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경제 위기 우려로 인한 기업들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새해부터 눈에 띄는 가운데 ‘패션’ 산업을 잡기 위한 주요 기업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그간 성장을 주도해온 빅테크 기업들은 2023년 최대 화두였던 인공지능(AI) 산업과 더불어 패션 산업의 질주를 예측하며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는 모양새다. 특히 그간 패션 산업과 거리가 있던 기업들마저 너 나 할 것없이 관심을 보이며 2024년 산업 지형도에 미칠 영향을 놓고 분석이 한창이다.
AI가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던 지난해 말, 국내를 대표하는 유통 공룡으로 성장한 쿠팡이 야심차게 새로운 기업 인수를 발표했다. 특히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다져오던 쿠팡의 신규 투자 소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투자자들에게도 큰 뉴스였다.
12월 18일 쿠팡은 IR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온라인 럭셔리 플랫폼 기업 ‘파페치’를 5억달러, 한화 6500억원에 인수한다고 깜짝 발표했다. 파페치는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1400여 개의 명품 브랜드를 미국, 영국 등 190개국 글로벌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명품 거래 플랫폼이다. 2007년 영국에서 설립된 후 성장세를 거듭하다 2019년 명품 브랜드 기업 뉴가드 그룹을 인수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됐다. 특히 이번 쿠팡의 파페치 인수는 쿠팡 역사상 처음으로 이뤄진 글로벌 기업 인수였던 만큼 업계 관계자들은 그 의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다루는 물건보다 안 다루는 물건을 찾는 것이 빠르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다양한 상품군을 갖추고 새벽배송, 공휴일 배송 등 유통혁명을 주도해온 쿠팡의 신규 투자 분야가 바로 패션이라는 점은 상징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쿠팡은 탁월한 운영 및 물류 시스템을 바탕으로 럭셔리 산업 생태계를 주도해온 파페치와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이번 인수의 목표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특히 전 세계 패션 시장 네트워크를 구축해둔 파페치를 중심으로 독점 브랜드와 부티크 숍, 그리고 세계 유수의 디자이너들을 소비자들과 연결시켜 궁극적으론 패션 산업에서의 쿠팡 혁신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4000억달러 규모로 추정되는 글로벌 개인 명품 시장에서 리더로 자리잡을 뿐 아니라 명품 선호도가 높은 국내 시장에서의 압도적 경쟁력을 선보여 타사와의 차별화에 나서겠다는 포부도 함께 밝혔다. 또 전국 30개 지역 100개 이상 물류 센터를 확보한 쿠팡 물류 인프라와 시너지도 예상하고 있다. 파페치는 그간 뉴욕, 파리, 밀라노 등 브랜드 부티크 인근 지역에서 90분 배송, 당일 배송 서비스를 제공했으나 한국에서는 최대 5일 배송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쿠팡이 보유한 배송망을 이용할 경우 그 시간은 절반 이상으로 단축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쿠팡 입장에서는 그간 약점이라 불렸던 패션 부문에 대한 보완뿐 아니라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명품 분야까지 한꺼번에 품으며 패션 부문에 대한 외연 확장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또한 국내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시장 경쟁력을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는 데 있어 명품이라는 키워드가 가져다줄 부가가치가 무척 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K-패션 브랜드의 해외 수출을 늘려 오히려 파페치를 교두보 삼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국내 패션 브랜드들의 성장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결국 쿠팡의 투자는 성장 정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기 위한 기민한 움직임일 뿐 아니라 쿠팡이 점치는 전도유망한 성장 산업임을 스스로 입증할 기회인 셈이다.
