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들은 하나의 필름으로 찍은 모든 사진을 한 장에 보여주는 밀착 인화지(콘택트 시트)를 보고 빨간색 유성펜으로 O나 X를 적어 뽑을 사진을 표시한다. 사진 거장 윌리엄 클라인(1926~2022)은 이런 관례를 차용해 3장의 사진을 하나로 묶고 그 위에 선을 그렸다. 회화와 영화, 사진이 하나로 결합한 ‘페인티드 콘택트’(Painted Contacts) 연작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던 그의 ‘종합예술성’을 보여준다. 양쪽 옆 사진들은 가운데 사진의 전후 장면이 되니 영화적 요소도 품은 셈이다.
현대 추상 사진부터 영화까지 넘나든 영상미학의 거장 클라인의 유고전 ‘DEAR FOLKS’가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015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무려 7년간 준비된 해외 기획전인데, 전시를 준비하던 지난해 9월 작가가 파리에서 96세로 별세하며 세계 첫 유고전이 됐다.
초기 추상 사진과 디자인, 책, 영상 등 전방위 예술가로서 방대한 활동을 보여주는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 아울러 작품 130여점과 자료 40여점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
송영숙 뮤지엄한미 관장은 “가장 사진적이면서도 사진의 틀을 넘어 매체에 대한 치열한 탐색과 자유로운 정신이 융합한 그의 진면모를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뉴욕의 헝가리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입체파 화가 페르낭 레제의 조수를 거쳐 건축 디자인 패션 등 다양한 영역의 대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예술의 길을 개척해 온 길을 보여준다. 초기 추상 사진은 카메라를 쓰지 않고 암실에서 기하학적 이미지로 실험한 결과물이었다. 특히 4개의 사진을 대형 패널에 함께 보여주는 입체작품 ‘터닝 패널’은 건축가들의 협업으로 공간 안에서 설치를 보여준 것이다.
이선영 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은 “전시에서 기하학적 추상과 포토그램 사진추상, 레터리즘 회화 섹션은 국내에 작품이 소개된 적이 거의 없지만, 사진사를 넘어 미술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전했다.
첫 야외 사진 연작도 남다르다. 1952년 네덜란드의 발헤렌 섬을 방문했다가 추상미술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이 살았던 헛간 외벽에서 추상을 발견한 것이다. 수직·수평의 선으로 둘러싸인 크고 평평한 건물 정면을 찍은 후 암실에서 화면을 자르고 반전시켜 완성했다. 이 작품은 이후 본격적인 현장 사진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기존의 사진 문법을 깨고 군중 속으로 거침없이 다가가 생생함을 포착한 뉴욕, 파리 등 도시 연작과 패션잡지 보그 사진은 너무도 유명하다. 주변 설정은 물론 얼굴을 지우는 실험 등으로 상업 씬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 밖에도 초기 책 작업 원본이나 문자와 추상을 결합한 1960년대 ‘레트리즘 회화’, 본인이 직접 제작한 영화 ‘위대한 무하마드 알리’ 등의 장면들을 발췌한 영상도 볼 수 있다.
객원 큐레이터 라파엘 스토팽은 “클라인이 살던 시기는 카메라, 유성영화, 텔레비전에서 디지털 기술 등장까지 스틸 이미지와 활동사진 관련 수많은 발명이 이뤄졌다. 클라인은 대중을 위한 예술을 수용하고 대중을 겨냥해 활용한 1인이다.”라고 했다.
30여년간 협업한 피에르-루이 드니 스튜디오 매니저도 “무엇보다 클라인스러운 전시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17일까지. 유료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