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글로벌 명품업계의 성적표가 속속 공개되고 있다. 우선 올 1월 까르띠에,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IWC, 반클리프 아펠 등을 보유한 스위스 명품 그룹 리치몬트가 시장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실적을 발표했다. 회계기준 3분기(2024년 10~12월)에 기록한 매출액은 61억 5000만유로.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한 수치로 업계가 예상한 1% 미만의 성장률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 같은 결과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 등 주얼리 분야에서 높은 매출을 기록하며 중국에서의 부진을 보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리치몬트그룹의 3분기 매출 중 절반 이상인 45억 유로가 주얼리 부문에서 나왔다. 성장률은 전년 대비 14%나 증가했다. 하지만 글로벌 명품 시장의 큰손이라 불리는 중국과 홍콩, 마카오 등지의 3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18%나 감소했다. 2분기에도 27%나 감소한 걸 감안하면 뼈아픈 부분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리치몬트그룹의 실적 개선을 놓고 “그룹의 강점과 명품시장 개선의 징후가 결합됐다”고 분석했다. HSBC도 “중국의 소비가 3분기 이후 더 이상 악화하지 않고 있고, 미국의 사치품 소비가 대선 이후 증가했다”며 시장 상황을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지난해 4분기 실적을 발표한 에르메스와 LVMH의 실적도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버킨백으로 대변되는 에르메스의 4분기 매출도 시장의 예상을 웃돌았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7.6% 성장한 39억 6000만유로. 애널리스트들이 분석한 예측(11% 증가)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에르메스 측은 “시계와 가죽제품, 안장 등 모든 사업부가 성장했다”며 “매출 증가폭이 예상보다 컸다”고 밝혔다. 에르메스의 실적은 중국 등 글로벌 경기침체 등으로 전반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명품업계 상황과는 결이 다르다. 국내 명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에르메스나 샤넬은 하이엔드 고객층이 두터워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며 “지금도 버킨백이나 켈리백은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구매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고객의 충성도가 분명하다는 분석이다.
세계 최대 명품 기업인 프랑스의 LVMH는 어떨까. 루이비통, 디올, 셀린느, 펜디, 티파니앤코, 불가리, 위블로, 태그 호이어, 마크제이콥스, 쇼메 등 쟁쟁한 명품브랜드를 보유한 LVMH의 매출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중국에선 부진했지만 유럽과 미국의 명품 소비 회복세가 이를 상쇄했다. 지난해 4분기 매출은 239억유로, 전년 대비 1% 증가한 수치다. 3분기 매출이 –3%였던 걸 감안하면 선전했다는 분위기다. 매출 상승은 화장품 전문 편집숍 세포라가 이끌었다.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나 껑충 뛰었다. 티파니와 불가리가 3%, 디올과 지방시가 2%씩 성장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회장은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지난해 LVMH는 강한 회복력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매출 개선이 수익성으로 이어지진 못했다”고 지적한다. LVMH의 4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4%나 감소한 걸 꼬집은 것이다. LVMH 측은 “지난해에 가격 인상을 거의 하지 않아 인건비 등 비용 증가를 총 마진에서 상쇄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구찌, 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부쉐론, 알렉산더 맥퀸, 브리오니 등을 보유한 또 하나의 프랑스 명품그룹 케링의 지난해 실적은 전년 대비 12%나 감소했다. 지난해 매출은 172억 유로. 영업이익은 46%나 급감한 25억 5000만유로를 기록했다. 좀 더 들여다보면 전자상거래를 포함한 소매 매출이 13%, 도매 매출이 22%나 감소했다. 무엇보다 케링그룹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구찌가 전년 대비 23%(76억 5000만유로)나 추락하며 ‘위기’란 평가를 받았다. 구찌는 지난해 4분기에만 매출이 24%나 곤두박질쳤다. 같은 기간 도매 매출만 놓고 보면 전년 대비 53%나 쪼그라들었다. 당연히(?) 지난해 구찌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1%나 줄었다. 경쟁사인 리치몬트그룹과 에르메스, LVMH가 지난해 4분기에 실적 반등을 이뤄낸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명품 업계에선 “지나친 중국 사랑이 실적 반토막으 이어졌다”고 말한다.
