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진과 글로벌 불확실성의 이중고에 처한 국내 주요 기업들이 하반기 미국 투자 전략으로 돌파구 마련에 나선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미·중 갈등, 그리고 미국 내 리쇼어링(reshoring) 기조가 맞물린 가운데 ‘선택과 집중’ 전략이 효과를 거둘지 주목된다.
현재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제조업 부흥 정책과 강경한 보호무역 정책 아래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성, 현대 등 글로벌 기업들은 전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 내 경쟁력 강화를 위한 광폭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시에서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 있고 현대자동차그룹은 조지아주를 중심으로 전기차 전용 공장 가동을 본격화한다. SK그룹 역시 배터리 합작법인을 중심으로 투자를 이어간다.
국내 반도체 대표기업 삼성전자는 하반기 연이어 대규모 공급계약을 따내며 하반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테슬라와 총 22조 8000억원 규모의 시스템 반도체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삼성전자 창사 이래 최대 규모 공급 계약으로 최첨단 공장인 2나노미터 공정이 적용된 제품이다. 특히 미국 1위 전기차 기업 테슬라와의 협력이라는 점에서 수주 상징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소셜미디어(SNS) ‘X’에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공장에서 테슬라의 차세대 반도체 ‘AI6’를 생산할 것이라고 공식화했다. 그는 “165억달러는 최소 금액에 불과하고, 실제 생산량은 그보다 몇 배 더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AI6는 테슬라 전기차의 완전자율주행(FSD)을 위한 고성능 반도체다. 각종 센서로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연산해 복잡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향후 머스크가 생산량이 늘어날 수 있다고 밝힌 것은 테슬라가 개발 중인 휴머노이드 ‘옵티머스’에 활용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무엇보다 이번 계약은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의 독점 구도를 흔들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에 힘을 실어줄 전망이다. 이번 계약으로 TSMC가 주도해 온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테슬라처럼 첨단 인공지능(AI)·로봇용 칩을 요구하는 고객사가 TSMC 대신 삼성전자를 택한 것은 삼성전자의 기술력과 공급력에 대한 신뢰가 입증됐다는 설명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고객사들이 주문이 밀려 있는 TSMC 대신 삼성전자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테슬라는 배터리 시장에서도 한국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과 손잡고 약 6조원 규모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43억 900만달러에 달하는 대형계약이다. 계약 기간은 2027년 8월 1일부터 2030년 7월 31일까지며, 고객사 요청에 따라 최대 7년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업계에서는 계약 규모를 근거로 테슬라에 납품되는 에너지저장장치(ESS)용 LFP 배터리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LG에너지솔루션의 단일 계약 기준으로도 최대 규모다.
앞서 이 회장은 7월 29일 미국 정부와 관세 협상을 중인 한국 정부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D.C.로 떠났다. 이후 현지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미국 내 사업 현황 등을 점검하고 주요 파트너사와 글로벌 비즈니스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번 방미는 7월 17일 대법원 무죄 판결 이후 처음으로 확인된 외부 일정이다.
또한 이 회장의 출장 기간에는 애플과의 계약 체결 소식도 발표됐다. 애플은 지난 8월 6일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팹(공장)에서 혁신적인 새로운 칩을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아이폰 등에 사용되는 이미지센서(CIS)가 공급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계약은 약 10년간 애플 공급망을 독점해온 소니를 뚫고 계약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3단 적층 하이브리드 본딩’ 방식이 적용될 것으로 보이는 새 CIS는 기존 제품 대비 단가가 높게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스템LSI 부문의 수익 개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이 강세를 보이는 LFP 배터리 공급계약 수주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란 평가다.미국의 중국 배터리 업계 견제 속에서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 지역에서 유일하게 LFP 기반 ESS 배터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을 중심으로 ESS 배터리 수주를 활발히 진행해 왔다. 지난 3월 테슬라, 애플 등을 주요 고객사로 두고 있는 글로벌 에너지 관리 업체 델타 일렉트로닉스와 4기가와트시(GWh)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미국 재생에너지 기업 테라젠과 최대 8GWh 규모로 ESS용 LFP 배터리 납품 계약을 맺었다. 앞선 2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는 하반기 북미 ESS시장 공략 계획을 밝혔다.
