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9일,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관세 협상 시한이 다가오고 있다.
한 달 전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모든 유럽산 제품에 최대 5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이래, 협상 테이블에는 무역흑자와 제품규격 같은 전통적 이슈 외에도 다소 이질적인 주제가 올라섰다. 바로 ‘빅테크 규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에 “캐나다가 EU의 디지털세 모델을 따랐다.
EU와도 이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겉으로는 디지털세를 문제 삼는 듯 보였지만, EU가 시행 중인 디지털시장법(DMA)과 디지털서비스법(DSA), 즉 미국 거대 기술기업을 정조준한 규제들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EU는 공식적으로 디지털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DMA와 DSA를 통해 메타, 애플, 구글 등 대형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막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수천억 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한다.
미국 정부는 이를 ‘사실상의 과세’로 간주해 왔다. 트럼프 행정부 1기에서도 EU의 빅테크 규제를 ‘무역장벽’으로 규정하며 줄곧 비판해온 전례가 있다.
협상 시한이 가까워질수록, EU 내부의 기류도 미묘하게 요동치고 있다. 명분은 지키되, 무역합의라는 실익을 챙겨야 한다는 현실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에도 무역협상에서 예상치 못한 카드를 꺼내는 전략을 즐겨 썼다. 이번에도 ‘관세 협상’이라는 겉포장 속에 ‘규제 완화’라는 속내를 담았다.
미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수출 확대가 아니다. 미국 IT기업에 대한 유럽의 규제 완화 또는 예외 적용이다.
문제는 EU가 시행 중인 규제가 단순한 행정조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디지털시장법(DMA)은 시장의 문턱을 낮추고 공정경쟁을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빅테크 기업을 ‘게이트키퍼’로 지정해 일정한 의무를 부과한다.
디지털서비스법(DSA)은 허위 정보나 유해 콘텐츠 확산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들 법은 EU가 ‘디지털 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10여 년간 준비해온 정책의 핵심이다. 그런 만큼 미국이 이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은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경제적 압박을 통한 규제 간섭으로 비칠 수 있고, EU 입장에선 정책의 독립성을 침해받는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트럼프의 언급 직후, “디지털 규제는 정책 주권의 문제이며,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즉각 반박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선 보다 유연한 움직임도 포착된다.
지난주 공개된 협상 초안에는 DMA 집행과 관련한 별도 양자 대화를 신설하고, 협의가 진행 중일 경우에는 미국 기업에 대한 규제 집행을 일시 유예한다는 문구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논의의 시간’을 벌자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요구한 ‘규제 완화’에 EU가 일정 부분 응답하는 셈이기도 하다.
미국의 주요 플랫폼 기업들은 현재 이중 압박에 놓여 있다. 한쪽에서는 유럽의 규제를 정면 돌파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국 정부가 이 규제를 협상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낀다.
EU의 규제를 일정 부분 수용해온 기업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조정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다.
메타는 지난해 11월, 이용자가 개인 정보 수집에 동의하지 않으면 유료 구독을 하도록 요구하는 ‘지불 또는 동의(pay or consent)’ 모델을 도입했다.
이는 곧바로 EU의 제재를 불렀고, 3천억 원대 과징금이 부과됐다. 이후 메타는 보다 덜 개인화된 광고 옵션을 추가하며 조정에 나섰지만, EU는 이 조치 역시 “불충분하다”며 이행강제금 부과를 경고한 상태다.
애플 역시 DMA 위반 혐의로 8천억 원에 가까운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문제는 외부 결제 유도 금지 조항이었다.
애플은 지난주, 앱스토어 내에서도 외부 결제 옵션을 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수수료도 최대 15%로 낮췄다. 이는 명백히 EU의 압박에 대응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들 기업에게 지금 더 큰 리스크는 규제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규제의 일관성’이다.
유럽이 무역협상이라는 외압에 규제 입장을 바꾸게 된다면, 기업들은 중장기적으로 정책 예측 가능성을 잃게 된다. 로비와 조정의 전략도 통하지 않게 되며, 글로벌 비즈니스 운영에 불확실성이 커진다.
미국 정부의 ‘대신 싸워주기’가 일견 든든해 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기업은 더 이상 규제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EU가 지난 수년간 디지털 규제에 공을 들인 이유는 단순한 산업통제가 아니다.
미국이나 중국 등 거대 기술 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자국의 시장과 소비자를 보호하고, 플랫폼 경제의 새로운 룰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른바 ‘규범 수출’을 통해 글로벌 기준을 주도하려는 야심도 깔려 있었다.
그런 EU가 이제 관세라는 미국의 전통적 무역 무기 앞에서 다시금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각에서는 “다소 불균형적이더라도 일단 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회원국 정상회의에서도 “기한 내 합의가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다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디지털 규제를 포기할 순 없다. EU가 이번 협상에서 규제 독립성을 지켜낸다면, ‘규범 중심’ 디지털 전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의 압력에 밀려 부분 완화나 집행 유예에 합의하게 된다면, 향후 다른 지역에서도 “관세로 밀어붙이면 유럽도 물러난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이는 EU의 정책 자율성뿐 아니라 세계 디지털 규범 경쟁에서도 유럽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관세 협상의 공식 시한은 7월 9일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한 날짜의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규제를 ‘무역 협상 대상’으로 올릴 수 있느냐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유럽의 답변이 담기게 될 것이다.
시장 접근과 규제 자주성 사이에서 EU가 어디에 무게를 둘지, 그리고 미국은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정할 수 있을지. 그 결과에 따라 빅테크의 글로벌 전략은 물론, 디지털 시대의 정책 주권 개념 자체가 재정의될 수 있다.
브뤼셀은 지금 단순한 무역 합의를 넘어, 디지털 질서의 미래를 저울질하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누가 얻고, 누가 잃는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협상이 향후 수년 간 글로벌 플랫폼 규제의 표준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선택은 유럽만의 것이 아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