번에 뚫고 올라온다’는 서사보다, ‘여러 전장을 동시에 열어 상대의 대응 비용을 높인다’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로봇, 드론, 스마트팩토리까지. 중국은 산업을 하나씩 ‘따라잡는’ 게 아니라 서로 맞물린 생태계를 넓게 깔아 ‘가속’한다. 그 과정에서 데이터가 쌓이고, 그 데이터가 AI를 통해 다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선순환을 만든다.
샤오미 공장 사례가 상징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장의 자동화율이 높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자동화가 데이터와 AI로 운영되면서 ‘현장’이 고도화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주문 즉시 생산·출하 시스템이 돌아가려면 공급망이 촘촘해야 하고, 공정 품질이 안정돼야 하며, 계획과 실행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연결돼야 한다. 이런 구조가 굳어질수록 경쟁력은 단순한 원가가 아니라 속도와 유연성, 품질과 학습 능력으로 정의된다. 한국이 전통 제조업에서 맞닥뜨린 압박도 결국 같은 결을 가진다. 석유화학과 철강 같은 전통산업이 구조조정 압력에 놓인 건 ‘중국이 싸서’만이 아니라, 중국이 규모와 정책, 내수와 공급망으로 시장의 구조 자체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이제 산업재라기보다 전략 자산이다. 미국은 자국 내 생산기지를 늘리고, 첨단 기술의 대중국 유출을 제한하며, 동맹국 기업의 투자와 공급망 선택까지 규칙으로 설계하려 한다. 한국 기업에게 이는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니라 선택지의 제약으로 다가온다.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중국 시장도 무시하기 어렵다. 한쪽 규칙을 충족하려고 움직이면 다른 쪽에서 비용이 튀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글로벌 설비투자 경쟁이 더 거칠어진다.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은 물론, 장비와 소재까지 연쇄적으로 투자 압력을 받는다. 투자 경쟁이 격해질수록 공급망은 더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잉투자와 가격 경쟁의 위험도 커진다. 한국이 메모리에서 수혜를 누리더라도, 설계·파운드리·패키징까지 포함한 종합 경쟁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강점은 더 좁게, 위험은 더 크게’ 작동할 수 있다. 규칙의 전쟁은 기술을 넘어 자본, 표준, 동맹의 구조까지 한꺼번에 움직인다. 그래서 대응도 단일한 정책 패키지로 끝나기 어렵다.
한국 산업정책 논의가 자주 놓치는 부분이 있다. 기술 경쟁의 논리로만 산업을 설명하면, 정작 산업을 굴리는 조건들이 뒤로 밀린다. 그러나 AI 반도체 시대에는 그 조건들이 전면으로 올라왔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전력망과 계통, 송전과 인허가가 ‘확장의 속도’를 결정한다. 전기는 더 이상 비용 항목이 아니라 경쟁력의 구성요소가 됐다. 전기요금의 문제를 넘어, 안정적인 공급과 탄소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조달 체계가 필요해진다. 기업의 투자계획이 ‘기술 로드맵’ 뿐 아니라 ‘전력 로드맵’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시대다.
인재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공정 인력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AI 시대에 더 부족한 건 설계·검증·시스템 아키텍처·소프트웨어 최적화 같은 상단 인력이다. 메모리를 잘 만드는 능력만으로는 AI 산업의 주도권을 쥘 수 없다. 메모리를 가장 비싸고 효율적으로 쓰게 만드는 시스템 설계 능력, 산업 현장에서 AI를 적용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능력이 함께 필요하다. 인재는 단기간에 ‘동원’할 수 없고, 결국 교육과 산업 현장의 접점, 커리어의 매력도, 기업 생태계의 성장 경로가 맞물려야 한다.
제도는 늘 민감한 주제다. 김 장관이 “속도를 못 내는 혁신은 의미가 없다”라고 강조한 배경도 결국 속도전 때문이다. 제도는 산업을 살릴 수도, 늦출 수도 있다. 그래서 더 정교해야 한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5호 (2026년 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