오는 2028년까지 총 210억달러, 한화 약 28조원을 미국시장에 투자키로 한 현대자동차 역시 광폭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10억달러 중 90억달러는 연산 120만 대가 가능한 생산 능력 확보에 쏟아부을 예정이며 60억달러는 부품 현지화와 차량 원자재인 강철 공급망 구축에 쓰인다. 나머지 60억달러는 자율주행·로보틱스 등 미래 사업에 투입한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 본격 가동에 들어간 현대차의 전기차 전용 공장 ‘메타플랜트‘가 눈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에 들어선 해당 공장은 총 76억달러가 투자돼 연간 30만 대의 전기차 생산을 목표로 가동 중이다. 기아·제네시스 모델까지 생산이 예정된 만큼 향후 북미 시장 공략의 거점 생산공장이 될 전망이다. 또한 루이지애나에 저탄소 강철 생산을 위한 전기 아크로(EAF) 제철소 건설도 추진된다. 연간 270만t 생산 규모로, 이는 현대차의 미국 내 완성차·부품 공장에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고용 효과도 크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투자를 통해 직접 1만 4000명, 간접적으로 10만 명 이상을 고용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더불어 최근 현대차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손잡고 하반기 북미 전략을 구체화했다. 현대차는 향후 GM과 협력해 신차 5종의 플랫폼을 공동 개발하고 이를 공유한다고 밝혔다. 중남미 시장 공략을 위한 중형 픽업, 소형 픽업, 소형 승용,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등 4종과 북미 시장용 전기 상용 밴 등 총 5종의 신차를 함께 개발한다.
특히 그룹사 기준 글로벌 판매량 3·4위로 라이벌 관계인 두 회사가 사업 불확실성이 가장 큰 시점에 손을 잡았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현대차는 미국 관세 이슈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두 회사는 각자 강점이 있는 차급의 플랫폼을 주도적으로 개발한 뒤 공유할 계획이다. GM이 중형 트럭 플랫폼을 맡고, 현대차가 소형 차량과 전기 밴 플랫폼을 주력으로 개발한다.
통상 신차 1종을 개발하려면 4~5년에 걸쳐 수천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업계에선 두 회사가 플랫폼을 공유하면 개발 비용을 절반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고 추산한다. 미국이 던진 고율 관세로 인해 급증한 원가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차는 미국 관세 이슈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지만 업계 해석은 다르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 간 협업 중 가장 긴밀한 형태로 평가받는 이번 계약이 어느 때보다 원가 상승 부담이 가장 커진 시점에 나온 것에 주목한다.
이번 협업이 중남미 시장을 겨냥한 신차에 집중됐다는 점에서 중국 브랜드 견제용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중남미는 BYD(비야디) 등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브랜드가 가장 빠르게 확산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두 회사는 공유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각자 개발한 내·외장을 적용해 판매한다. 2028년 출시가 목표다. 공동 개발 차량의 양산이 본격화되면 연간 80만 대 이상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와 GM은 앞으로 협력 관계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소재, 운송,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동 조달을 추진한다. 주요 부품 등을 공동 구매하면 규모의 경제 효과로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환경을 생각하는 생산 체제를 확장하기 위해 탄소 저감 강판 분야에서도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했다.
SK온은 미국에서 포드, 현대차, 기아 등과 전기차 배터리 합작법인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조지아 커머스 공장은 GM·포드 등과 협력해 대규모 배터리 셀을 공급하며, 총 투자 규모는 100억달러를 상회한다.
특히 조지아주 공장은 수율 개선과 현지화 전략으로 시장 안착에 나서고 있다. SK온 관계자는 “현지 고용과 기술 협업을 통해 미국 전기차 생태계와 함께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통상환경은 변수가 될 전망이다. 미국은 최근 철강·알루미늄 제품 400여 종에 대해 50% 고율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산 자동차와 배터리, 반도체 원자재에도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이미 3%대를 유지하며 연준의 금리정책에도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현지 생산 비중을 늘려 관세 리스크를 줄이는 동시에, 원자재와 부품의 공급망을 미국 내에서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한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는 단순한 ‘공장 건설’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행보다. 현대차는 전기차-강철-부품까지 연결하는 밸류체인을 세우고 있고, 삼성은 반도체와 AI를 접목해 테슬라와의 장기 계약을 성사시켰다. SK는 배터리 합작으로 현지 자동차 업계와 동반성장을 꾀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고율 관세, 정치적 불확실성은 이들 기업의 리스크 요인으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결국 한국 기업들이 현지화와 글로벌 협업을 얼마나 정교하게 병행할 수 있는지가 향후 성패를 가를 것이다.
결국 국내 기업들은 하반기 북미 사업의 성패에 따라 하반기 실적에도 상당한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투자와 현지 고용, 그리고 기술 협업은 기회이자 동시에 부담이 된다는 측면에서 감안해야 할 변수도 많다는 분석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세계 공급망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미국에서의 성패는 곧 한국 기업들의 미래와 직결된다”며 “결국 승부를 피하기보단 정면돌파를 통해 위기 탈출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