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이고, 나는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애플의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한 말이다.
최근 애플의 속사정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현지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간판 기업인 애플에 대해 “애플의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그 겨울이 한동안 이어질 수도 있다”고 최근 지적하기도 했다. 몇년 새 차곡차곡 쌓여온 ‘차이나리스크’가 이제는 가시적으로 애플 실적을 압박하기 시작한 데다 유럽연합(EU) 세금·규제 리스크가 겹친 탓이다. 애플은 이제 마이크로소프트(MSFT)에 시총 1위를 내어줄 위기를 맞을 정도로 올해 매그니피센트7(미국 7대 간판 빅테크 기업) 중 주가 상승률이 가장 낮았다.
애플은 11월 2일 뉴욕증시 마감 후 올해 3분기(7~9월·2023회계연도 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해당 분기 매출과 1주당 순이익(EPS)은 각각 895억달러와 1.46달러다. 이는 금융정보업체 LSEG가 집계한 전문가 기대치(매출 892억8000만달러·EPS 1.39달러)를 웃도는 수치다.
겉으로 보면 ‘호실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투자자들은 실적 발표날 시간 외 거래에서 앞다퉈 애플 매도에 나선 결과 주가가 3% 넘게 급락하기도 했다. WSJ은 “다소 저조한 아이폰 판매 사이클과 중국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나타난다”면서 “다른 빅테크 기업이 인공지능(AI) 사업을 주도하면서 주가가 오른 것을 감안할 때 애플은 이번 실적 시즌에서 가장 낮은 기준을 충족해야 할 것으로 보였는데 그마저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실적을 보면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회사의 3분기 전체 매출은 1년 전보다 약 1% 줄었다. 소폭 감소라고 할 수 있지만 매출이 지난해 4분기 이래 4개 분기 연속 뒷걸음질 쳤다. 회계연도 1년간 전체 매출(3832억9000만달러) 역시 전년 대비 3% 감소했다.
매출을 주요 사업별로 보면 서비스 부문 매출이 연간 16% 급증했다. 다만 아이폰 매출이 3% 늘어나는 데 그쳤고 아이패드 매출은 10% 감소했으며 노트북·개인용 컴퓨터(PC) 등 맥 시리즈 매출은 34% 급감했다. 이 중 아이폰 3분기 매출 증가율은 아이폰14가 나온 지난해 3분기(10% 증가)보다 낮고 아이폰13이 나온 2021년 3분기(47%)에 비해서도 낮다. 애플은 통상 9월 중순 신형 아이폰을 출시하는데 이에 대한 수요 열기가 3분기에 일부 반영된다. 4분기(10~12월) 실적을 책임질 신형 스마트폰인 아이폰15 시리즈의 경우 출시 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루카 마에스트리 애플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실적 발표 당시, 올해 4분기 매출 등 사업 목표와 관련해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고 ‘지난해와 비슷할 것’이라고만 언급해 투자 실망감을 키웠다. 월가는 지난해보다 5% 늘어난 수준(1229억8000만달러)을 기대해왔다.
애플의 발목을 잡는 최대 리스크는 중국이다. 올해 3분기 애플의 중국 내 매출은 연간 약 3% 감소했는데 이는 지난해 3분기(6% 증가)와 비교된다. 쿡 CEO는 “올해 3분기 아이폰15가 지난해 아이폰14보다 더 좋은 성과를 냈으며 3분기 중국 아이폰 판매가 사상 최대치”라고 언급했다. 다만 정작 아이폰15 시리즈는 ‘최대 시장’ 중국에서 판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시장데이터 분석업체인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아이폰15 출시 후 17일간 기준 해당 스마트폰의 중국 내 판매는 아이폰14 때와 비교해 4.5% 줄었으며, 2~3주 앞서 출시된 화웨이 신형 메이트 60 프로는 올해 500만~600만 대 판매를 달성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관련해 제프리스증권 역시 “화웨이는 올해 이미 스마트폰 시장에서 메이트 60 열풍에 힘입어 애플을 앞질렀으며 초기 추정이 맞다면 아이폰15 판매량은 이전 아이폰14 등 모델보다 판매량이 두 자릿수 감소율을 보일 수 있다”면서 “애플로서는 중국에서 오포·비보 등 현지 브랜드가 본격 확장하기 시작한 2018년 이후 최악의 아이폰 판매 실적일 것”으로 지적했다.
