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요? 이걸 아셔야 합니다. 우린 전동화가 아니라 롤스로이스가 우선이에요. 자율주행은 왜 없냐고요? 고객의 요구 사항에 전혀 없는 요소거든요. 롤스로이스 고객들은 대부분 기사를 두고 있습니다.”
지난해 만난 토르스텐 뮐러 외트뵈슈 롤스로이스모터카 CEO와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그는 지난해 10월 크리스 브라운리지에게 바통을 넘기고 퇴임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늘 롤스로이스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브랜드 이미지와 고객의 니즈를 중시한다는 방증인데, 창립자 헨리 로이스의 철학이기도 한 100% 완벽함을 추구하는 노력은 100년을 훌쩍 넘긴 현재 롤스로이스를 자동차계의 셀러브리티로 이끌었다.
올해 창립 120주년이 된 롤스로이스는 대당 가격이 4억원대부터 시작된다. 비싼 만큼 원하는 대로 주문이 가능한데, 일례로 네덜란드의 패션 디자이너 ‘아이리스 반 헤르펜’과 협업한 ‘팬텀 신토피아’에는 롤스로이스 최초로 비스포크(맞춤제작) 향이 도입됐다. 전문 조향사가 고객과 협업해 단 한 명을 위한 향을 제조하고 그렇게 탄생한 향이 좌석의 헤드레스트에 내장됐다. 물론 최고급 스칸디나비아산 가죽과 이탈리아산 호두나무, 최상품 양모로 직조된 카펫도 롤스로이스만의 자랑 중 하나다. 1904년 영국 귀족가문의 자동차광 찰스 롤스(1877~1910년)와 전기기술자 헨리 로이스(1863~1933년)가 만나 시작된 롤스로이스의 역사는 120년이 지난 지금 감히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 됐다. 두 사람은 각자의 성을 붙여 ‘롤스로이스(Rolls-Royce)’란 브랜드명을 정하고 성의 첫 알파벳 R을 겹쳐 브랜드 로고로 사용했는데, 브랜드 고유의 라디에이터 형태도 이때 고안됐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롤스와 로이스가 만났던 1904년은 어떤 시대였을까. 우선 그 시대엔 당연히 텔레비전, 페니실린, FM라디오가 없었다. 1903년에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 비행에 성공하며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부푼 꿈이 현실화된 시점이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이 막 시작됐고, 타이타닉호의 운명적인 첫 항해는 8년 뒤에나 일어난 사건이었다. 자동차 역시 걸음마 단계였다. 카를 벤츠가 1886년 바퀴가 3개 달린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생산했지만 운전은 부유층의 취미일 뿐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롤스와 로이스는 엔지니어링, 성능, 안정성, 내구성 등 모든 측면에서 기존의 차량을 뛰어넘는 최고급 자동차를 제작한다.
1907년 첫 차 ‘실버 고스트’를 출시한 후 롤스로이스는 팬텀 시리즈를 선보이며 최고급 차의 전통을 이어 나간다. 1931년에 경쟁사 ‘벤틀리’를 인수한 후 사업 범위를 항공 엔진 분야로 확장한 롤스로이스는 1973년 자동차 부문을 ‘롤스로이스 모터카(Rolls-Royce Motor Car)’로 독립시켰다. 이후 당시 국영 군수 업체인 빅커스(Vickers PLC)에 합병됐고, 롤스로이스란 이름의 권리는 항공 엔진 회사가 된 ‘롤스로이스 PLC’가 갖게 됐다. 1998년 벤틀리가 폭스바겐에 인수된 뒤 같은 해 롤스로이스 모터카는 BMW에 인수된다. 보닛 위에 수줍게 장식된 ‘환희의 여신상(Spirit of Ecstasy)’이 브랜드의 상징이 된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전 세계 50개국에서 총 6032대를 판매하며 브랜드 역사상 최고 실적을 달성했다. 판매량 1, 2위를 기록한 미국과 중국이 전체 판매량을 견인했다. 모델 별로 살펴보면 2022년에 이어 2023년에도 ‘컬리넌’이 가장 많이 팔린 롤스로이스가 됐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선 ‘고스트’의 판매량이 도드라졌다. 롤스로이스 측은 “지난해 4분기에 고객 인도가 시작된 첫 순수전기차 ‘스펙터’는 젊은 층의 수요가 많았다”며 “주문량이 많아 2025년까지 밀려 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롤스로이스의 상징인 ‘비스포크 프로그램’ 역시 역대 최고 주문량과 매출을 달성했다. 롤스로이스는 장기적으로 비스포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22년 7월 두바이에 비스포크를 경험할 수 있는 ‘프라이빗 오피스’를 전 세계 최초로 개관했고, 지난해에는 중국 상하이에도 선보였다. 올해는 서울과 북미에 개관할 예정이다. 크리스 브라운리지 롤스로이스모터카 CEO는 “지난해 롤스로이스는 또다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했다”며 “특히 순수전기차 스펙터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고무적이었고, 이는 차기 모델 개발에 있어 과감히 전동화 전략을 채택한 롤스로이스의 결정에 힘을 싣는 결과”라고 강조했다.