물론 시장에선 우려도 있다. 파페치가 폭발적인 성장기를 거친 직후 급속도로 몸값이 떨어지며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매출 3조달러를 기록한 바 있던 파페치는 과도한 인수합병과 주식 시장의 부진 우려 속에 파산을 목전에 뒀다는 기사까지 나온 바 있다. 2018년 뉴욕증시에 상장할 당시 주당 27달러에 거래를 시작한 파페치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 시기에 보복소비로 수혜를 입은 명품기업의 인기에 힘입어 주가가 급등한 바 있다. 결국 몸값이 230억달러까지 커지며 창사 이래 최고 전성기를 불과 2~3년 전에 누렸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시경제 우려 가운데 지갑을 닫기 시작한 소비자들 탓에 파페치에 대한 성장 우려도 커졌다. 또한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투자금 회수 등이 이뤄지며 파페치 주가는 급격히 하락했다. 결국 파페치는 상장 후 최저가인 주당 60센트까지 폭락하며 공모 이후 주가의 97%가 폭락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2억3800만 달러. 결국 100분의 1 수준으로 몸값이 줄어들며 최대 위기를 맞았던 가운데 쿠팡의 선택을 받으며 기사회생에 성공한 것이다. 오히려 인수 직전 파페치의 몸값에 비하면 2배에 달하는 가격에 인수한 쿠팡의 선택이 섣불렀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다소 시간이 지나봐야 판가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쿠팡의 결단에 힘을 실어주는 뉴스도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다. 포화상태라 여겨졌던 SNS 시장에 숏폼 비디오라는 차별화된 콘텐츠 플랫폼으로 급성장한 틱톡처럼 중국계 패션 브랜드가 추후 패션업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중국을 넘어 전 세계 공략에 나선 패스트패션 기업 ‘쉬인’이다. 유니클로와 자라, H&M으로 대표되는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이미 한 차례 유행을 거쳐 이제는 신규 기업이 공략하기엔 포화된 시장이란 분석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중국발 패스트패션 기업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제2의 틱톡 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력하게 점쳐지는 브랜드가 다름 아닌 쉬인이다.
2023년 뉴욕 주식시장이 기대와 달리 선전한 가운데 하반기 들어 기업공개(IPO)에 나선 기업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을 필두로 독일 신발 제조업체 버켄스탁, 모바일 마트 배달 서비스 인스타카트 등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기대에 비해 기업공개 성적표는 아쉬웠지만 주식시장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켤 수 있을지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는 기업공개 시장은 투자자들의 1순위 관심사라고 볼 수 있다. 기업공개 분위기가 무르익던 지난해 11월 말, 미국 현지 언론에서는 경쟁적으로 쉬인의 IPO 신청소식을 보도했다.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모건스탠리가 상장 주관사로 선정됐고 이번 쉬인의 기업공개는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이어졌다.
쉬인은 기업공개 붐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 미국 상장을 시도한 바 있지만 미·중 갈등과 ESG(환경·사회·거버넌스) 논란 등으로 인해 한 차례 미뤄진 바 있다. 그랬던 쉬인이 3년여 만에 재차 상장 시도에 나섰다는 뉴스는 충분히 흥미로운 기사일 수밖에 없다.
패스트패션 대표기업 쉬인은 2008년 중국 난징에 설립된 패스트패션 브랜드다. 중국의 유니클로라 불리며 성장을 이어온 쉬인은 창업 4년만인 2012년 자체 생산 및 공급망을 갖추며 유통 공룡으로서의 기본기를 다졌다. 이후 입소문을 타고 전 세계 수억 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패스트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특히 AI 기술을 활용한 쉬인의 기술 경쟁력은 기업공개 시장에서 쉬인의 가치를 끌어올린 대표적인 요소다. 쉬인은 AI를 활용, 최신 트렌드와 판매율 등 빅데이터를 분석해 곧바로 제품 생산에 접목했다. 이는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MZ세대를 공략하는 최고의 무기가 됐고 가장 빠르게 유행에 걸맞은 의류를 생산해내는 기업으로서의 경쟁력을 갖췄다. 구체적으로 중국 내 6000여 곳의 협력사를 보유해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고 1000여 개 이상의 신제품을 시즌별, 계절별로 만들어냈다.