이를 의식한 듯 쿡 CEO는 실적 설명회 개회사 때 중국은 언급하지 않고 인도만 세 번 거론하며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우리는 인도에서 역대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며 “매우 강력한 두 자릿수의 성장을 이뤘다”고 밝혔다.
애플의 차이나리스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11월 중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통해 미·중 협력을 시사했지만 첨단기술을 둘러싼 양국 갈등 구도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올해 8월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을 대상으로 ‘아이폰 사용 금지령’을 내려 아이폰15 흥행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는 미·중 갈등 한가운데 선 중국 화웨이가 신형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출시하던 시점이다. 화웨이는 미국·유럽 주요국 제재 영향으로 5세대(5G)용 반도체 칩을 공급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5G 속도를 지원하는 메이트60 프로를 8월 말 공개한 후 9월 초 출시했다. 해당 스마트폰은 출시 후 보름 만에 150만 대가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지도부의 공공연한 ‘애국 소비’ 동원이 이뤄진다. 이런 가운데 카운터포인트는 “애플의 9월 중국 시장점유율은 1%포인트(p) 줄었지만, 화웨이의 점유율은 4%p 가까이 올라섰다”고 분석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쿡 CEO는 중국을 깜짝 방문해 애플스토어와 공장을 들르고 공산당 고위 관계자들을 줄줄이 만났다. 이를 즈음해 중국 당국은 애플 최대 협력사인 폭스콘을 상대로 토지 사용·세무 조사에 들어갔다. 폭스콘은 전 세계 아이폰 생산의 70~80%를 담당하는 업체다. 이어 중국 당국은 애플 아이폰 앱스토어를 포함해 해외 애플리케이션(앱) 단속을 강화하는 새로운 규제 도입에 나섰다. 중국은 2009년부터 ‘만리방화벽’으로 알려진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구축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사이트 접속을 차단해왔지만 아이폰 사용자들은 가상사설망(VPN)을 통해 해당 앱을 내려받고 접속할 수 있었다. 다만 중국 측은 이를 엄격히 금지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구글이 아이폰에 기본 검색 엔진 설정을 위해 애플에 매년 수십억달러를 지불해 검색 엔진 독점권을 유지했다면서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구글 CEO 겸 모기업인 알파벳 CEO인 순다르 피차이는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서 열린 반독점 소송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애플 기기에서 구글이 사파리 브라우저 검색 광고로 벌어들인 수익 일부를 애플에 지급했다’는 사실에 대해 “맞다”고 인정했다. 피차이 CEO는 구글이 애플에 지급한 연간 수익 배분액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구글이 2021년 수익 배분금으로 책정한 263억달러 중 대부분이 애플로 갔다고 밝혔다.
이는 전날 시카고대학교 부스 경영 대학원의 케빈 머피 교수가 전날 구글 측 증인으로 나온 자리에서 회사 기밀로 다뤄져온 해당 내용을 실수로 언급하면서 주목받게 됐다. 구글과 애플이 지난 2002년부터 손잡고 구글을 아이폰 등 애플 기기 사파리의 기본 검색 엔진으로 사용하도록 했고, 구글이 이를 유지하기 위해 검색 광고 수익 36%를 애플에 지급해왔다는 것이다.
해당 사실이 법 위반이라는 연방정부 공세가 이어진다면 애플 수익성도 위협받을 것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이와 관련해 앞서 쿡 CEO는 실적 설명회에서 “우리는 사용자들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린다”고만 밝혀 즉답을 피한 바 있다.
