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재 오너셰프가 이끄는 이노베이티브(퓨전 한식) 다이닝 레스토랑 ‘모수 서울’이 지난 10월 13일 발표된 세계적인 미식 레스토랑 리스트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에서 서울신라호텔의 한식당 라연을 제치고 최고 등급인 3스타를 받았다. 그가 5년 전 이맘때 서울 한남동에 모수 서울을 열고 2019년 1스타를 받은 데 이어 2020년 2스타에 올라선 지 2년 만이다. 이로써 안 셰프는 만 40세 나이에 3스타를 거머쥔 국내 최연소 셰프가 됐다.
변화가 크지 않은 미쉐린 가이드에서 모수처럼 단기간에 두 계단을 올라서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특히 한국에서는 모수를 제외하면 3스타 경지에 오른 레스토랑은 미쉐린 가이드 서울이 발간되기 시작한 2016년부터 현재까지 줄곧 3스타에 있었던 서울 강남구의 한식당 가온과 6년간 3스타였다가 이번에 처음 2스타로 내려온 라연뿐이다.
최근 서울 한남동의 모수 서울에서 안 셰프를 만났다. 그는 “처음 이곳에서 레스토랑을 열던 날이 기억난다. 첫해, 첫날, 첫 번째 손님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며 “항상 이 일에 진심을 다했다. 어떤 칭찬과 비판을 받아도 늘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전혀 들떠 있지 않은 그의 담담한 말투와 진지한 눈빛에는 지나온 세월들이 꾹꾹 눌러 담긴 듯 함축돼 있었다.
모수 서울은 안 셰프가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열었던 첫 다이닝 레스토랑 ‘모수 샌프란시스코’를 2017년 서울로 옮겨온 것이다. ‘잿방어와 숙성 광귤간장’ ‘참고등어 그루노브루아’ ‘대문짝 넙치와 발효된 채소’ 등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파인 다이닝 코스 요리를 제공한다. 모수라는 이름은 ‘코스모스’의 한글 발음에서 영감을 받은 이름으로, 코스모스가 활짝 핀 뒤뜰에서 즐겁게 뛰어놀던 어린 시절처럼 모수에서의 경험이 손님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모수의 장르는 이노베이티브 한식으로 알려졌지만 장르를 특정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안 셰프의 생각이다. 그는 “누구는 퓨전 한식, 누구는 퓨전 일식, 퓨전 양식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말해주는 게 정말 좋다. 셰프로서 내가 내 음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4월 홍콩에 ‘모수 홍콩’도 새롭게 오픈했다.
▶3스타를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눈물을 흘린 모습이 동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어렸을 때부터 미쉐린 가이드 ‘3스타 셰프’는 상상도 못했던 명예이자 자리였다. 셰프로서 정점에 오른 순간이었는데, 굉장히 좋았지만 힘들었던 기억이 함께 스쳤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좋아하는 걸 잘하려면 노력이 필요했고 셰프는 손과 몸, 머리를 다 사용하는 전문직이다 보니 늘 나 자신을 힘들게 하면서 배워나가야 했다. 솔직히 어떤 생각이 들었다기보다 그동안 꿈꾸고 노력해온 모든 것들, 그 자체로 생각보다 감정이 먼저 건드려진 것 같다. 1스타를 받았을 때도 그 나름대로의 기분을 만끽하면서 ‘뭔가 이뤘다’는 생각을 했고 2스타를 받았을 때도 기뻤다. 그런데 3스타는 좀 달랐다. 발끝에서부터 뭔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함께하는 직원들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고, 미국에서 건너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듯했던,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무모했던 도전들이 씨가 돼서 열매를 맺었다고 느꼈다. 셰프에게는 자기 커리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주어진 가장 큰 상인데 마냥 기쁘기만 한 게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무거운 자리일 수도 있고 책임감도 많이 필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날 많은 분들이 문자, 전화를 주셨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같이 울었다’는 말이었다. 찰나지만 그 순간의 감정을 같이 느껴주셨던 것 같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 편인데 미쉐린이 나를 전 세계에 울보로 만들었다(웃음). 주변에서 ‘마흔 살에 3스타,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고 그제야 스스로 ‘잘했다’ 생각했다.
