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 코로나19가 발발할 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그 팬데믹이 이렇게까지 오래 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엔데믹까지는 거의 3년이 걸렸고, 그 3년간 해외로의 이동은 극도로 제한됐다. 여행시장은 그야말로 꽉 막혔다. 일본은 아예 문을 걸어잠갔고, 다른 나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환전 필요성은 팬데믹 3년간 거의 없어졌고, 항공산업 등도 물류와 운송 수요가 아니었다면 고사위기에 처할 뻔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건 2022년쯤이다. 모두가 얼굴을 꽁꽁 싸맸던 마스크를 쓰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할 무렵, 업계 7~8위에 머물던 하나카드에서 ‘트래블로그’라는 해외여행 카드를 내놨다. 당시 해외여행이 조금씩 풀리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제한적이었기에 이 카드는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미 핀테크기업인 ‘트래블월렛’이 비슷한 외환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기에 금융지주 소속 카드사가 내놓은 아류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2023년 하반기부터 코로나팬데믹이 끝나가는 기미가 보이고, 해외여행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선제적으로 이 카드를 내놨던 하나카드는 모처럼 이 카드로 특정 분야에서 1등을 할 수 있었다. 2024년 8월 기준 하나금융지주의 트래블로그 카드 발급 장수는 500만 장을 돌파했고, 600만 장을 넘보고 있다. 트래블월렛이 핀테크사의 서비스라면, 은행의 망과 시스템을 이용한 금융지주사의 해외여행 카드 서비스는 우리나라에서 시중은행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보다 보편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가장 먼저 엔데믹 해외여행지로 각광받은 일본에서 하나 트래블로그 카드가 편의점 ‘세븐일레븐’서 수수료 없이 ATM(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돈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더해지면서 20~3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해외여행갈 때 트래블로그 없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진 것도 한몫했다.
하나카드가 재빠르게 치고 나가면서 다른 금융지주들도 바빠졌다. 5대 금융지주 중 카드사 1위 신한카드를 갖고 있는 신한금융은 올해 2월 ‘신한 SOL트래블카드’를 내놨다. 기본적으로 모든 트래블카드에 적용되는 앱 환전 수수료 무료와 해외 ATM 출금 수수료 사실상 면제 등 혜택에 공항 라운지 무료이용 혜택, 미국 스타벅스 5% 할인 등 부가서비스를 넣었다. 공격적인 은행점포 영업을 통해 신한카드는 지난 7월 6개월이 채 안된 기간에 100만 장 달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KB카드와 우리카드, 농협카드도 합류했다. 우리카드의 경우 해외 여행 전용카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여행 때 쓰기에 가장 편리한 카드지만, 국내에서도 사용 가능한 체크카드라는 점, 그리고 사용 실적에 따라 5%(월 3만원 한도)를 캐시백해 준다는 장점을 내세웠다. 5대 금융지주가 결과적으로는 2024년을 기점으로 모두 해외여행 전용카드인 ‘트래블 카드’를 내놓으면서 그야말로 해외여행 카드 대전이 본격 시작된 셈이다.
해외여행을 겨냥해 ‘외화환전’ 시장을 겨냥한 이 카드는 분명 매력적인 상품이지만, 연회비 없는 체크카드 형태로 주로 운영되는 데다, 대부분 수수료를 무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카드사 입장에선 ‘적자만 겨우 면한 정도’라고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리 이 카드가 인기를 끈다고 해도,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 계층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물음표가 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5대 금융지주들은 올해의 ‘킬러 상품’으로 트래블카드를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
금융업계에선 해외여행 특화카드가 금융지주 계열사의 협업으로 시너지 낼 수 있는 최적의 상품이라고 보고 있다. 하나금융과 하나카드 사례를 보면 분명해진다. 하나금융지주는 하나카드의 해외여행 특화카드 ‘트래블로그’를 내세워 은행과 비은행 계열사들이 동반 성장하는 전략으로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는 중이다. 하나금융그룹에서 사실상 존재감이 ‘제로’에 가까운 하나손해보험은 하나카드와 손잡고 출시한 ‘트래블로그 플랜’을 통해 전년 동기 대비 1900%의 성장을 기록했다. 하나손해보험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이 보험상품에 가입한 건수는 3만5000건이었는데, 지난해 1800건과 비교하면 20배 가까이 늘어났다. 하나손보의 여행자 보험 전체에서 트래블로그 앱 하나머니를 통해 유입된 비중은 올해 상반기 43.3%였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이 비중이 3.4%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나 트래블로그가 하나손보의 가입자 수와 수익성을 높인 것은 물론, 하나머니 앱 이용자 수도 놀라울 정도로 활성화시켰다는 해석을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은행에서 일단 수시입출금식 통장을 만들고, 외화통장을 만들어야만 가동이 가능한 해외여행 전용 카드의 특성상 이를 통한 은행의 신규고객 유치와 저원가성 예금 확보도 트래블카드가 가져온 효과로 꼽힌다. 