실제로 구찌의 중국 매출 비중은 약 35% 수준이다. 여타 브랜드에 비해 10%가량 높다는게 업계의 분석이다. 국내 수입사의 한 임원은 “화려하고 브랜드 로고를 중시하는 중국 소비층의 성향을 감안한 디자인으로 승부하던 구찌가 조용한 럭셔리를 추구하다 큰 코 다친 격”이라며 “중국 내에선 에르메스나 샤넬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크리에이티브디렉터의 패착이란 말도 나온다. 구찌의 제2전성기를 이끌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에 이어 사바토 데사르노를 내세웠지만 그의 미니멀리즘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찌는 지난 2월 초 사르노와 결별하고 후임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사바토 데 사르노는) 짙은 레드컬러의 앙코라 레드를 앞세워 구찌의 반전을 노렸지만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부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국내 명품 시장은 어떨까. 백화점 업계 관계자의 말을 빌면 “봄철 결혼 시즌을 맞아 주얼리와 시계에 대한 문의와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실제로 백화점의 명품 매출이 올 들어 두자릿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올 2월 초까지 국내 주요 백화점 명품 카테고리 매출을 살펴보면 롯데백화점은 전년 대비 20% 상승했다. 특히 주얼리와 시계가 65%나 껑충 솟아 올랐다. 신세계백화점 역시 전년 대비 18.8% 증가했고, 주얼리와 시계는 58.8% 상승했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지난 1월 명품 매출이 전년 대비 15% 늘었다. 주얼리와 시계 역시 58%나 상승했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1~2월 명품시장의 매출 상승에 대해 “보통 매년 연초에 명품브랜드의 가격 인상이 이어지는데 오르기 전에 사려는 수요가 몰린다”며 “하지만 올해는 예년에 비해 상승폭이 크다”고 전했다. 실제로 주요 명품 브랜드들의 가격 인상은 올해도 이어졌다. 프라다가 국내에서 약 5~7% 가격을 올렸고 까르띠에, 티파니앤코도 3~6% 인상했다.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은 일부 가방 가격을 약 10%, 샤넬도 일부 제품 가격을 2.5% 인상했다. 하이주얼리업계 한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의 매출 부문에서 하이주얼리의 상승세가 도드라진다”며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하이주얼리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결혼 시즌 예물도 남과 다른 하이엔드급 주얼리에 대한 문의가 많아지고 있다”며 “불가리, 반클리프 아펠, 쇼메 등의 브랜드가 주목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구찌 등 일부 브랜드를 제외한 명품 업계의 반등 조짐에 글로벌 컨설팅 그룹 맥킨지는 ‘세계 명품 시장 보고서(State of Luxury Fashion)’에서 2027년까지 1~3%로 완만한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역별로는 미국이 4~6%, 중국은 3~5%, 유럽과 아시아 등 기타 국가는 2~4%로 미국을 중심으로 성장하되 중국 시장이 소비 침체에서 벗어나는 형국이다. 제품별 분류에선 주얼리와 가죽 제품이 4~6%, 의류는 2~4% 성장이 예상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명품시장의 성장과 가격 상승에 대한 분석이다. 보고서는 패션과 가죽제품, 시계, 주얼리 등 제품이 2019~2023년에 매년 5%, 2021~2023년에는 매년 9% 성장을 기록했는데, 업계 전반에 걸쳐 연평균 4%씩 상승한 가격이 이를 주도한 것으로 기록했다. 또한 팬데믹과 엔데믹이 겹친 2019~2023년 사이의 가격 상승이 명품 성장에 80%나 기여했다고 밝혔다.
명품업계의 상승세에 온라인 플랫폼도 카테고리 확장에 나서고 있다. 국내 명품 플랫폼 ‘발란’은 럭셔리 가구와 리빙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올 1월 발란 뷰티 카테고리를 새롭게 만든 이후 덴마크의 ‘일바(ILVA)’, 독일의 ‘까레(KARE)’, 오스트리아의 ‘헤펠(HEFEL)’ 등 하이엔드급 가구 브랜드를 입점시켰다. 패션을 포함해 가구, 인테리어 분야까지 범위를 넓혀 고소득층의 럭셔리 쇼핑 수요를 노린다는 전략이다. 리테일 테크기업 컬리는 지난해 럭셔리 뷰티제품의 매출이 전년대비 40%나 늘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온라인 화장품 부문 성장률 7.5%의 5배가 넘는 수치다. 식료품에 이어 뷰티제품군을 강화해온 컬리는 2023년 아르마니 뷰티에 이어 올 2월에 에르메스 퍼퓸&뷰티를 입점시켰다. 쿠팡은 지난해 10월 럭셔리 뷰티 서비스 ‘R.LUX(알럭스)’를 론칭했다. 모기업 쿠팡 InC는 2022년 글로벌 명품 기업 파페치를 인수하기도 했다. SSG닷컴은 지난해 명품 전문관 ‘쓱 럭셔리’ 리뉴얼해 명품 판매를 강화하고 있다. 위변조가 불가능한 명품 디지털 보증서 ‘SSG 개런티’와 가품 200% 보상제도 시행 중이다. 롯데온도 지난해 11월 명품 특화 매장 ‘럭셔리 쇼룸’을 오픈하고 에트로, 스카로쏘, 아르마니 시계 등을 입점시켰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