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게임업계에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블리자드, 라이엇게임즈 등 글로벌 게임사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엔데믹 이후 게임 시장 성장세 둔화가 이어지자 불황 장기화를 대비해 몸집 줄이기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성장세가 멈춘 국내 게임업계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경영 효율화에 착수한 모습이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인수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올초부터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MS 게임 부문 수장인 필 스펜서 최고경영자(CEO)는 내부 공유 이메일에서 “지속 가능한 비용 구조를 갖춘 전략과 실행 계획을 조율해 가는 데 전념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과정의 일부로 직원 2만 2000명 중 약 1900명 규모의 인원 감축이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감원은 블리자드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블리자드를 공동 창업한 앨런 애덤도 회사를 떠났다.
일본 소니그룹의 게임 사업 계열사인 소니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SIE)는 지난 2월 비용 절감을 위해 전체 직원의 8%에 해당하는 900여 명을 감원했다. 감원은 일본을 포함해 미주, 유럽, 아시아 태평양 등 전 세계 사업장 직원이 대상이 됐다. 핵심 매출원인 플레이스테이션(PS)의 수익성이 떨어진 게 이유로 분석됐다. 또 자회사 PS 스튜디오 중 영국 런던 스튜디오는 문을 닫았다. 미국 비디오게임 개발사 일렉트로닉아츠(EA)는 670여 명을 대상으로 2분기 초까지 구조조정을 진행할 방침을 세웠다. 텐센트 계열사인 게임업체 라이엇게임즈가 전체 직원 11%를 구조조정했다. 또 자사 퍼블리싱 레이블 ‘라이엇 포지’를 해체했다. 세계 최대 규모 e스포츠 기업 중 하나인 ESL페이스잇그룹 또한 전체 직원의 15%인 250~300명의 직원을 해고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게임업계 전반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여파는 게임 엔진 개발 회사, 게임 플랫폼 등 생태계 전반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임 엔진 회사 유니티는 전체 인력의 약 25%에 달하는 1800여 명을 감축했다. 유니티의 CEO 제임스 화이트허스트는 “핵심 사업에 집중하고 장기적인 성공과 수익성을 추구하는 조치”라고 밝혔다. 언리얼 엔진을 개발하는 에픽게임즈는 비핵심부서를 중심으로 870여 명을 감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1위 게임 스트리밍 기업 트위치는 전체 직원의 35%에 해당하는 직원을 떠나보냈다. 업계에서는 1년 사이에만 총 900명이 넘는 직원들이 트위치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게임 커뮤니티 플랫폼 디스코드는 올 초 전체 직원 중 17%에 해당하는 170명을 구조조정했다. 이 회사 역사상 최대 규모다.
블리자드, 라이엇게임즈 등 글로벌 게임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구조조정 칼바람은 한국에까지 영향을 준 상황이다.
블리자드코리아를 비롯해 세계적인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를 개발·운영 중인 글로벌 게임사 라이엇게임즈 한국 지사도 감원을 진행한 것으로 파악됐다. 앞서 라이엇게임즈는 글로벌 차원에서 전체 임직원의 11%에 달하는 인력을 회사에서 내보냈는데 한국 지사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게임사의 약진, 유사 경쟁작 난립 등으로 업계 전반이 침체된 국내 게임사들도 조직 효율화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실적 악화에 빠진 회사를 중심으로 비(非)게임 사업 축소, 인력·비용 감축 등에 속도를 높이고 본업인 게임 개발과 퍼블리싱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국내 게임업계에서는 뒤숭숭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일부 게임사가 연초부터 진행한 구조조정을 두고 “이제 시작”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동안은 개발 조직 외 인력으로 감원 대상이 한정돼 있었다면, 앞으로는 비주력 지식재산권(IP) 개발 인력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중견 게임사뿐 아니라 대형 게임사들도 핵심 인력과 주력사업을 추리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는 전언이다.
당장 게임사들은 비용 절감 등 경영효율화에 나서는 한편 캐시카우가 될 IP 발굴에 속도를 높일 전망이다. 현재 대부분의 게임사들은 성과에 따라 기존 사업 구조조정과 함께 새로운 장르, 기기, 플랫폼으로의 확장을 꾀하기 시작했다. 최근 IP를 활용한 게임 기대작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면서 게임은 물론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슈퍼 IP’를 확보하려는 게임사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내 게임사들은 상대적으로 실적이 저조한 게임 프로젝트를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경쟁력이 낮다고 판단되는 비게임 사업은 과감히 철수하는 방향으로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올해 신작 성과에 따라 게임사들의 ‘암흑기’ 탈출 여부가 갈리고, 주요 회사들 간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신작 부재·부진 ▲확률형 아이템 규제 시행 ▲인건비·마케팅비 증가 등이 리스크 요인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게임사들은 새로운 게임 IP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해 ‘어닝쇼크’ 수준의 실적 하락을 보인 엔씨소프트는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IP를 공격적으로 확보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간 대형 M&A에 보수적이었던 회사 기조를 바꾼 것으로 주목된다. 홍원준 엔씨소프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현금 밸런스가 약 1조9000억원 정도 되고, 부동산이나 유동화할 수 있는 자산도 많다”면서 “(M&A와 관련해서) 현재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고 있는 만큼, 진행 중인 투자의 방향성을 올해는 실질적인 결과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의 경우 대표 캐시카우인 ‘리니지’ 시리즈의 매출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 데다, ‘제 2의 리니지’가 될 만한 신작 역시 장기간 부재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이 안팎으로 고조된 상황이다.
크래프톤은 기존 인기 IP를 강화하는 동시에 차세대 먹거리가 될 신규 IP 발굴에 집중할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 비용 통제와 신작 개발에 집중하면서 대형 신작 출시가 없었던 크래프톤은 올해 신규 IP 기반 신작 5종을 출시할 예정이다. 크래프톤은 소수 지분 투자와 퍼블리싱 계약을 병행하는 ‘세컨드 파티 퍼블리싱’ 전략으로 10곳 이상의 개발사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4분기와 7분기 연속 영업적자 흐름을 끊은 넷마블 역시 올해 공격적인 신작 출시로 실적 개선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게임사들은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게임 개발에 AI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단연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인건비) 문제다. 실제로 게임 개발에 AI를 적용하는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향후 게임사 인력구조를 바꿀 수 있는 문제다.
게임의 세계관(시나리오), 게임 맵, 캐릭터 일러스트, 아이템 등 게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개발에 AI 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생성형 AI를 활용하면 텍스트, 오디오, 이미지 등 콘텐츠를 새롭게 거의 무제한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막대한 제작비용과 늘어지는 개발 시간은 게임사들의 고민이었다. 트리플 A급으로 불리는 글로벌 대작 게임의 경우, 게임 하나를 제작하는 데 200~300명의 대규모 인력이 투입되고 제작비가 1억달러(약 1300억원)를 넘어서기도 한다. 게임 제작비 비중을 개략적으로 아트 부문 40%, 프로그래밍 부문 40%, 기획 부문 20%로 본다면 AI는 아트와 프로그래밍 부문의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익명을 요청한 국내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생성형 AI로 인한 게임사 구조조정이 아직 국내에서 포착되고 있지는 않지만 개발자와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입지를 중장기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게임 제작에 AI 툴을 도입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최대 게임업체 블리자드를 품은 MS는 미국 AI 전문기업 인월드AI와 손잡고 콘솔게임 플랫폼 엑스박스 스튜디오를 위한 AI 도구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생성형 AI 도입으로 게임 개발자의 저변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게임 개발 난도 하락→신규 게임 개발자의 증가→게임 퀄리티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기대하고 있다.
[황순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