▶모수 서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첫 레스토랑 ‘모수 샌프란시스코’를 먼저 열었다. 모수 샌프란시스코는 오픈 첫해 미쉐린 가이드에서 1스타를 받았고 나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모수 샌프란시스코를 정리하고 서울로 가겠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다. 5~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의 미식 수준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인 다이닝이라고 불릴 만한 레스토랑도 몇 곳 없었다. 반면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뉴욕보다도 훨씬 앞서서 다이닝 트렌드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당시 모수가 서울로 온 게 샌프란시스코 지역 매체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사람들은 왜 더 뒤처진 곳으로 가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서든 열심히 할 거고 내가 더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은 곳, 가족들이 있는 곳이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더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현지의 다양한 식재료들이 흥미로웠고,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한국 식문화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언젠가 서울의 미식 수준도 세계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CJ제일제당과는 어떤 관계인가.
▷예전에 CJ제일제당의 외식사업 등에 컨설팅을 해줬던 인연이 있다. 그 덕분에 기회를 얻었다. 모수 서울은 CJ제일제당의 제안으로 투자를 받긴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만든 모수를 서울로 옮겨온 나의 브랜드다. 물론 경영에서 CJ제일제당 측이 서포트해주시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브랜드 오너십과 운영권 등은 전적으로 제가 갖고 있다. 메뉴,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레스토랑의 중요한 부분들을 결정하는 주체도 오너셰프인 저를 중심으로 한 모수 팀이다.
▶‘이노베이티브 한식’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데 어떤 장르인가.
▷이노베이티브는 사실 미쉐린 가이드에서 분류하는 장르다. 모수의 장르를 한 단어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이노베이티브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저의 어떤 삶, 생각, 자라면서 먹었던 음식들, 옛것과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리스펙트(존경) 등에 테크닉을 더해 다른 데 없는 메뉴들을 만들어낸다. 누구는 퓨전 한식이라고 하고 누구는 퓨전 일식, 퓨전 양식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말해주는 게 정말 좋다. 셰프로서 내가 내 음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모수의 기본 철학은 현지 재료에 대한 리스펙트다. 모수 서울의 경우 한국 식재료를 응용해 만들어낸 새로운 음식을 제공한다. 바로 이런 점이 모수 샌프란시스코, 모수 홍콩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다. 한국에서 색다른 메뉴를 만들기 위해 가령 일본에서 성게알을 가져오고 프랑스에서 푸아그라를 가져온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나 스스로에게 항상 묻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모수 홍콩에서는 한국의 베리류 대신 중국의 구기자 등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할 수도 있다. 다만 한국에선 재료의 다양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예컨대 김장철에 시장에 가면 어디서든지 다 똑같은 품종의 배추만 판다. 이런 부분은 모수처럼 창의적인 스타일의 음식을 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인 것 같다.
▶어떻게 요리에 빠지게 됐나.
▷한 번도 요리에 그냥 푹 빠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열세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중식당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을 도우며 자라긴 했지만 본래 셰프가 꿈은 아니었다. 원래 꿈은 포르쉐 같은 슈퍼카 정비사였다.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우연히 흰 코트와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들을 봤다. 요리학교가 뭔지도 몰랐을 때였다. 시간이 남아 그 사람들을 따라 요리학교에 들어가봤는데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100% 취업 보장이라는 입학상담사의 말에 그 길로 정비학교에서 환불을 받고 요리학교에 등록한 게 시작이었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요리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기뻐하시진 않았다. 하지만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4년에 요리를 시작해 18년을 달려왔다. 중간에 그만둔 적도 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왔다. 너무 힘들고 렌트비를 제때 못 낼 정도로 돈이 없어서 브랜드 없는 25센트짜리 콜라 같은 걸로 저녁을 때운 적도 있다. 다행히 주변의 좋은 조언 덕에 한 번씩 그런 고비가 왔을 때 넘을 수 있었다. 그때를 잘 버티니까 점점 더 쉬워지면서 나중에는 진심으로 즐기게 됐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니 재미가 붙었고 표현의 자유까지 느끼게 됐다.
