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시작된 미국 증시 랠리에 가속도를 붙인 이벤트는 지난 2월 말 엔비디아의 실적 발표였다. 당시 발표한 엔비디아의 2023년 4분기 실적을 보면 중국 매출 감소에도 불구 매출 221억달러로 가이던스 204억달러를 크게 웃돈 ‘슈퍼 어닝 서프라이즈’였다. 매분기마다 가이던스를 웃돌았던 엔비디아였지만 이미 높아진 밸류에이션 때문에 시장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엔비디아는 전년 대비 265% 늘어난 매출로 시장의 우려를 불식하며 인공지능(AI) 생태계에 들어 있는 기업들의 주식까지 함께 끌어올렸다. 데이터센터 매출이 전년 대비 409%인 184억달러인데 이는 TSMC의 전체 4분기 매출 196억달러를 능가한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매출은 164억달러였다. 엔비디아 데이터센터 사업부의 매출 비중은 83%를 웃돌았고, 엔비디아의 매출총이익률은 무려 77%를 기록했다. AI 혁명 이후로 매분기 2%포인트씩 마진이 향상되는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익의 질은 더 좋았다. 영업이익은 147억달러로 영업마진(OPM)은 66.7%에 달했다. GPU 방면에서 독점적인 위치로 영업이익률을 크게 끌어올린 것이다.
엔비디아는 실적 발표 이후 밸류에이션 부담도 덜었다. 2025년 연간 예상 실적은 영업이익 821억달러와 주당순이익(EPS)은 28.36달러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예상 EPS 기준 주가이익비율(PER)이 27.7배로 다른 빅테크나 반도체 업체 대비 높지 않은 수준이다”라며 “엔비디아의 압도적 비전과 이를 실적으로 현실화하는 능력을 감안하면, 엔비디아 공급망에 속한 종목과 그렇지 못한 종목 간의 차별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이웅찬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AI 랠리가 인터넷 개통으로 시작한 1990년대의 인터넷 혁명이나 아이폰3 발표로 시작한 2010년대의 모바일 혁명과 같다면 4~5년간은 더 증시가 상승할 여지가 남아 있다”며 “앞선 두 번의 기술혁명과 비슷한 궤적을 따라간다면 AI 랠리는 다음 금리 인상 기간에, AI 활용 기업이 늘어나며 선두기업의 경제적 해자가 메워질 때 끝날 것으로 생각한다”고 내다봤다.
단순히 GPU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기회가 확장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한종목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엔비디아의 다음 목표는 자율주행과 헬스케어로 엔비디아가 거의 10년 동안 공을 들인 부문이다”라며 “트랜스포머 기반 ‘AI 대유행’에 최대 수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오랜 기간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고 성공할 경우 엔비디아의 총유효시장(TAM)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즉 엔비디아는 단순히 GPU 하드웨어 업체가 아니라, 자율주행과 헬스케어, 그리고 로봇에 최적화된 AI를 만드는 ‘파운데이션’ 회사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엔비디아가 이끌 AI 생태계에 들어갈 수 있는 종목을 선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AI 생태계에 있는 기업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드웨어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파운드리, 반도체 장비 등과 관련된 반도체 회사들이 주를 이룬다면 소프트웨어는 AI를 활용해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 후 특징은 AI 하드웨어 기업들의 주가에는 탄력이 붙었지만 AI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실적에 대한 실망감으로 주가가 다소 정체됐다는 것이다. 아직 AI는 투자 단계에 있어 실제 수익에 큰 영향을 주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소프트웨어 투자보다 하드웨어 기업 투자가 우선시되는 분위기다.
국내 투자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AI 하드웨어 기업은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면서 지난해부터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한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4분기 업계 최초로 HBM3 양산을 시작한 후 주요 고객인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을 이어오고 있다. 2024년 3월에는 5세대 HBM인 HBM3E 양산을 역시 업계 최초로 시작할 예정이다. 엔비디아의 H200 출시 일정에 맞추어 양산을 개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부터는 HBM 생산을 위한 TSV Capa가 2023년 대비 유의미하게 늘면서 HBM의 D램 내 매출 비중이 처음으로 20%를 넘어설 것이다”라며 “매출 내 HBM 비중의 증가는 곧 평균판매단가(ASP) 상승으로 이어져 경쟁사에 비해 앞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SK하이닉스를 위협하는 다른 경쟁자들은 삼성전자와 미국 기업 마이크론이다. 마이크론은 2분기부터 출하가 예정되어 있는 엔비디아 H200용 HBM3E(24GB 8단)를 본격적으로 생산 돌입했다고 2월 말 밝혔다. 현재 36GB 12단 제품도 샘플링 중이다. 아직 마이크론의 HBM3E 수율은 알 수 없고 생산능력도 경쟁사 대비 현저히 낮지만 기존 예상보다 빠른 시장 진입으로 HBM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가 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미국 기업이라는 점이 강점이다.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도 AI 반도체 밸류체인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장비주가 엔비디아 훈풍에 신고가를 경신하면서 니케이225도 버블 붕괴 전의 최고점을 회복하기도 했다. 디스코는 웨이퍼 그라인더 시장에서 70%를 점유하고 있고 다이서(Dicer) 시장에선 80%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이 주요 고객이다. 적층되는 D램이 많아질수록 두꺼워지는 HBM은 얇게 만드는 그라인더 공정이 중요해 수주 잔고가 증가하고 있다.