롤스로이스는 최근 서울 청담동에 자리한 ‘롤스로이스 청담 쇼룸’을 새롭게 단장하고 전시장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블랙 배지 고스트 청담 에디션’ 2종을 공개했다. 롤스로이스는 지난 2003년 코오롱모터스와 공식 딜러십 계약을 체결하고 ‘롤스로이스모터카 서울’이란 이름으로 2004년 서울 청담동에 첫 전시장을 열었다. 개관 첫해에 한 자릿 수로 시작한 국내 판매량은 매해 경신을 거듭해 2018년 처음으로 100대를 돌파했고, 지난해에 역대 최고치인 276대를 기록했다. 이번에 공개된 롤스로이스 블랙 배지 고스트 청담 에디션은 청담 쇼룸에서 영감을 얻은 한정판 모델이다. 차량 내에 ‘청담을 위해 영국 굿우드에서 수작업으로 제작(Handbuilt in Goodwood, England for CHEONGDAM)’이란 문구를 새겨 희소성을 강조했다. 새롭게 단장한 청담 쇼룸에는 비스포크 맞춤 제작을 위한 ‘아틀리에’도 마련됐다. 롤스로이스는 국내에서 청담 쇼룸과 판교 라운지, 부산 전시장 등 총 3개의 전시장을 운영 중이다.
그런가 하면 올 1분기에는 법인 승용차에 대한 연두색 번호판 규제 탓에 판매량이 전년 대비 35.2%(35대)나 줄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롤스로이스 외에도 이른바 슈퍼카로 분류되는 벤틀리와 람보르기니 등의 판매량도 각각 77.4%(38대), 22.2%(42대)나 감소했다.
올해 설립 21주년을 맞은 영국 굿우드의 공장 ‘홈 오브 롤스로이스’에선 고객의 취향에 맞춰 한 땀 한 땀 자르고 꿰매고 이어 붙이는 장인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모든 과정이 자동화된 여타 완성차 공장의 그것과 정반대의 풍경이 이곳에선 일상인 셈이다. 롤스로이스를 상징하는 비스포크 프로그램은 고객이 직접 자신만의 명차를 디자인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비스다. 외장 페인트 색상의 조합만 4만 4000여 가지에 이를 만큼 사용할 수 있는 재료와 소재에 한계는 없다. “굿우드를 떠나는 롤스로이스 중 똑같은 차는 단 한 대도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 흠 없는 황소 가죽
롤스로이스는 가시철사 없이 탁 트인 고산 지대 목초지에서 방목된 최고의 황소 가죽만을 사용한다. 롤스로이스 차량에는 15~18개의 가죽 원단이 쓰이는데, 색상을 맞추기 위해 동시간대에 동일한 묶음으로 염색한 가죽만 장인의 손을 거친다. ‘팬텀’ 1대에 약 450여 개의 가죽 조각과 200여 개의 패딩 부품이 사용되고 전체 세트를 만드는 데는 약 17일이 걸린다.
· 내부에 사용되는 6가지 무늬목
차량 내부에는 마호가니, 오크, 엘름, 버드 아이 메이플, 월넛, 피아노 블랙 등 6가지 무늬목이 사용된다. 전 세계 산림 지대에서 들여오는데 고객이 집 앞에서 키우던 나무를 잘라 패널을 만들어 달라면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팬텀 1대에 최대 42개의 나무 패널이 필요한데, 전통 수작업을 통해 전체 세트가 완성되는 데 약 30일이 소요된다. 롤스로이스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색과 결, 모양까지 모두 살피고 맞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 4만 4000여 가지의 외장 페인트
자신만의 차를 만들기 위해 주문할 수 있는 색상은 무한대. 롤스로이스는 기본적으로 4만 4000여가지의 색상을 갖추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한 여성이 평소 가장 좋아하던 샤넬의 핑크색 립스틱과 동일한 색상을 요구해 도색 담당 부서에서 수개월간 같은 색상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 아이콘이 된 양털매트
나무, 가죽, 캐시미어와 함께 롤스로이스의 아이콘이 된 천연 인테리어 요소는 양털매트다. 미국 텍사스주 메리노 양의 양모를 사용하는데, 태닝 작업 전 희고 깨끗한지 확인하는 검사를 거친다. 태닝 작업에는 천연 미네랄워터가 쓰이는데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마실 수 있는 물로 정화해 배출한다.
· 밤하늘을 수놓은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
차량의 천장을 1340개의 광섬유 램프로 장식하는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는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고객의 별자리로도 장식할 수 있다.
· 자신만의 로고 새긴 헤드레스트
시트의 머리받침대인 헤드레스트에는 가문의 상징이나 기업 로고 등 원하는 문양을 수놓을 수 있다. 장인의 수작업으로 완성된다.
· 평범한 대시보드 대신 팬텀 더 갤러리
8세대 ‘뉴 팬텀’이 출시되며 새롭게 선보인 비스포크 프로그램이다. 평범한 대시보드 대신 고객이 직접 주문 제작한 예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원하는 예술가 혹은 디자이너를 직접 선택한 뒤 롤스로이스팀과의 협업을 거쳐 원하는 예술품을 팬텀 안에 전시할 수 있다. 작품은 강화 유리 내부에 설치된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