한편 미국 밖에서 애플은 세금 폭탄과 또 다른 소송리스크를 맞이했다. 세금의 경우 유럽에서 143억유로 규모 애플 측 세금 미납 건에 대한 소송 결과가 뒤집힐 위기에 처했다. 또 인도에서는 인도 정부가 애플을 비롯한 빅테크 기업을 상대로 부당 회계 처리에 대한 수억달러어치 세금을 추가로 추징할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43억유로에 달하는 미납 세금을 두고 EU와 수년째 법정 공방을 벌여온 애플이 최종 패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유럽사법재판소(ECJ)를 인용해 전했다. EU 최고법원 격인 ECJ의 조반니 피트루젤라 법무관은 “애플이 아일랜드에 143억유로어치 체납 세금(이자 포함)을 납부해야 한다는 EU집행위원회의 명령을 파기한 법원 결정은 보류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앞서 지난 2020년, EU 일반법원은 집행위가 아일랜드의 애플 체납 세금 징수 명령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집행위는 애플이 아일랜드 정부로부터 불공정한 세제 혜택을 받음으로써 EU 보조금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는데 애플과 아일랜드 정부가 소송을 걸어 집행위가 패소했다. 이번에는 EU 집행위가 다시 ECJ에 항소한 상태다.
FT는 법무관 발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최종 판결로 이어지는 경우가 높다는 점을 들어 내년 상반기 ECJ 최종 선고에서 애플 패소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인도에서는 세무 당국이 애플과 구글, 아마존 등 기업들의 국가 간 수익 이전과 관련해 회계 관행을 조사한 결과 각 기업별로 6억달러 세금 추가 징수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현지 매체 이코노믹타임스는 세무 당국이 지난 2021년부터 조사를 진행해왔으며 특히 애플 인도 법인이 현지에서 판매할 애플 제품을 해외 공장에서 수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전했다. 애플 인도 법인은 해당 수입은 국제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과세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세무 당국은 국제 거래라는 입장이다.
인도는 쿡 CEO가 각별히 강조해온 시장이다. 스위스계 투자은행 UBS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12개월 동안 아이폰 매출 중 인도 비중은 4%에 불과하지만 인도 내 아이폰 판매 대수는 31% 늘었다. 미국과 중국, 유럽 내 감소세와 대조된다.
이런 가운데 월가에서는 애플에 대해 실망스러운 평가가 나온다. 최근 JP모건의 새믹 채터지 연구원은 애플 투자의견(매수·목표가 230달러)을 유지하면서도 “아이폰15 리드타임이 최근 4주 연속 조정됐으며 아이폰14보다 낮다”고 지적했다. 이어 “애플이 거시 경제적 압박을 피하지 못했고 특정 부문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면서 “어려운 환경이 지속되면 사업 성장세에 대한 우려가 더 커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리드타임이란 구매부터 배송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리드타임이 짧으면 수요 둔화·리드타임이 길면 수요가 높다는 신호로 해석되곤 한다.
JP모건 집계에 따르면 아이폰15 출시 초기인 지난 10월 말 기준 평균 리드타임은 하루, 15 프로는 15일, 15 프로맥스는 25일이다. 아이폰 14의 각 모델 리드타임에 비해 전반적으로 짧다는 평이다. 중국 현지에서는 아이폰15가 출시 한 달여 만에 할인 판매에 돌입했다는 소식도 나온 바 있다.
로젠블랫의 바턴 크로켓 연구원은 최근 애플에 대해 ‘중립’ 투자 의견을 유지하면서도 12개월 목표가는 기존 198달러에서 189달러로 낮췄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기로 꼽히는 아이폰을 만든 애플을 존경하지만 시장을 놀라게 할 신제품이 등장하지 않은 탓에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DA데이비드슨의 톰 포르테 연구원 역시 ‘중립’ 의견을 유지하면서 목표가를 180달러에서 166달러로 낮췄다.
반면 월가에서 애플에 대해 가장 높은 목표가(240달러)를 제시해온 웨드부시의 댄 아이브스 연구원은 “중국 전체 스마트폰 매출이 3% 줄어든 것을 고려할 때 아이폰만 특별히 뒤처진 것이 아니며 근본적인 성장세는 여전히 강력하다”고 강조했다.
팩트셋 집계 기준 월가 전문가는 총44명으로 이 중 28명이 매수(비중 확대·시장수익률 상회 포함) 의견이다. 중립(비중 유지 포함) 의견은 13명, 매도 의견은 3명이다. 이들이 낸 목표가는 125~240달러로 중앙값은 195.90달러다.
김인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