AI 반도체 생태계의 파운드리는 TSMC가 주도하고 있다. AI5에 들어 있는 유일한 비 미국 기업이다. 압도적인 미세공정 점유율을 자랑하며 팹리스 기업 엔비디아에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11월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타이베이에서 열린 시상식에 사전 예고 없이 등장해 장중머우 TSMC 창업자를 향한 축사를 남기며 “엔비디아도 TSMC가 없었다면 지금의 성과를 이뤄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전 세계의 기술 관련 산업이 모두 TSMC의 발전 덕분에 실현될 수 있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인텔은 파운드리 기업으로서 가치가 부상하고 있다. 올 연말부터 1.8나노(㎚·10억분의 1m) 공정(18A)의 양산에 들어간다. 여기에 마이크로소프트(MS)가 자체 개발한 AI 칩을 생산한다. 현재 파운드리 점유율은 1% 남짓이지만 지난해 9월 1.8나노급인 18A 공정 반도체 웨이퍼 시제품을 깜짝 공개하며 삼성전자와 TSMC를 긴장시킨 바 있다.
HBM 장비주로는 한미반도체도 들 수 있다. HBM에 적용되는 패키징 공정을 담당한다. 지난 2월 SK하이닉스의 HBM 생산 일부 공정을 TSMC가 담당하며, SK하이닉스는 패키징 일부 공정을 담당하기로 한 양 사 간의 AI 동맹이 보도됐는데 여기에 적용되는 패키징 장비는 한미반도체에 발주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한미반도체 주가는 2월 한 달간 48%가 뛰었다.
곽민정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향후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 팹을 통해 HBM 중심으로 패키징 및 생산을 담당하고, TSMC가 애리조나 팹에서 GPU를 포함한 CoWoS 패키징 공정을 한 뒤, 미국 하이퍼스케일러 업체들에 공급, ‘Made in USA’ AI 칩을 확보하겠다는 미국 행정부의 의지에 따라, 한미반도체 HBM 관련 장비들의 수주 모멘텀이 매우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ARM홀딩스는 AI 가속기 설계를 위한 다수의 IP 블록을 가진 업체로 설계 라이선스를 통해 매출을 올리고 있다. 반도체 회사 브로드컴은 시스템반도체로는 3위인 미국의 반도체 회사다. AI는 빠른 시간 안에 데이터의 대량 전송이 필수적인데 이에 최적화한 케이블 모뎀·셋톱박스·스위치·라우터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생산한다. 올 초 브로드컴은 AI 매출액을 정의하는 고성능 네트워킹 반도체와 커스텀 반도체 모두 시장 성장 전망을 상향했다. 반도체 부문에서 AI 비중 전망을 25%에서 35%로 상향했는데, 이는 AI 매출액 전망을 약 40% 상향한 것을 시사한다.
델테크놀로지는 AI 서버 수요에 따라 실적이 좌우되는 기업이다. 델의 ISG 사업부분은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 필요한 서버와 네트워킹 제품을 판매한다. 델은 2025년엔 전년 대비 15% 매출이 증가할 것이란 가이던스를 3월 실적 발표 때 제시했다. 델의 주 서버 제공 기업은 자체 데이터센터를 짓는 기업들이다. 2023년엔 엔비디아 효과로 H100에서 공급을 초과하는 수요가 나오면서 엔비디아와 빅테크 업체에만 AI 가속기가 공급될 수밖에 없었다. H100 쇼티지 때문에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건설도 지연됐지만 TSMC가 캐파를 확장하면서 빅테크 외 기업들도 H100을 공급받게 돼 데이터센터 건설이 늘어나며 서버 수요 역시 폭증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엔비디아를 연상케 하는 급등세를 보인 종목은 슈퍼마이크로컴퓨터(SMCI)가 있다. 엔비디아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슈퍼마이크로컴퓨터는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컴퓨팅, AI 등 다양한 시장에서 앱에 최적화된 서버 및 스토리지 시스템을 제공한다. 특히 환경 친화적이고 에너지 절약적인 제품을 설계, 구축할 수 있는 게 큰 경쟁력으로 꼽힌다. 슈퍼마이크로의 액체 냉각 제품은 프로세스 가열을 방지해 AI 시대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에는 246% 급등했고 올 들어서도 250% 추가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시계를 확장한다면 AI 소프트웨어 기업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서비스나우, 스노우플레이크 등이 있다.
서비스나우는 워크플로우 자동화 기업으로 생성 AI를 탑재해 사용성을 강화하고 있고 데이터독은 생성 AI 기반 클라우드 인프라를 제공한다.
스노우플레이크는 AI 모델 구축, 배포, 관리를 위한 빅데이터 워크로드 플랫폼이며 팔란티어는 실제 조직 운영사의 의사결정 지원 및 자동화를 위한 AI 개발 플랫폼이다.
[김제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