또한 자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SNS 틱톡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한 ‘쉬인하울’ 콘텐츠가 유행을 이끌며 폭발적인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추정치로 쉬인은 2022년 한 해 동안 220억~300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속도와 규모 면에서 전 세계를 압도하는 경쟁력을 갖춘 쉬인인 만큼 기업공개 시장에서도 그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다. 한 언론에 따르면 쉬인은 예비투자자 설명에서 800억~900억달러(약 103조~116조원)의 기업가치 평가를 목표로 한다고 알려졌다. 쉬인의 목표가 현실화되면 미국에서 상장된 중국 기업 중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에 상장된 중국 기업 중 가장 높은 기업가치를 보유한 곳은 2021년 684억달러를 인정받은 중국의 자동차공유 기업 디디추싱이다. 쉬인은 이르면 2024년 중에 상장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한 쉬인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미국 기업들 역시 곧바로 대응에 나서는 분위기다. 전 세계 1위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자사 서비스에서 판매 중인 저가 의류 판매 수수료를 최대 12% 인하하며 쉬인을 인식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쉬인이 본격적인 미국 진출에 나서기 전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판매자들에게 당근책을 쓰는 것이다. 아마존은 1월부터 15달러 미만 제품에 대한 판매자 수수료를 5%로 낮추고 15~20달러 사이의 제품을 판매할 경우 10%로 조절했다. 기존 수수료가 17%에 달했지만 대폭 낮추며 판매자들을 잡아두려는 속셈이다. 현지 언론에서는 “아마존은 미국 전자상거래를 장악하고 있지만 중국 기업들의 위협에 직면했다”며 “1~2달러로도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저가 의류 카테고리에서 아마존의 경쟁력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마존은 한발 더 나아가 인도의 키즈패션 브랜드 홉스카치의 시리즈E 투자를 주도하며 2000만달러의 자금 모금을 이끌어냈다. 2021년 아마존 벤처펀드를 통해 인도 스타트업에 최대 2억5000만달러 투자를 약속한 아마존의 선택은 다름 아닌 패션 브랜드인 셈이다.
지난 2015년 설립된 홉스카치는 다양한 아동패션 의류와 액세서리 등을 유통·판매하는 기업이다. 특히 인도 시장에 대한 글로벌 기업들의 관심이 나날이 커져가는 가운데 아마존은 중국을 견제하며 인도를 공략하는 전략을 함께 취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패션 산업에 대한 투자만이 능사가 아니란 분석도 나온다. 모바일 쇼핑 등의 확대로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온라인 투자와 달리 오프라인 패션 산업에 대한 투자는 갈팡질팡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미국 오프라인 유통 강자 월마트는 남성패션 플랫폼 보노보스를 WHP와 익스프레스사에 7500만달러에 매각했다. 2017년 3억1000만달러에 보노보스를 인수한 월마트는 인수가 대비 4분의 1 가격에 패션 브랜드를 처분한 셈이다. 이는 갈수록 매출이 줄어드는 오프라인 패션 사업 부문을 정리해 수익 개선에 나서는 동시에 온라인 시장 확대를 위한 선제적 조치로 풀이된다. 아마존 역시 오프라인 패션 매장 아마존 스타일 어패럴 스토어 2곳을 폐업하며 오프라인 패션 매장에 대한 실패를 자인했다. 백화점 및 오프라인 매장에서 입지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과 달리 빠른 속도로 온라인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는 패션 산업 트렌드를 감안하면 향후 오프라인 패션 산업의 축소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결국 기업들은 적절한 투자 확대와 기회비용 창출, 비용 감축 전략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패션 산업에 대한 투자 전략을 새롭게 수립하고 있는 셈이다. 스타트업계 투자 관계자는 “MZ세대들의 패션 트렌드 역시 그들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소비되고 있다”며 “결국 MZ세대들이 성장해 주요 경제활동인구로 나선다면 패션 소비 역시 그 트렌드에 맞게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해 기업들의 투자 전략도 발맞춰 발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추동훈 기자]