이 카드는 기본적으로 외화환전 서비스가 메인인 만큼,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은행에 계좌를 오픈하고, 외환 통장도 만들어야 한다. 올해 4월 이후로는 다른 은행 계좌와도 연동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특정 금융지주의 트래블카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관련 앱에서 가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되면 편리한 해당 은행 계좌를 개설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 은행권에선 하나은행이 트래블로그 출시를 통해 수 십만개의 신규 계좌를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후발주자인 신한은행이나 우리은행도 비슷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계좌에 돈을 넣어두는 것에 대한 이자는 거의 없지만,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은 계좌에 돈을 어느 정도 넣어두고 있는데, 이는 은행입장에선 저원가성 예금의 증가로 이어져 호재다. 은행에서 이자를 많이 지급하지 않으면서 머물러 있는 저원가성예금은 대표적인 효자상품이다. 은행은 금리가 0.1% 수준인 저원가성 예금이 많을수록 예대금리 차가 확대돼 더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
트래블카드가 단순 카드사의 상품을 넘어 은행과 보험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해외여행 카드는 저원가성예금을 늘려주는 상품”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지주 차원에서는 미래 고객 확보라는 큰 숙제를 트래블카드 고객 유치를 통해 일부나마 달성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트래블카드 주 고객층은 20~30대이다. 하나카드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기준 트래블로그 체크카드 전체 이용자 가운데 63.4%는 2030세대였다.
20대가 36.1%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 30대(27.3%), 40대(21.6%)가 뒤를 이었다. 지난 2월 SOL 트래블체크카드를 내놓은 신한카드의 경우에도 출시 4개월 만에 유치한 75만 가입자 가운데 20대가 18%, 30대가 27%를 차지해 2030세대가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했을 정도다. 은행 입장에선 20대를 고객으로 유치하는 데 많은 마케팅 비용을 쓰고 있는데, 트래블카드를 통해 저절로 유입되는 젊은 층이 많아 이들이 자연스럽게 금융지주의 고객으로 포섭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분간 트래블카드 경쟁은 금융지주를 중심으로 더 심화될 전망이다. 금융지주 내 다른 계열사들과의 협업도 강화될 수 있다. 선발주자인 하나카드의 경우 1위 자리 수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미 600만장 발급이라는 기록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지만,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아서다. 일단 다른 트래블카드와 달리 ‘선물하기’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원래 외화는 선물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신제품이나 새로운 기술, 서비스 등이 나올때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해주는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해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으면서 현재 외화 선물하기가 가능한 유일한 카드 플랫폼이다. 또 핀테크사인 트래블월렛과만 제휴가 되어 있던 ‘비자(VISA)’와 제휴를 해 타사들이 마스터카드나 유니온페이 등과 제휴가 되어 있는 점과 차별화했다.
신한카드는 국내 서비스에 강점을 뒀다. 해외여행 기간보다 국내 체류 기간이 길다는 점에 착안해 국내 4대 편의점에서 해당 체크카드를 이용할 때 일 1회, 월 3회까지 5%를 최대 월 3000원 한도로 할인해주고, 국내 대중교통 이용 시 결제일에 1%를 할인해주는 식이다. 우리카드가 이용실적의 5%를 캐시백 해주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카드 혜택 확대 계획도 밝혔다. 신한카드 관계자는 “업계 최고 수준의 빅데이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해 고객들의 국내외 가맹점 사용 행태 분석 등을 통해 여러 여행지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고객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KB카드도 카페 및 베이커리 할인, 철도와 고속·시외버스, 주차장 할인 등의 혜택을 해외여행 전용 카드에 넣었다. KB손해보험과 제휴해 해외여행보험을 KB손해보험에서 가입하고 해당 체크카드로 결제 시 최대 5000포인트(포인트리)를 준다. 젊은 고객층이 많은 해외여행카드 특성을 감안한 ‘스누피 에디션’ 등 디자인카드 출시도 이벤트성으로 진행했다.
우리금융의 위비트래블은 미리 사놓은 외화예금에 대해 달러 2%, 유로 1.5%의 이자를 지급한다는 점과 국내·해외가맹점 이용시 5% 캐시백 할인이 가능하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이 밖에도 입금 시 환율우대 100%, 해외 ATM 출금수수료 면제 해외가맹점 이용수수료 면제 등 기본적인 혜택은 동일하다.
박인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