▶좋은 스승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미국 베벌리힐스의 고급 스시 전문점인 ‘우라사와’에서 일할 때였는데, 어느 날 (한국계 미국인인) 코리 리 셰프가 손님으로 혼자 식당을 찾았다. 당시엔 그가 누구인 줄도 몰랐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일했었는지 등 한국어로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말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인 ‘프렌치 런드리’에서 한번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리 셰프가 프렌치 런드리의 헤드셰프(총괄셰프)로 있을 때였다. 내 요리 실력이 아니라 내가 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에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2008년 프렌치 런드리의 막내 셰프인 ‘코미셰프’로 들어가 두 달 뒤 파트장급인 ‘셰프 드 파티(CDP)’로 진급하게 됐다. 20대의 악몽과 같은 시절이었지만 그 시간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리 리 셰프가 오너셰프로 문을 연 ‘베누(Benu)’ CDP, 모로코 식당 ‘아지자(Aziza)’의 헤드셰프 등을 거쳐 모수 샌프란시스코를 열게 됐다. (베누는 2014년 한국 출신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가운데 최초로 미쉐린 가이드에서 3스타를 받았다.)
▶지난 4월 모수 홍콩을 열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항상 홍콩과 인연이 있었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세상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면 홍콩 영화를 봤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내 영웅들이었다. 홍콩의 거리와 도시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처음부터 홍콩에 레스토랑을 열 계획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홍콩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했었다. 모수 서울을 찾는 외국인 손님 중 20~30%가 홍콩에서 온 손님들이었다. 홍콩에서 홍보한 적 없었는데도 모수 서울에 대한 좋은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 모수 홍콩의 헤드셰프, 수셰프 등은 모수 서울 출신 셰프들이다. 그들이 해외 경험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모수 홍콩 팀은 6~7개월간 함께 호흡을 맞추며 준비 과정을 거쳤다. 홍콩은 주말에도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여서 필요할 때마다 자주 오가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 분야에서 젊고 유능한 친구들을 양육하고 싶다. 특히 파인 다이닝에서 예술과 이상 없이 돈만 추구한다면 셰프가 아니라 사업가일 거다. 셰프는 이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음식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나가는 사람들이다. 경제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결국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셰프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점점 사회가 팍팍해지다 보니 요즘 젊은 친구들은 꿈을 액수로 환산하기도 한다. 주방에 왔다가 돈이 적으니까 쿠팡 가서 배달기사로 일하겠다는 사람도 나온다. 나는 다음 세대 친구들에게 요리도 가르치지만 모든 것에는 단계가 있다는 걸 많이 가르쳐주고자 한다. 어떤 직업이든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적어도 전문직에 있어서 일과 삶의 균형은 20대 때 추구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 매우 불균형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고 하루 20시간씩 일하고 4시간 자고, 주말 없고 친구도 안 만나면서 미치도록 요리에만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 내 삶의 밸런스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거다.
▶가족과의 시간을 각별하게 여긴다고 알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누구에게나 가족과의 시간은 언제나 소중하다. 다만 많은 셰프들이 과도한 업무량과 레스토랑 운영의 압박감,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균형을 잃기도 한다. 내가 다른 셰프들보다 가족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9살 딸과 7살 아들이 있는데 최근에는 시상식에도 아이들과 같이 단상에 올라갔다. 아빠가 뭘 하는지, 아빠가 왜 맨날 집에 없는지 알게 해주고 싶었고 그 기쁨의 순간을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이다.
[송경은 매일경제 유통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